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가가 오르자 소비심리가 얼어붙는다. 수요가 쪼그라들자 시장엔 냉랭한 바람만 분다. 경기침체의 전형적 경로다. 하지만 이런 경로를 이탈한 마켓도 있다. '작은 사치'의 상징으로 불리던 립스틱처럼 이젠 향수가 불티나게 팔린다. 왜일까.
향수 시장이 경기 침체 국면에서도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다.[사진|뉴시스] |
물가가 펄펄 끓는다. 국가데이터처(옛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8월 1.7%(이하 전년 동월 대비 기준)까지 하락했던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9월 2.1%, 10월 2.4%, 11월 2.4%, 12월 2.3%로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여기에 1400원대 고환율은 변수가 아닌 상수가 돼서 물가를 압박하고 있다.
이렇게 커진 '고물가 부담'은 일상을 강하게 압박하고 있다. 한 통신사가 여론조사 전문기관 에이스리서치에 의뢰해 지난해 말 전국 만 18세 성인남녀 1002명에게 '현재 물가 수준이 가계에 미치는 영향'을 물어본 결과, 90.1%가 "부담된다"고 답했다(매우 큰 부담이 된다 54.8%ㆍ어느 정도 부담이 된다 35.3%).
물가가 높으니 소비 심리도 얼어붙었다. 한국은행이 발표한 '소비자동향조사' 결과를 보면, 지난해 12월 소비자심리지수(CCSI)는 109.9로 11월(112.4)보다 2.5포인트 떨어졌다. 소비자심리지수는 100보다 높으면 낙관적, 낮으면 비관적이란 뜻이다.
그런데 이런 흐름을 보란 듯이 거스르는 시장이 있다. '향수'다. 지난해 국내 주요 백화점 3사의 향수 매출은 모두 두자릿수 증가율을 기록했다. 신세계백화점은 전년 대비 15.7%, 현대백화점은 15.2% 늘었다.
롯데백화점의 향수는 매출 증가율이 20.0%를 찍을 정도로 가파르게 성장했다. 글로벌 시장조사업체 유로모니터가 분석한 국내 향수 시장의 성장세도 비슷하다. "…국내 향수 시장은 2020년 5935억원에서 지난해 1조원 수준으로 커졌다…."
이중 니치 향수(niche perfumeㆍ특정 취향과 정체성을 겨냥해 소량 제작하는 고급 향수)의 인기가 두드러진다. 니치 향수를 중심으로 한 프리미엄 향수 시장의 연평균 성장률(2020~2025년)은 12.6%에 달했다(유로모니터).
국내에서 가장 많은 글로벌 니치 향수 판권을 보유한 신세계인터내셔날이 수입ㆍ판매 중인 니치 향수 브랜드 매출은 같은 기간 17.0% 증가했다. '딥티크' '산타마리아노벨라' '엑스니힐로' 등 15개 브랜드가 고르게 성장했다. SNS에서 '뉴요커의 향'으로 화제를 모은 엑스니힐로의 경우 지난해 매출이 120.0% 급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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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향수 역설적 성장의 비결 = 그렇다면 경기 침체를 뚫고 향수 시장이 성장한 배경은 무엇일까. 가장 큰 요인으로는 소비 트렌드의 변화가 꼽힌다. 개인의 취향과 정체성이 세분화하면서 이를 직접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수단으로 향수가 부상했다는 거다. 업계 관계자는 "향은 옷이나 메이크업보다 취향 차이가 분명하게 드러난다"며 "원료, 조향 스토리, 제작 방식 등 향수의 세부 요소가 구매를 자극하는 요인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소비 방식이 달라진 측면도 있다. 특정 향수를 오래 사용하는 대신, 계절ㆍ기분ㆍ장소에 따라 향수를 바꾸거나 여러 향을 섞는 '레이어링(layering)' 소비가 늘면서 향수 시장이 자연스럽게 커졌다. 뷰티업계 관계자는 "젊은 소비자 사이에서 향수를 통해 정체성을 표현하는 문화가 자리 잡았다"며 "특히 여러 향수를 혼합해 '나만의 향'을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각광받고 있다"고 말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연예인 등 인플루언서의 SNS도 향수 시장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 럭셔리 니치 향수 브랜드 '크리드'는 걸그룹 에스파의 멤버 닝닝이 유튜브에서 애용한다고 언급한 후 국내 인지도가 급격히 높아졌다. '킬리안'은 배우 차주영이 사용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수요가 빠르게 늘었다.
신세계인터내셔날 관계자는 "미디어나 SNS를 통해 유명 연예인과 셀럽들이 사용하는 향수가 자연스럽게 노출되면서 실제 구매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며 "특히 영향력 있는 인플루언서의 SNS에 게시물이 올라가면 바로 다음날부터 매출이 증가하는 흐름이 관찰되기도 한다"고 말했다.
다만, 이런 요인만으로 향수 시장이 성장했다고 보긴 어렵다. 침체 국면에서 향수 소비가 늘었다는 건 '트렌드 변화' 이상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립스틱 효과'처럼 말이다. 립스틱 효과란 경기침체기 소비 심리가 위축될 때 립스틱과 같은 저렴한 사치재 판매가 늘어나는 현상을 일컫는다.
실제로 9ㆍ11 테러를 겪은 2001년 가을 미국의 립스틱 판매는 전년 대비 11%가량 증가했다. 이보다 앞선 1929년 대공황 때는 화장품 전체 판매가 전년 대비 25% 늘어났다. 이같은 통계를 근거로 몇몇 전문가는 침체기 속 향수 시장의 역설적 성장을 '립스틱 효과'의 단면으로 해석한다. '작은 사치'를 상징하던 립스틱의 한 자리를 향수가 대체했다는 거다.
유로모니터 관계자의 말을 들어보자. "향수가 립스틱 효과의 새로운 표현으로 부상하고 있다. 향수는 명품 가방이나 의류에 비해 가격 부담이 낮지만, 브랜드 경험과 상징성은 유지할 수 있다. 한 병만으로도 취향과 정체성을 드러낼 수 있고, 비교적 낮은 비용으로 명품 브랜드를 경험할 수 있다."
이홍주 숙명여대(소비자경제학) 교수 역시 "최근 향수가 '작은 사치'의 대표 수단으로 떠오르면서 립스틱 효과가 향수로 확장하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며 "소비자들은 경기침체와 고물가 속에서 비교적 부담이 적은 향수를 통해 자신만의 취향을 표현하며 만족을 채우고 있다"고 말했다.
지갑은 닫히는데 향수는 열리는 역설적 현상, 그 밑단에 깔린 작은 사치란 욕구…. 경기 침체의 웃픈 단면이다.
김하나 더스쿠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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