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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 데이트가 삐걱거리는 다섯 가지 순간 [김설화의 미술관 가는 길을 찾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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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 데이트가 삐걱거리는 다섯 가지 순간 [김설화의 미술관 가는 길을 찾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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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설화 큐레이터]
김설화 ‘갤러리 EOS’ 선임 큐레이터는 감각을 지식보다, 질문을 정답보다 더 중요하게 여긴다. ER 이코노믹리뷰 연재 칼럼 ‘미술관 가는 길을 찾다’는 그가 현장에서 매일 마주하는 경험을 바탕으로, 관람객이 미술관을 더 쉽게 찾는 길을 안내하는 실용 가이드다. 미술 작품 앞에서 멈춰 선 순간부터 시작되는 감상법을 제시한다.

김설화 ‘갤러리 EOS’ 선임 큐레이터는 감각을 지식보다, 질문을 정답보다 더 중요하게 여긴다. ER 이코노믹리뷰 연재 칼럼 ‘미술관 가는 길을 찾다’는 그가 현장에서 매일 마주하는 경험을 바탕으로, 관람객이 미술관을 더 쉽게 찾는 길을 안내하는 실용 가이드다. 미술 작품 앞에서 멈춰 선 순간부터 시작되는 감상법을 제시한다.


미술관은 데이트의 정석처럼 여겨지곤 합니다. 차분하고 정돈된 공기, 굳이 많은 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어색하지 않을 것 같은 안도감. 그래서인지 미술관에 가는 길에는 으레 낭만적인 상상이 따라붙습니다.

그런데 막상 전시장 안으로 들어서면 분위기가 조금 달라집니다. 입장할 때만 해도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들어오던 연인이, 관람을 마칠 즈음에는 말수가 줄고 묘한 어색함이 감돌기도 합니다. 분명 로맨틱할 줄 알았던 미술관 데이트인데, 왜 이렇게 엇박자가 나는 걸까요?

1. 발걸음의 속도가 어긋날 때

가장 먼저 부딪히는 건 '속도'입니다. 한 사람은 작품 하나하나를 오래 들여다보고 싶어 하고, 다른 한 사람은 쓱 훑어보는 몇 초면 충분합니다. 평소엔 잘 몰랐던 이 속도 차이가 미술관에 오면 유난히 도드라집니다.

앞서 걷다가 멈춰 서서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되고, 뒤에 남은 사람은 그 시선을 의식해 괜히 마음이 급해집니다. 아무런 말이 없어도 이미 리듬은 엇갈려 있습니다.

미술관은 이렇게 서로의 속도를 숨길 수 없는 곳입니다. 물론 옳고 그름의 문제는 아닙니다. 그저 두 사람의 호흡이 조금 달랐을 뿐이죠.


2. 취향을 대하는 태도를 확인할 때

미술관은 서로의 취향이 얼마나 다른지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공간입니다. 나는 캔버스의 색감에 압도되어 발을 떼지 못하는데, 옆 사람은 "난 도통 모르겠다"라며 무심하게 지나쳐 버리기도 합니다.

취향 차이가 갈등을 만드는 건 아닙니다. 문제는 그 다름을 대하는 태도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대상을 상대가 존중해 주는지, 아니면 이해할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가볍게 치부하는지는 은연중에 전해집니다. 작품을 보러 갔다가, 의도치 않게 서로의 배려와 거리감을 확인하게 되는 순간이 미술관에서 종종 찾아옵니다.

3. 말하고 싶은 사람과 침묵하고 싶은 사람

감상 방식의 차이도 묘한 엇박자를 만듭니다. 작품을 보자마자 감상을 나누고 싶은 마음이 있는가 하면, 방해 없이 조용히 몰입하고 싶은 순간도 있기 마련입니다.


설명이 이어질수록 듣는 쪽은 조금씩 지치고, 침묵이 길어질수록 말하고 싶은 쪽은 벽을 보는 듯한 답답함을 느낍니다. 같은 공간에 나란히 서 있지만, 서로 다른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 순간입니다.

4. 눈으로 담느냐, 렌즈로 담느냐

요즘 데이트에서 '사진'은 빠지기 어려운 요소입니다. 전시를 멋진 인증샷으로 남겨야 관람이 완성된다고 느끼는가 하면, 렌즈 없이 눈으로만 온전히 담고 싶어 하는 경우도 있죠.

작품 앞에 서자마자 휴대폰부터 꺼내는 모습에 몰입이 깨지기도 하고, 반대로 예쁜 배경을 두고도 사진 한 장 안 찍어주는 무심함에 서운함이 쌓이기도 합니다. 같은 추억을 만들러 왔지만, 기억하고 싶은 방식은 전혀 달랐던 거죠.

5. '전시'가 목적일 때와 '데이트'가 목적일 때

근본적인 이유는 입장하기 전부터 서로 품었던 기대가 다르다는 점입니다.

전시 관람이 주된 목적이라면 미술관은 작품과 만나는 몰입의 공간이 됩니다. 하지만 그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게 우선이라면 나란히 걷기 좋은 배경이 되어주죠.

시선이 향하는 대상이 다르니, 머무는 시간과 걷는 속도 역시 자연스럽게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미술관 데이트가 필요한 이유

미술관 데이트가 자주 어긋나는 이유는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분명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피해야 할 공간이 되는 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어색함 덕분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드러나기도 하니까요.

미술관에서는 평소 잘 보이지 않던 모습들이 자연스럽게 드러납니다. 얼마나 빨리 걷고 싶은지, 어떤 작품 앞에서 발이 멈추는지, 말을 많이 하고 싶은 날인지 조용히 있고 싶은 날인지. 중요한 건 이 차이를 억지로 없애려는 게 아니라, 서로 다른 리듬을 어떻게 맞춰갈지 천천히 알아가는 일입니다.

먼저 보고 싶어 하면 잠시 기다려 주고, 한 작품 앞에 오래 서 있고 싶어 하면 그 시간을 기꺼이 내어주는 것. 말하고 싶을 때는 들어주고, 침묵이 필요할 때는 그냥 곁에 있어 주는 것. 미술관에서는 이런 작은 배려들이 자연스럽게 오가게 됩니다.

전시를 함께 본다는 것은 같은 그림을 봤다는 뜻만이 아닙니다. 그날 각자 무엇을 오래 바라봤고 무엇을 스쳐 지나갔는지, 그 차이를 함께 기억하게 된다는 뜻이기도 하니까요.

그러니 다음번 미술관 문을 열기 전, 이렇게 물어보세요.

"오늘 너는 어떻게 보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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