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보상법…보상금 받으면 국가 상대 소송 불가
2021년 헌재 일부 조항 위헌 결정…유족, 국가 상대 소송
1·2심 판단 엇갈렸지만 대법, 유족 손 들어주며 파기환송
2021년 헌재 일부 조항 위헌 결정…유족, 국가 상대 소송
1·2심 판단 엇갈렸지만 대법, 유족 손 들어주며 파기환송
서울 서초구 대법원의 모습. 임세준 기자 |
[헤럴드경제=안세연 기자] 5·18민주화운동 유족들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22일 유족의 손을 들어줬다. 소송을 늦게 제기해 손해배상을 청구할 권리가 사라졌는지 여부가 쟁점이 된 이 사건에서 대법원은 국가의 책임을 지적하며 유족 측 주장을 받아들였다.
국가는 관련 법에 따라 1990년대 보상금을 지급한 때를 기준으로 위자료 청구권 시효가 지났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2021년 해당 법률의 조항 가운데 ‘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해 입은 피해’ 중 정신적 손해에 대한 국가배상청구권 행사까지 금지하는 것이 헌법에 위반된다고 본 헌법재판소 결정 시점을 기준으로 봐야 한다고 이날 밝혔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노태악 대법관)는 이날 오후 5·18민주화운동 유족 33명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 이같이 판시했다. 대법원은 유족 측 패소로 판결한 원심(2심)을 깨고, 사건을 광주고법에 돌려보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사회적으로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사건이나 판례를 변경할 필요가 있을 때 대법관들 모두가 참여해 선고한다. 조희대 대법원장이 재판장을 맡고, 법원행정처장을 제외한 대법관들이 심리에 참여한다.
이번 사건은 1990년대 제정된 보상법에 따라 5·18 사건 유족이 보상금을 받으면 더 이상 국가에 책임을 묻지 않기로 본다는 규정에서 비롯됐다. 보상금을 받은 유족은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낼 수 없다고 여겼다.
그런데 2021년 헌법재판소의 결정으로 사정이 달라졌다. 당시 헌재는 해당 규정을 근거로 정신적 피해에 대한 국가배상청구까지 막는 것은 위헌이라고 판단했다. 이후 유족 측은 “그동안 법 때문에 소송을 낼 수 없었다”며 국가를 상대로 위자료를 청구했다. 국가는 “이미 소멸시효가 지났다”며 반박했다.
1·2심의 판단은 엇갈렸다. 1심은 유족의 손을 들어줬다. 1심 재판부는 “위로금은 사회보장적 성격의 금원일 뿐 위자료와 구분된다”며 “정신적 손해에 대한 배상이 이뤄졌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반면 2심에선 유족이 패소했다. 2심 재판부는 “3년의 단기소멸시효는 늦어도 보상금 지급결정을 받은 날부터 진행된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며 “위자료 채권은 이미 시효로 소멸했다“고 판단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유족 측 승소 취지로 결론 내렸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시간이 오래 지났더라도 소멸시효는 피해자가 실제로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고 객관적·합리적으로 기대할 수 있었을 때부터 진행된다고 밝혔다. 이 사건의 경우 과거사 사건이라는 특수성과 당시 상황 등을 고려할 때 유족이 소송 가능성을 기대하기 어려웠다고 봤다.
대법원은 “국가배상제도의 목적과 과거사 사건의 특수성, 피해자 보호의 필요성을 아울러 고려한다면 보상금 등 지급결정일에 자기 고유의 위자료 청구권을 행사할 것을 객관적, 합리적으로 기대할 수 있었다고 평가할 수는 없다”며 “보상금 지급결정일을 소멸시효 기산점으로 삼을 수 없다”고 판시했다.
이어 “관련자의 가족이 권리행사를 하지 못한 상황은 국가가 뒤늦게 보상 관련 법령을 제정·집행하는 과정에서 보상의 대상과 범위를 협소하게 규정하고 보상 절차를 신속히 마무리하려고 하면서 초래한 측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한편 오경미 대법관은 “국가인 피고가 소멸시효 항변을 하는 것은 신의성실의 원칙에 반하는 권리남용으로 허용될 수 없다“는 별개의견을 냈다.
반면 노태악 대법관은 반대의견을 냈다. 노 대법관은 “관련자의 가족은 보상금 수령 여부나 화해간주조항과 관계없이 독자적으로 고유의 위자료 청구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며 “다수의견은 법적 안정성을 해칠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과거사 피해자에 대한 구제는 사법적 판단보다는 입법을 통해 이뤄져야 한다”고 밝혔다.
이날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산재사고와 관련한 공단의 보험금 반환(구상권)에 관한 판례도 뒤집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근로복지공단이 지게차 운전기사와 지게차 임대인을 상대로 “산재보험금을 물어내라”며 낸 구상금 청구 소송에서 공단 측 패소로 확정 판결(파기자판)했다.
이 사건은 한 건설공사장에서 지게차 운전기사가 철근을 옮기다 사고를 내 협력업체 근로자를 다치게 한 것에서 비롯됐다. 공단은 피해자에게 산재보험금을 지급한 뒤 지게차 운전기사와 임대인을 상대로 소송을 냈다. 산재보험법상 ‘제3자’의 행위로 발생한 산업재해에 대해선 공단이 구상권을 청구할 수 있다. 앞서 1·2심은 지게차 기사와 소유자가 하도급 업체 소속 근로자가 아니므로 제3자라고 판단했다. 공단의 손을 들어줬다.
대법원의 판단은 달랐다. 대법원은 지게차 운전기사와 임대인은 제3자가 아니라며 공단 측 패소로 판결을 뒤집었다.
대법원은 ‘제3자’의 판단 기준에 대해 고용관계·보험료 부담 여부가 아니라 ‘현장에서 공동의 위험을 공유했는지’로 재정립했다. 같은 현장에서 위험을 공유했다면 외부인이 아니라 ‘내부자’라는 취지에서다.
대법원은 “가해자가 재해 근로자의 사업주와 고용계약을 체결한 근로자가 아닐 때도 사업주의 지휘명령 아래 업무를 수행하며 재해가 발생했다면 사업장 내 위험을 공유했다고 볼 수 있다”며 “해당 작업은 사업주가 행한 사업에 편입돼 그 일부를 이루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