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일보]
[충청논단] 최기영 시인
수만 해리를 느리게 헤엄쳐 찾아온 거북이는 난감하다. 말과 망아지가 지치면 은빛 모래를 온몸에 휘감고 여유를 부리던 명사십리는 사라져 버리고 없다. 바다는 여전히 출렁이고 있지만 천년을 시작할 아이를 잉태할 모래 한 줌 남아 있지 않다. 시멘트 방파제는 몸 하나 기댈 틈 없이 가파르게 서서 파도를 막고, 그 너머로는 오색 불빛만 현란하다. 거북이는 잠시 그 불빛을 바라보다가, 다시 해변을 찾아 느린 걸음으로 뒷걸음질을 친다.
수만 해리를 느리게 헤엄쳐 찾아온 거북이는 난감하다. 말과 망아지가 지치면 은빛 모래를 온몸에 휘감고 여유를 부리던 명사십리는 사라져 버리고 없다. 바다는 여전히 출렁이고 있지만 천년을 시작할 아이를 잉태할 모래 한 줌 남아 있지 않다. 시멘트 방파제는 몸 하나 기댈 틈 없이 가파르게 서서 파도를 막고, 그 너머로는 오색 불빛만 현란하다. 거북이는 잠시 그 불빛을 바라보다가, 다시 해변을 찾아 느린 걸음으로 뒷걸음질을 친다.
우리는 이런 풍경 앞에서도 태연하게 새해 인사를 건넨다. 붉은 말의 해라며 모두가 적토마가 되어 앞으로 달려가자고 말한다. 전진은 미덕이 되고, 속도는 희망이란 또 다른 이름이 되었다. 그러나 말들이 앞을 향해 달려가는 동안 무엇이 남아 있는지를 묻는 이는 없다. 달릴 들판은 사라지고, 말굽이 디딜 흙 대신 보도블록이 깔린 세상에서 질주는 과연 축복일까.
말이 달리는 이유는 낭만적이지 않다. 기쁨에 겨워 뛸 때도 있지만 대부분은 자유를 온몸으로 만끽하고 싶을 때 질주하거나 자연을 음미하다 공포를 느꼈을 때다. 갈기를 날리며 달리는 말을 보고 미지를 향한 도전이라 해석하지만, 그것은 지렁이 한 마리도 해치지 못하는 겁쟁이가 먹이사슬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이다.
인간은 오래전부터 말의 본능을 교묘히 이용해 왔다. 굶어 죽지 않을 만큼의 먹이를 주는 대신 마구간에 가두고, 사람의 더딘 걸음을 대신해 먼 길을 달리게 했다. 우리가 '마력'이라 부르는 것은 인간의 탐욕이 붙인 이름이다. 말 안장에 올라 채찍질하며 초고속으로 뛰자고 재촉했다. 그리고 잉여물을 가졌다. 이는 경제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산을 허물고 갯벌을 메운 우리네 방식과 다르지 않다. 효율은 늘었지만 머물 자리는 줄었고, 편리함은 늘었지만 되돌아갈 길은 끊겼다.
천 리를 날아온 제비는 초가집 처마 대신 콘크리트 틈새에 둥지를 틀고, 적토마는 깨진 말굽으로 도심을 달린다. 이것은 우화가 아니라 기록이다. 우리가 선택해 온 삶의 방식이 남긴 풍경이다.
사실 어린 말은 뛰지 않는다. 달리는 것조차 가르쳐야 한다. 말의 본성은 질주가 아니라 보행이다. 천천히 걸으며 풍광을 살피고 자연과 호흡하는 존재다. 이제 우리는 말에게 앞으로 걷는 법을 가르쳐 왔듯이 말과 함께 우리 스스로 뒤로 걷는 법을 배워야 할 때다. 뒤로 걷는다는 것은 패배가 아니라 돌아봄이다. 속도를 낮추고, 놓친 것을 확인하며, 잘못 놓은 발걸음을 고쳐 딛는 일이다.
뒤로 걷는다는 것은 지나온 길을 돌아봄이다. 속도를 잠시 낮추고, 그동안 지나쳐 온 길을 조심스레 고쳐 딛는 일이다. 그렇게 한 걸음 물러설 때 보이는 풍경들이 보인다. 거북이가 다시 돌아올 수 있는 모래, 제비가 안심하고 깃들 처마, 말굽이 다치지 않고 걸을 수 있는 땅. 어쩌면 그런 세상은 더 빨리 달려서가 아니라, 잠시 멈추고 방향을 살필 때 가까워지는 것이다. 이번 설날에는 더 멀리 빨리 가자는 말(語)보다 말(馬)처럼 자연을 음미하며 여유를 회복할 줄 아는 존재가 되자는 인사를 나눌 수 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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