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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읽기]농식품부 농촌여성정책과 승격에 부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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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읽기]농식품부 농촌여성정책과 승격에 부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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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타계한 여성 농촌사회학자인 김주숙 교수가 1980년에 쓴 ‘농촌여성문제 소고’에서 “아주머니 생각에 여자들이 농사일을 하는 양이 전에 비하여 많아졌습니까?” 물었다. 이에 58.6%의 여성농민들이 일이 훨씬 많아졌다고 답했다. 소득을 벌충하려 일을 더 많이 해도 가정과 마을일의 부담이 줄지 않아 여성농민의 삶은 더욱 고단해졌다는 것이다.

43년이 지나 2023년 농림축산식품부가 작성한 ‘여성농업인 실태조사’ 결론도 다르지 않다. 여성농민은 농작업의 50% 이상을 담당하고 있고, 가장 큰 어려움으로 ‘농사일에 체력 부족’(36.4%), ‘가사와 농사일 병행 어려움’(32.2%), ‘농기계 사용 어려움’(12.1%) 등 노동 부담 문제를 꼽았다. 43년 전에 새댁 소리를 들었을 여성농민은 이제 초고령 농민이 되어 육체적 고통은 깊어졌건만 도농 간 소득격차는 당시보다 더 벌어졌다. 농업 기술도 1980년과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발전했지만 수확 작업과 잡초 관리, 수확 후 관리, 파종과 아주심기 등 사람 손을 타야 하는 노동집약적 작업이 여성농민들의 주요 업무인 것은 예나 지금이나 같다.

반면 자신의 이름으로 등록된 농지도 없고, 어떤 작물을 심어 수익을 올려야 할지 결정하는 농업경영 참여 비율은 39.6%에 그친다. 농업 노동의 절반을 떠맡고 가족과 마을을 살피는 돌봄을 전적으로 책임져도 여전히 지위는 낮은 여성농민의 현실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여기에 1980년에 질문도 하지 않았던 기후위기 문제까지 덮쳐 농촌 여성의 삶을 옥죄고 있다. 여성농민의 문제는 도농 간 차별, 농촌 내 성차별, 빈곤 문제까지 뒤엉켜 있어 세밀한 연구와 대책이 있어야 한다는 요구가 많았고 그 첫걸음으로 정부에 여성농민 업무 전담조직을 설치하라 오래도록 외쳐왔다.

첫 성과는 1998년 김대중 정부 당시 농림부에 여성정책담당관실 신설이다. 2004년 노무현 정부 때 여성정책과로 개편되었으나 이명박 정부가 폐지해버렸다. 거저 얻어낸 것도 아니고 여성농민들의 투쟁으로 이룬 성과건만 정권의 비위에 맞지 않았던 탓이다. 그러다 문재인 정부에서 여성농민 업무를 전담할 ‘농촌여성정책팀’이 생겼다. 다만 한시 조직이어서 정권 성향에 따라 언제든 없애버릴 임시정류장 같았다. 결정적 실책은 정책을 전달하고 현장에서 돌아가게끔 해야 하는 광역 및 기초 지자체의 의지를 북돋지 않아 지역 기반이 취약했다는 것이다. 급기야 윤석열 정부 들어서 농촌여성정책팀 인력을 줄이고 농촌 성평등 문제를 다루는 ‘양성평등계’마저 없애 유명무실하게 만들었다. 무지렁이로 여겼던 여성농민들이 민주주의와 평등한 세상을 이룩하겠다며 목소리를 높여서였을까. 내란 세력은 권력을 잡은 시기 내내 성평등의 가치를 사회 곳곳에서 치워버리는 일에 골몰했다.

다행히 지난 연말 농식품부 내 농촌여성정책팀이 ‘농촌여성정책과’로 승격돼 전담인력도 7명으로 늘고 양성평등계도 일단 복원됐다. 당시 기획재정부가 인력을 늘리는 일에 난색을 보였다는 후문이지만 남태령 투쟁에 힘입어 탄생한 이재명 정부가 시대적 요구를 외면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농어촌 지자체에 농촌여성 정책 전담부서 설치가 여전히 확실치 않고 과거 정부처럼 서류만 내려보낼까 걱정이다. 자체 역량이 달리는 지역을 다그치기도 하고 돕기도 하면서 정말 잘해보자는 결의가 지금으로선 높아 보이지 않는다. 돈과 시간을 들여 좋은 정책을 짜내도 지역으로 스며들도록 길을 닦지 않는다면 결국 캐비닛 서류로나 남을 뿐이다. 영농을 지속할 의지가 있는 여성농민들을 지원하고 평등한 농촌에서 건강을 지키며 농사지을 수 있도록 정책과 꼼꼼한 실무가 맞물리도록 하는 것, 이것이 국민 먹거리 보장의 첫걸음이다. 나라의 밥줄 절반을 책임지고 있는 여성농민의 일은 밥 먹고 사는 모든 이의 일이다.

정은정 농촌사회학 연구자

정은정 농촌사회학 연구자

정은정 농촌사회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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