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왼쪽)과 뤽 프리덴 룩셈부르크 총리가 22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유럽연합 긴급 정상회의에 앞서 환담을 나누고 있다. AP 연합뉴스 |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그린란드를 무력 침공하지 않겠다고 물러섰지만, 유럽 정상들은 경계를 풀지 않고 있다. 트럼프는 미국이 그린란드에 대해 “끝도 없는 (…)전면적 접근권”을 갖기로 합의했다고 주장하며 다툼의 불씨를 남겼다. ‘미국이 유럽의 가장 가까운 우방’이라는 신뢰가 이번 갈등을 계기로 깨졌다는 반응이 나온다.
르몽드와 로이터 통신에 따르면, 유럽연합(EU) 27개국 정상은 22일(현지시각) 벨기에 브뤼셀에서 긴급 정상회의를 열어 트럼프의 그린란드 병합 시도에 대한 대응을 논의했다. 앞서 전날 트럼프가 스위스 다보스 세계경제포럼(WEF·다보스포럼)에서 그린란드에 대한 무력 침략 계획이 없으며, 유럽 8개 나라에 대한 보복 관세도 철회하겠다고 밝혔지만 유럽연합은 기존에 계획한 대로 회의를 진행했다.
정상들은 그린란드 갈등이 ‘큰 고비는 넘겼다’는 반응을 보였다. 프리드리히 메르츠 독일 총리는 회의 전 기자들에게 “단결과 결단이 차이를 만들어낼 수 있음을 입증했다”고 말했다. 지난 21일 트럼프가 대유럽 관세를 일방 통보한 직후, 유럽 각국이 무역 제재·보복 관세·북중미 월드컵 불참 같은 강경책을 외친 게 효과를 봤다는 평가다.
그러면서도 유럽은 트럼프가 변덕을 부릴 가능성에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그린란드 문제에 대해 “경계를 풀지 않겠다”며 “프랑스와 유럽이 존중받아야 한다”고 했다. 페테리 오르포 핀란드 총리는 “필요하다면 유럽은 ‘상업적 수단’을 사용할 준비를 유지해야 한다”고 더욱 강경한 어조를 비쳤다.
트럼프가 재차 ‘강공’으로 돌변하면, 최고 수위의 무역 방어 수단인 ‘통상위협대응조치’(ACI)로 맞받자는 얘기다. 통상위협대응조치는 유럽연합 회원국에 ‘경제적 강압’을 가하는 나라의 수입을 제한하거나, 공공조달 시장 접근이나 투자를 차단하고, 특허를 중단한다는 내용이다.
안토니우 코스타 유럽연합 정상회의 상임의장은 회의 이후 기자들에게 “(유럽연합은) 모든 형태의 강압에 맞서 자기 이익을 계속 수호할 것”이라며 “유럽연합은 이를 위한 권한과 수단을 갖고 있으며, 필요한 경우 언제든 그렇게 하겠다”고 강조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2일 스위스 다보스포럼을 마치고 귀국하는 전용기에서 기자들과 대화하고 있다. AFP 연합뉴스 |
유럽의 어조가 누그러지지 않는 건 트럼프가 그린란드에 대한 욕심을 완전히 접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이날 스위스 다보스포럼 일정을 마치고 귀국하는 전용기에서 기자들에게 “(그린란드를 두고) 미국에 훨씬 더 관대한” 새로운 협상이 진행 중이라고 했다. 그는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정확히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에 앞서 미국 언론 폭스비즈니스와의 인터뷰에서도 “세부 사항은 지금 협상하고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그린란드에 대한 미국의) 전면적인 접근”을 논의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그것에는 끝도 없고 시간제한도 없다”며 “우리는 99년이니 10년이니 하는 식의 계약을 하는 게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특히 미국은 차세대 미사일 방어망인 ‘골든돔’을 위해 그린란드에 대한 군사적 접근권을 갖는다고 트럼프는 강조했다. 그는 “우리는 국가 안보와 국제 안보에 대해 말하고 있다”며 “우리는 골든돔을 건설하고 있다는 사실 외엔 어떤 것도 지불할 필요가 없게 될 것”이라고 했다.
유럽은 미국과 그린란드 안보 강화를 위한 협상이 진행되고 있다는 점은 인정하면서도, 구체적인 내용은 결정되지 않았다는 입장이다. 라르스 뢰케 라스무센 덴마크 외무장관은 이날 마리아 말메르 스테네르가르드 스웨덴 외교장관과 공동 기자회견을 열어 “덴마크·그린란드와 미국 사이에 지정한 협상을 할 기회가 열렸다”며 “(그린란드 안보를 강화하는) 목표는 공유하고 있지만 방법은 반드시 같지 않을 수 있다”고 말했다.
로이터 통신은 외교 소식통을 인용해 트럼프와 마르크 뤼터 나토 사무총장이 이날 다보스에서 회동하며, 미국-덴마크가 1951년 맺은 방위 협정을 개정하기로 의견을 모았다고 전했다. 이 협정은 그린란드 공군기지에 미군을 주둔시키는 내용인데, 미군의 더 폭넓은 활동을 보장하는 쪽으로 협정을 바꾼다는 얘기다. 트럼프가 ‘그린란드를 위협한다’고 지목한 중국·러시아의 그린란드 투자를 금지하는 방안도 논의되고 있다.
다른 소식통은 로이터에 당시 논의는 “토대를 마련한 것”에 불과하다며, “구체적인 사항에 대한 보도는 모두 추측에 불과하다”고 했다.
트럼프가 경제적 보복으로 뒤끝을 부릴 가능성 역시 배제할 수 없다. 트럼프는 이날 폭스비즈니스 인터뷰에서 유럽이 미 국채를 계속 매각하면 “대규모 보복”에 나서겠다고 을렀다. 최근 덴마크·스웨덴 연기금들이 미 국채를 판 데 대해 불만을 드러낸 것이다.
유럽은 이번 그린란드 갈등을 겪은 미국-유럽 동맹이 ‘예전 같을 수 없다’고 본다. 이날 카야 칼라스 유럽연합 외교안보 고위대표는 “지난 한주간 대서양 간(미국-유럽) 관계는 결정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며 “어느 날 상황이 바뀌었다가 다음날이면 또 모든 것이 뒤집힐 수 있다.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라고 말했다.
천호성 기자 rieux@hani.co.kr
[한겨레 후원하기] 시민과 함께 민주주의를
겨울밤 밝히는 민주주의 불빛 ▶스토리 보기
▶▶한겨레 뉴스레터 모아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