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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 미망인 장칭에 반혁명죄로 사형 선고 [김정한의 역사&오늘]

뉴스1 김정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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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 미망인 장칭에 반혁명죄로 사형 선고 [김정한의 역사&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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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1월 25일



장청. (출처: 人民画报, 1967,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장청. (출처: 人民画报, 1967,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서울=뉴스1) 김정한 기자 = 1981년 1월 25일, 중국 베이징 최고인민법원 특별재판정은 배우 출신이자 전 국가주석 마오쩌둥의 미망인으로 이른바 '4인방'의 우두머리 장칭(江靑)에게 반혁명죄를 적용하여 사형을 선고했다. 다만, 집행은 2년간 유예했다.

이는 10년간 중국 전역을 파괴와 살육의 광풍으로 몰아넣었던 문화대혁명의 실질적인 주역들에 대한 역사의 심판이었다. 동시에 마오쩌둥 시대와의 단절을 선언하는 정치적 상징이었다.

재판부는 장칭이 마오쩌둥의 권위를 등에 업고 린뱌오 등과 결탁해 국가 전복을 꾀했으며, 수많은 당 간부와 지식인을 박해하고 죽음으로 몰아넣었다고 판단했다. 특히 그는 문화예술계를 장악해 '혁명 양판희'만을 강요하며 중국의 전통과 문화를 말살했다고 질타했다.

이 판결은 덩샤오핑을 중심으로 한 실용주의파가 권력을 공고히 했음을 의미했다. 그러나 사형 집행을 2년간 유예한 것은 마오쩌둥의 부인이었던 그를 즉각 처형할 경우 발생할지도 모를 좌파 세력의 반발과 마오쩌둥의 권위 실추를 우려한 고도의 정치적 계산이 작용한 것이었다. 사실상 마오의 과오를 장칭과 4인방에게 모두 씌움으로써, 체제의 정당성은 유지하되 과거의 혼란과는 선을 긋겠다는 의도다.

장칭에게 내려진 사형 판결은 중국 현대사의 거대한 분수령이었다. 10년간의 '혼란'을 끝내고 개혁개방이라는 새로운 항로로 나아가기 위한 불가피한 통과의례였다. 대다수의 중국인들은 이 판결을 환영했다. 이는 공포 정치가 종식되고 법치와 안정이 회복되기를 바라는 민심의 투영이었다.

장칭에게 내려진 법적 선고는 곧 문화대혁명이라는 비극적 시대에 대한 사형 선고와 다름없었다. 중국은 덩샤오핑의 지휘하에 과거의 상처를 딛고 현대화라는 거대한 실험대에 오르게 됐다. 한편 장청은 1991년 5월 14일 77세의 나이로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acenes@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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