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검찰청이 지난 1983년 4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송치됐던 이동섭씨와 고 박광순씨에 대해 기소유예 처분을 승인한 기록. 이동섭, 유현숙 제공 |
20대였던 1980년대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읽은 이유로 불법구금됐다가 기소유예 처분을 받은 피해자들이 43년 만에 검찰로부터 ‘혐의없음’ 처분을 받았다.
서울남부지검은 23일 이동섭(71)씨와 고 박광순(2017년 사망)씨가 20대 후반이던 1983년 국가보안법을 위반한 혐의로 기소유예 처분받은 사건을 재검토한 결과, 혐의가 인정되지 않는다고 판단해 ‘직권 재기 후 혐의없음’ 처분했다고 밝혔다. 이씨와 고 박씨의 부인 유현숙(68)씨는 “국가보안법 피의 사건에 대한 기소유예 처분을 불기소처분으로 변경해 달라”는 내용의 진정서를 최근 대검찰청에 제출한 바 있다.
이씨와 고 박씨는 1983년 2월16일 친구 정진태(73)씨 집에서 ‘자본론’을 비롯한 공산주의 서적을 읽었다는 이유로 서울 관악경찰서 정보과 수사관들에 의해 영장 없이 체포됐다. 이들은 22일간 불법 구금 상태에서 수사기관의 폭행 등 가혹행위와 진술 강요 속에 반성문과 각서 등을 작성했다. 경찰은 “공산주의 서적을 탐독해 북한의 대남 전력 노선에 간접적으로 이롭게 한 혐의(국가보안법 위반)가 인정된다”며 두 사람을 기소유예 의견으로 검찰에 넘겼고, 서울지방검찰청 남부지청은 같은 해 4월 이들에게 기소유예 처분을 내렸다.
기소유예는 혐의는 인정되지만 재판에는 넘기지 않는 처분이다. 검찰 판단인 만큼 재심 청구가 불가능하다. 1983년 당시 이씨와 고 박씨에게 자본론을 보여주는 등 보다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는 이유로 법원에서 징역형을 선고 받았던 정씨의 경우, 지난해 40여년 만에 재심 기회를 얻어 끝내 무죄 판결을 받았다.
반면 이씨와 고 박씨의 경우에는 검찰이 다시 사건을 살펴본 뒤 과거 판단을 뒤집고 불기소 처분을 하는 직권 재기 후 불기소 결정만이 명예를 회복할 유일한 길이었다. 이씨와 유씨는 검찰에 낸 진정서에서 “공동피의자 정진태의 무죄 확정이 이뤄져 진실 규명과 명예 회복이 이뤄진 만큼, 박광순과 이동섭에 대한 기소유예 처분 또한 검찰 직권으로 변경될 필요가 있다”고 촉구했다.
서울남부지검 관계자는 “정씨에 대해 무죄가 선고된 뒤, 정씨와 함께 수사를 받아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던 이씨와 고 박씨에 대한 사건 기록을 확보해 혐의 인정 여부를 면밀히 검토한 결과, 두 사람에 대한 수사 과정에서도 불법 구금 등 법 위반 정황을 확인했다”고 직권 재기 후 불기소 결정을 내린 배경을 밝혔다. 이어 “앞으로도 과거사 사건에서 억울한 피해를 입은 국민들이 신속히 명예를 회복하고 권리를 구제받도록 적극적으로 노력하겠다”고 했다.
이씨는 이날 한겨레에 “내가 5.18 민주화운동 유공자이기도 해서 젊은 시절에 서울에 있는 경찰서란 경찰서는 안 가본 데가 없을 정도였다. 매도 많이 맞고 했는데 당시에는 ‘내 인생이 왜 이리 구겨졌나, 정말 지지리도 복도 없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이제라도 좋은 결과가 나오니 ‘내가 그래도 헛되게 살지는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이씨와 유씨 법률 대리인인 최정규 변호사(법무법인 원곡)는 “검찰이 국가폭력 사건으로 유죄를 선고받았던 이들에 대해 재심을 청구하는 과정에서 기소유예자나 관련 범죄 연루 혐의를 받았던 이들과 그 유가족들을 함께 파악해 직권 재기로 불기소 변경하는 것을 제도화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정인선 기자 re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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