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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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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빵’

서울맑음 / -3.9 °
[한겨레] ‘숨’ Jaye 지영 윤

Life.05 Thirst. Mixed Media on Paper & Digital Composite, 54×77㎝

Life.05 Thirst. Mixed Media on Paper & Digital Composite, 54×77㎝


좁은 골목길, 차창 밖 그의 걸음이 느릿하다. 뒷모습이라 얼굴을 볼 수는 없지만 어느 날은 도란도란 담소하는 이인삼각, 어떤 날은 보행기에 기댄 삐그덕 덜그럭 걸음인가 하면, 보기보다 가벼운지 꾸역꾸역 잘도 끄는 한 짐 가득 리어카다. 그 뒤를 내 차가 느릿느릿 따라간다. 뒤따라가자니 마냥 답답하고, 비켜 지나가자니 그의 몸이든 마음이든, 행여라도 상하게 할까 조심스럽다.

이렇듯 골목이면 어김없이 나오는 나의 ‘기어가듯’ 운전법을 못마땅해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지만, 언젠가 미국 샌프란시스코 골목에서도 비둘기떼에게 제발 좀 비켜달라고 뒤차가 보는 앞에서 ‘훠이훠이’ 춤췄던 나 아닌가. 사정이 이러하니 웬만하면 차를 안 가지고 다니는데, 불가피하게 ‘뚜벅이’를 못하는 날이면 ‘빵’을 먹곤 한다. 나 혼자만의 개그로, ‘오늘의 빵’이다.

어쩔 수 없어 마지못해 운전대를 잡고 나면, 자꾸 ‘운전’ 시스템이야말로 세계 불가사의 감인 것만 같다. 엄청난 물리력을 가진 자동차를, 무수히 많고 다양한 심성, 운동능력, 감정의 진폭을 지닌 우리가, 교육을 받고 시험을 통과했으므로 약속에 따라 한결같이 움직일 거라는 어마어마한 전제하에 운영하는 시스템…. 거기에 젤리처럼 연약한 보행자까지 섞인다! 그런 면에서 운전면허는 내가 사회로부터 받은 가장 큰 신뢰가 아닌가 한다. 나의 태평한 골목 운전법에는 이토록 어엿한 이유가 있는데, 어김없이 들려오는 뒤차의 ‘빵, 빵’이라니. 저 보행자와 나를 알지도 못하면서 우리를 어찌 믿고 이 좁은 길을 빨리 가라고 채근하는 건지, 야속하기만 하다.

숨통이 트인다. 동작대교를 타기 위해 일사불란하게 이동하는 차들의 군무 속으로 합류한다. 쌩쌩 달리며 왼쪽 깜빡이를 켠다. 들어가겠다고 내가 선언했다. 몸을 앞으로 쭉 빼서 옆 차선에 차가 없는지 본다. “제대로 배웠네!” 대체로 비어 있는 내 옆자리에서 한두 번쯤 받았던 감탄이 귓가를 맴돈다. 이걸 안 해서 미국 운전면허 딸 때 시험장을 나가지도 못하고 떨어졌거든, 속마음이 대꾸한다. “앞의 차에 바짝 붙어야지, 거봐, 또 차가 끼어들잖아.” 이번엔 들었던 잔소리가 마음의 소리가 되어 떠오른다. 앞차와 차 세 대의 거리를 두라고 배웠건만, 그래, 로마에선 로마법을 따르라고 했지. 여긴 로마, 로마…. 서로의 무한 신뢰가 오가는 현장에서 내 머릿속, 맘속은 어찌나 바쁜지 모르겠는데, 옆 차를 모는 이의 ‘길 위의 인격’마저 만난다. 옆자리가 비어서 다행이다. 닿지도 않을 지청구를 했거든. 흥!

상황은 종료되고 맑은 음악에 다시 순해진 마음이 말을 건다. 상쾌하지만은 않지? 문득, 몸에 좋지 않은 걸 알면서 혀끝에서, 목구멍에서 당긴다고 내가 쉽게 몸에 들이는 것들에 생각이 미친다. 그런 걸 몸에 들이듯 마음에도 들이는 건 아닌지….

재작년 인도네시아에서 온 친구는 을지로 좁은 골목으로 밀고 들어오는 차를 보곤 자기 사는 곳에 비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라며 여유롭게 웃었다. 그 모습을 보니, 내가 다니면서 너무 쉽게 날을 세우는 건 아닌가 싶었다. 그 기억에 문득 내가 무심코 뱉는 일상 속 혼잣말도 몸에 쌓이는 건 아닐까, 생각이 스쳤다. ‘내가 먹는 게 곧 나’(You are what you eat)라는 말처럼, 내가 삼킨 조급함과 아무리 혼자 있었다지만 뱉은 말들이 곧 나인 것도 맞지 않겠는가 말이다.


운전한 지 이십 년이 넘는데 왜 아직도 셔틀버스처럼 다니는 몇 군데만 차를 가지고 다니느냐고 주변 사람들이 궁금해한다. 어린 장금이가 ‘홍시에서 홍시 맛이 나기에 홍시 맛이 난다’ 하였듯이, ‘길에서 길이 안 보이기에 길을 모르겠다’는 건데, 이 마음을 누구든 좀 이해해주면 얼마나 좋아….

글·그림 Jaye 지영 윤(‘나의 별로 가는 길’ 작가·화가)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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