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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영화 한장면처럼···"김원봉 빨간 태극, 자신의 파란 태극 문양 반지 맞춰본 후 거액의 독립자금 지원"[생사고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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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영화 한장면처럼···"김원봉 빨간 태극, 자신의 파란 태극 문양 반지 맞춰본 후 거액의 독립자금 지원"[생사고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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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고성 만세운동 이끈 로정 배만두 선생

배만두가 1973년 삼일절 경남 고성 대성초등학교에서  기념 축사를 하고 있다. 후손 배원열 제공

배만두가 1973년 삼일절 경남 고성 대성초등학교에서 기념 축사를 하고 있다. 후손 배원열 제공


“고성의 만세운동은 처음 이주현·박진택·배만두·이상은·김상옥에 의해 (1919년) 3월17일 단행하기로 계획되었다. 비밀이 누설되고 배만두(사진)가 붙잡히면서 운동은 실행에 옮겨지지 못하였다.” 독립기념관 한국사연구소나 국가보훈처의 공식 기록에서 배만두는 ‘열거 인물 중 한 명’일 뿐이다.

경남 고성 이외 지역에선 무명에 가까운 이 독립운동가의 생애는 파란만장하다. 10대 초반 고성교회(1908년 설립)를 다녔고, 10대 중반 왕들을 경호했고, 10대 후반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생애엔 신흥무관학교, 건국준비위원회 같은 단체가 나온다. 자유시 참변, 제헌국회 선거 같은 근현대사의 굵직한 사건에도 관련됐다. 순종, 김구, 김원봉, 이범석, 지청천(이청천)도 배만두 삶에 등장하는 인물들이다.

‘로정 배만두 선생과 항일 독립운동’(하기호, 경남향토사총서 제20집, 2010) 등을 참고했다. 큰손자인 배원열을 인터뷰해 보완했다.

1896년 고성 하이면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 한학을 배웠다. 1908년 설립된 고성교회에도 다녔다. “큰 세상을 보러 가겠다”며 1914년쯤 서울로 가 YMCA에서 공부했다. 학업을 마친 후 들어간 곳이 조선보병대(창덕궁수비대)다. 고종과 순종 경호 업무를 3년간 맡았다. 배원열은 “(축소, 해산 과정에서 대원들이) 일제 헌병대나 경찰, 교도관 등으로 재취업했다. 출세하고 싶은 사람은 헌병대로 갔다. 할아버지는 ‘나는 안 하련다’ 하고 고향으로 내려오셨다”고 말했다.

배만두가 조선보병대(창덕궁수비대) 시절 촬영한 사진. 후손 배원열 제공

배만두가 조선보병대(창덕궁수비대) 시절 촬영한 사진. 후손 배원열 제공


1919년 배만두는 2·8 독립선언과 3·1 만세운동 소식을 듣게 된다. 3월15일 철성의숙 교장 박진완 집에서 여러 사람과 독립만세 의거를 계획한다. 3월17일 제1차 거사일 새벽에 일본 헌병이 배만두 집을 덮쳐 체포했다. 그는 고문을 받으면서도 제2차, 제3차 의거에 관해 말하지 않았다. 일본 헌병 도움으로 경찰서에서 탈출한다. 배원열은 “돈까지 쥐여준 사람이 박정희 정권 때 경제기획원 장관 등을 지낸 김학열의 부친이다. 할아버지와 조선보병대에 같이 들어갔다가 일본 헌병에 지원한 인물”이라고 했다.


이후 만주로 갔다. 이범석(1900~1972)이 조교로 있던 운남육군강무학교를 거쳐 신흥무관학교에 입교한다. 1921년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한 뒤 대한독립군 이청천 부대 대원으로 활동했다. 경상북도경찰부에서 작성한 <고등경찰요사>(1934) 등에 신흥무관학교 입교, 만주 독립운동, 군자금 모집 사실이 적혀 있다.

서울 올라가 10대 중후반 고종·순종 경호하다가 독립운동 시작
귀향 후 3·1운동 소식 듣고 거사 준비, 당일 새벽 일 헌병에 체포
탈출해 만주·서울·고성서 독립운동…“묵묵히 할 일 했다” 유언

배만두는 1921년 초 이범석이 이끈 합동민족군이 시베리아로 파견될 때 함께 갔다. 청산리 전투 이후 대토벌 작전을 벌이던 일본군과 전투도 치른다. 1921년 6월에는 자유시 참변에도 휘말린다. 배만두는 총격 와중 살아남아 만주로 되돌아갔다. 1930년 독립군 밀명을 받고 함경도 흥남으로 가서 목수와 노동자로 일하며 군자금 모집과 독립군 초모(招募) 공작 등 활동을 이어갔다.

