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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칼럼] 미국의 변화에 적응하는 유럽

서울경제 여론독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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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칼럼] 미국의 변화에 적응하는 유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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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증시 혼조, 다우 0.58% 하락-나스닥 0.28% 상승
■파리드 자카리아 워싱턴포스트 칼럼니스트
트럼프에 보복 대신 亞 등 관계 확대
교역다변화 욕구, 다극화 전환 이끌어
세계, 이젠 美 토대 위 질서 원치않아


지난 수년 동안 유럽은 행동에 나서기에는 너무 분열됐고 결정을 내리지 못할 만큼 무기력하며 전략적 사고를 하기에는 지나치게 안일하다는 조롱을 받았다. 그러나 지난해 유럽은 조용하면서도 기민하게 행동하며 이 같은 고정관념을 뒤집었다. 미국이 어디로 튈지 모를 예측 불가능한 태도를 취하자 유럽은 반발하거나 굴복하는 대신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백악관에 재입성한 도널드 트럼프가 거의 한 세기 만에 최고 수준의 관세를 부과하자 많은 사람들은 유럽이 보복 조치를 취할 것으로 예상했다. 대서양을 가로지르는 무역전쟁은 인플레이션을 부추기고 공급망을 교란시키며 이미 취약한 경제성장을 더욱 약화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유럽은 보복의 유혹을 뿌리쳤다. 대신 압력을 감수하고 사태 악화를 피하며 시간을 벌었다. 이 같은 절제 덕분에 세계경제가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그리고 최근 유럽은 행동에 나섰다. 유럽연합(EU) 회원국들은 25년간 교착상태에 빠졌던 협상을 타결하며 브라질·아르헨티나·파라과이 및 우루과이와 포괄적인 무역협정을 매듭 지었다. 협정이 비준되면 인구 기준으로 세계 최대 규모의 자유무역지대 하나가 추가되는데 이 지역의 역내 인구만도 7억 명을 헤아린다.

유럽이 라틴아메리카에 손을 내민 것 역시 고립된 움직임이 아니다. 최근 몇 주 동안 브뤼셀과 베이징은 전기차, 정부 보조금과 시장 접근 등을 둘러싸고 광범위한 갈등으로 번질 뻔했던 새로운 무역 마찰을 해소했다고 밝혔다. 유럽은 중국의 산업정책과 정치 시스템을 신뢰하지 않지만 꼭 필요한 동반자로 여기고 있다.

이와 동시에 유럽은 동남아시아와의 관계 강화에도 속도를 내고 있다. EU는 현재 싱가포르·베트남과 무역협정을 체결했고 인도네시아와 무역 협상을 마무리 지었다. 역내 다른 국가들과도 협상을 추진 중이다. 동남아시아는 이미 유럽 바깥에서 세 번째로 큰 EU의 무역 파트너다.

교역 다변화에 대한 이 같은 본능은 유럽 너머로 확산되고 있다. 중국 측 무역 자료는 세계가 베이징이 아닌 미국을 상대로 위험 제거 작업을 벌이고 있음을 보여준다. 미국과의 교역량 급감에도 중국의 전체 수출은 계속 증가세를 유지하고 있다. 2025년도 중국의 무역흑자는 라틴아메리카·아프리카·유럽과 대다수 아시아 국가로의 수출 증가에 힘입어 사상 최대 규모인 1조 2000억 달러에 육박했다. 관세는 중국을 고립시키지 않았다. 오히려 여러 국가들로 하여금 베이징과의 교역을 이어가도록 장려하는 결과를 낳았다.


여론조사는 이 같은 변화를 그대로 반영한다. 유럽외교관계이사회(ECFR)가 실시한 주요 여론조사에 따르면 인도·브라질·남아프리카공화국 등 핵심 신흥 경제국 가운데 중국이 아닌 미국 주도의 경제블록에 가입하기를 원한다는 응답자들의 비중이 단 2년 사이에 15~19%포인트 하락했다. 또한 10개 유럽 국가들 중 단지 16%만이 미국이 우방국이라는 견해를 밝혔다. 조지 요 전 싱가포르 외교장관의 최근 발언대로 트럼프는 다극화 시대로의 전환을 가속화하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미국의 이미지가 아니라 미래 권력이다. 중국은 현대 역사상 가장 탄탄한 경제 생태계 중 하나를 체계적으로 구축하고 있다. 핵심 광물 가공 분야를 장악했고 배터리 및 전기차 부문에서 규모의 경제에 도달했으며 충격과 제재 및 관세를 견뎌내기 위해 수출 시장을 다변화하고 있다.

믿을 만한 미국의 유일한 대응책은 관세가 아니라 자체적인 생태계 구축이다. 미국은 여전히 특출난 강점을 갖고 있다. 우방과 파트너 국가들로 구성된 방대한 연결망은 세계의 첨단 기술, 자본, 숙련된 노동력과 소비 수요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다. 하지만 미국은 이점의 상당 부분을 헛되이 낭비했다. 우방국을 거래 상대로 취급하고 관세를 무기화해 그들을 압박하면서 우방국들로 하여금 자구책을 찾아 나서도록 만들었다.


더욱 특이한 것은 미국이 더 이상 세계적인 추세를 선도하는 국가가 아니라는 점이다. 세계가 교역과 협력 증대를 찾고 있는 데 반해 미국은 보호주의와 민족주의를 향해 뒷걸음질 치고 있다. 수십 년 동안 세계 질서는 미국이라는 토대 위에 구축됐다. 무역은 미국이 설계한 제도를 통해 움직였고 안보는 미국의 보장에 의존했으며 위기는 좋든 싫든 워싱턴에 의해 관리됐다. 이 같은 토대는 여전히 존재한다. 그러나 세계는 더 이상 그 위에 질서를 세우려 하지 않는다. 이제는 미국이라는 토대 위가 아니라 그 주변에서 새로운 세계 질서를 만들어 가고 있다.

여론독자부 opinion2@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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