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혜진 문화예술경영학 박사]
▲ 동래지신밟기 ⓒ국가유산청 |
“덩덕쿵, 덩덕쿵.”
설 연휴가 되면 어디선가 익숙한 장단 소리가 들려온다. 텔레비전 속 민속촌에서, 고향 마을 어귀에서, 새해맞이 공연장에서.
우리는 그 소리를 들으면 왠지 모르게 어깨가 들썩이고 ‘아, 명절이구나’하고 느끼게 된다.
그런데 문득 궁금해진다. 이 소리는 어디서부터 온 것일까? 우리 조상들은 새해를 어떤 소리로 열었을까? 그리고 그 소리에는 어떤 마음이 담겨 있었을까?
마을을 돌며 복을 빌던 소리, 지신밟기
정월 초하루가 되면 마을에는 특별한 풍경이 펼쳐졌다. 꽹과리, 징, 장구, 북을 든 풍물패가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한바탕 소리를 울렸다.
이것이 바로 '지신밟기'다. 지신밟기는 단순한 놀이가 아니었다. '제액초복(除厄招福)'—액운을 쫓아내고 복을 불러들이는 기원의 의례였다.
풍물패가 집 안 구석구석을 돌며 마당에서, 부엌에서, 우물가에서 장단을 치면, 그 소리에 나쁜 기운은 물러가고 좋은 기운이 깃든다고 믿었다.
흥미로운 것은 사물(四物)이 품고 있는 상징이다. 꽹과리 소리는 천둥을, 징 소리는 바람을, 장구 소리는 비를, 북소리는 구름을 담았다고 한다. 사물의 울림은 곧 하늘과 땅의 기운을 불러들이는 소리였던 셈이다.
새해 첫날, 마을 사람들은 이 우주적 소리와 함께 한 해의 안녕을 빌었다.
지신밟기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은 장단 사이사이 연희자들이 기량을 펼치는 ‘개인놀이’의 순간이다.
지역과 전승에 따라 덧배기춤이나 북춤, 소고잽이 춤가락 등 다양한 춤이 어우러졌고, 오늘날 공연장에서는 그 가운데 일부가 별도의 레퍼토리로 무대화되어 전승되기도 한다.
우리가 무대에서 '버꾸춤'이라 부르는 춤은, 전라남도 완도 금당도 풍물(농악놀이) 속 소고잽이 춤가락을 바탕으로 서한우가 무대화한 전통 북춤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때의 ‘버꾸’는 농악북보다 작고 소고보다 큰 중북(중복)을 가리키며, 손목에 끈을 걸어 북을 돌리고 차올리며 치는 역동적인 연희법이 특징이다. 이 소박한 악기 하나에 서민들의 거친 숨결과 살아 꿈틀거리는 생명력이 실린다.
버꾸를 든 잽이들이 "매구야~" 하고 외치며 장단을 몰아칠 때, 그 외침은 지신밟기와 매귀굿의 맥락 속에서 잡귀를 물리치고 복을 기원하는 의미로 해석되기도 한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버꾸춤 역시 공동체의 염원과 신명을 몸짓으로 풀어낸 춤으로 받아들여져 왔다.
궁중에서 역신을 쫓던 소리, 나례와 처용무
민간에서 지신밟기가 있었다면 궁중에서는 나례(儺禮)가 있었다.
섣달그믐부터 정초까지, 왕실에서는 한 해의 나쁜 기운을 쫓는 성대한 의식을 거행했다.
나례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처용무(處容舞)'였다. 다섯 명의 무원이 오방색—동쪽의 청색, 서쪽의 백색, 남쪽의 홍색, 북쪽의 흑색, 중앙의 황색—의 의상을 입고 처용 가면을 쓴 채 춤을 춘다.
이 다섯 색깔과 무원들의 위치, 그들이 그리는 동선 하나하나에는 음양오행의 원리가 깃들어 있어, 춤 자체가 사방에서 밀려드는 잡귀를 막는 결계가 되었다.
처용무의 기원은 신라 헌강왕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동해 용왕의 아들 처용이 아내를 범하려던 역신(疫神)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자, 역신이 그 앞에 무릎을 꿇고 물러났다는 설화가 그 바탕이다.
처용이 초연한 마음으로 노래하고 춤추어 사악한 기운을 물리쳤듯, 처용무는 분노 대신 풍류와 해학으로 액운을 이겨내는 우리 조상들의 지혜를 담고 있다.
처용무는 세종 때 다섯 무원이 추는 오방처용무로 확대되었고 성종 때에는 학무(鶴舞), 연화대무(蓮花臺舞)와 결합한 '학연화대처용무합설'의 형태로 정립되어 조선 말기까지 이어졌다.
처용무는 2009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천 년을 이어 온 이 춤은 오늘날에도 새해의 문을 여는 상징적인 공연으로 사랑받고 있다.
▲ 처용무 中 수양수무. ⓒ국가유산청 |
민간과 궁중, 다른 모습 같은 마음
돌아보면, 민간의 지신밟기와 궁중의 나례는 형식은 달랐지만 마음은 같았다.
마을 사람들이 꽹과리와 버꾸를 들고 집집마다 돌며 복을 빌었듯, 왕실에서는 처용 가면을 쓴 무원들이 오방의 춤으로 나라의 안녕을 기원했다.
새해 첫날, 액운을 쫓고 복을 부르고자 했던 간절한 마음—그것이 소리와 춤이 되어 천 년을 이어 온 것이다.
그 소리와 춤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해마다 설을 앞두고 전국 각지의 국악 공연장에서는 신년음악회가 열린다. 무대 위에서 버꾸춤의 신명 넘치는 장단이 울려 퍼지고, 오방색 의상을 입은 처용무가 장엄하게 펼쳐진다. 공연장을 찾은 관객들은 그 소리와 춤 속에서 새해의 첫 기운을 받아간다.
오는 1월 23일, 대전시립연정국악원에서 열리는 신년음악회가 좋은 기회다.
대전시립연정국악단의 신년음악회는 2020년 첫선을 보인 이래 매해 매진을 이어가며 대전 시민들이 새해를 여는 대표 공연으로 자리 잡았다.
올해 공연에서는 버꾸춤과 처용무 등 정초의 전통 무대가 펼쳐질 예정이다. "매구야~" 하는 버꾸춤의 구성진 외침과 오방색 의상을 입은 처용무의 장엄한 춤사위를 눈앞에서 마주하는 것, 그것은 설명으로는 전할 수 없는 감동이 될 것이다.
이번 설 연휴에는 고향 마을에서 들려오는 "덩덕쿵" 소리에 귀 기울여보자. 텔레비전 속 풍물 가락을 무심코 흘려듣지 말고, 그 소리가 품은 천 년의 기원을 떠올려보자.
지신밟기의 장단에는 액운을 쫓고 복을 부르던 마을 사람들의 간절함이 있다. 버꾸춤의 "매구야~" 외침에는 서민들의 거친 숨결과 살아 있는 생명력이 있다. 처용무의 춤사위에는 역병을 물리치고 태평을 기원하던 나라의 염원이 있다.
익숙한 소리에 담긴 이야기를 알게 되면, 명절이 가진 의미가 조금 더 깊어질 것이다. 올 설에는 우리 음악과 함께,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기원해본다.
[손혜진 문화예술경영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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