1937년 중일전쟁이 터지고 서울로 들어간다. 고성군 출신의 독립운동가이자 사업가인 정세권이 경영하던 건양사에 입사했다. 소록도 한센병 병원 건축공사 현장 등지에서 파견근무를 했다. 의거 공소시효가 지난 1930년대 후반 고성으로 돌아가 ‘백일공무사(白日工務社)’라는 이름의 건설회사를 만든다. ‘백의민족이 일본을 지배한다’는 뜻으로 지은 것인데, 일본 당국은 그 속뜻을 몰랐다고 한다. 배원열은 “조선어학회 건물 등을 지어준 정세권 사장이 조선총독부에 찍힌 뒤 회사가 어려워지자 할아버지에게 재산 일부를 떼어주며 고성에 가서 건설회사를 하라고 했다고 한다”고 말했다. 배만두는 건설회사로 번 돈을 몰래 빼 독립군 자금으로 보냈다고 한다.


집안에는 ‘김 선생’에 관한 이야기가 내려온다. 김 선생은 1940년대 두 번 배만두 집을 찾았다. “어스름 불빛에 왔대요. 두 분이 소뿔로 만든 반지를 맞춰봤어요. 김 선생은 빨간 태극 문양, 할아버지는 파란 태극 문양이죠. 그분이 김원봉(1898~1958)입니다. 회사를 담보로 거액을 줬다고도 해요. 이 이야기는 2018년에야 아버지(배영)한테 들었어요.”

공소시효 소멸에도 요시찰 인물이었다. “일본 헌병들이 1년에 한두 차례 구둣발로 집에 들어와 장롱 등을 뒤집고 가는 일을 봤다”는 아버지 배영의 목격담을 전했다. 헌병들은 해방 뒤에도 집을 찾았다. 철수하는 일본인 안전을 요청하러 왔다. 배만두는 일본어가 서툴러 배영이 중간에서 통역했다. “태극기를 펴두고 할아버지와 헌병들이 술을 마셨다고 해요. 헌병들은 할아버지한테 ‘(감시, 사찰해) 미안하다’고 사과했어요. 할아버지는 ‘일본은 다른 나라 침략하지 말라’고 하셨고요.”

배영도 고초를 겪었다.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당시 명문인 진주공립농업학교로 가려 했다. 담임선생은 배만두가 불령선인(不逞鮮人)이라고 추천서를 써주지 않았다.


해방 뒤에는 여러 동지와 만난다. 고성을 찾은 김구, 이범석과 만난 기록이 남았다. 지청천으로부터 조선민족청년단 중앙훈련소에서 일을 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으나 사양했다. 고성에서 건국준비위원회 고성군부위원장, 한국독립당 고성군당위원장으로 일했다.

1948년 제헌의회 선거 때 출마 제안도 뿌리쳤다고 한다. 불출마는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며 선거 참여를 거부한 김구의 한국독립당 방침이었다. 50대로 본인이 나설 나이가 아니라고도 여긴 배만두는 후배 하나를 소개했는데, 그 후배가 납북된 뒤 북한 재북평화통일협의회 상무위원 등을 역임했다가 1958년 12월 숙청된 이구수(1913~1967)다.

배만두는 해방 뒤에도 독립운동을 구체적으로, 널리 알리지는 않은 듯하다. 이승만, 박정희 정권하에서 건준 활동, 김원봉과 이구수와의 관계 등을 밝히기 힘들었을 것이다.

1979년 3월1일 84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3·1운동 60주년 날이다. “묵묵히 나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는 내용의 유언을 남겼다.

장손인 배원열은 할아버지의 생애를 자랑스러워하면서도 무명 독립운동가들도 떠올렸다. “할아버지는 행장 일부라도 남았는데, 남모르게 다른 곳에서 목숨 걸고 활동하며 죽어간 많은 운동가는 이름도 남지 않았다. 그분들 희생이 전해지지 않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배만두

배만두

김종목 기자 jo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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