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로 건너뛰기
검색
세계일보 언론사 이미지

“왜 이렇게 사람 만나기 힘들까”…우울할 때 관계 끊기는 ‘진짜’ 이유

세계일보
원문보기

“왜 이렇게 사람 만나기 힘들까”…우울할 때 관계 끊기는 ‘진짜’ 이유

속보
U-23 아시안컵 4강전 한국 0-1 일본(전반 36분 고이즈미 카이토)
“의지 부족 탓 아니었다”…우울하면 사회적 회피 커지는 뇌의 반응
“친구를 만나는 것조차 숙제처럼 느껴져요. 그냥 방에 혼자 있고 싶습니다.”

지난 19일 서울의 한 대학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진료실. 30대 직장인 A씨는 의자에 등을 깊숙이 기대며 이렇게 말했다. 특별히 싸운 사람도 없고, 관계가 틀어진 것도 아니다. 그저 사람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기운이 빠진다는 설명이었다. “전화 오는 게 부담돼요. 약속 잡는 것도 싫고요.”

우울증 환자들이 흔히 호소하는 ‘사회적 위축’은 성격 문제가 아닌 뇌 신경회로의 변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게티이미지

우울증 환자들이 흔히 호소하는 ‘사회적 위축’은 성격 문제가 아닌 뇌 신경회로의 변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게티이미지


이 같은 호소는 낯설지 않다. 우울증 환자들이 진료실에서 가장 자주 꺼내는 말 중 하나가 바로 ‘사람을 피하게 된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이를 ‘사회적 위축’이라 부른다. 그동안 이 증상은 흔히 우울한 기분에 따른 심리적 반응, 혹은 성격 문제로 받아들여져 왔다. “마음이 약해져서 그렇다”는 식의 설명도 따라붙었다.

최근 이 고립이 기분이나 의지의 문제가 아닌 실제 뇌 안에서 벌어지는 변화라는 점을 분명히 보여주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스트레스 받자, 뇌 ‘신호선’이 과열됐다

20일 과학계에 따르면 건국대학교 생명과학대학 정지혜 교수와 박호용 교수 공동 연구팀은 우울증 상태에서 사회적 행동을 가로막는 특정 뇌 신경회로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규명했다. ‘사람을 피하게 되는 순간’, 뇌 안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처음으로 구체적으로 짚어낸 것이다.


연구팀이 집중해 들여다본 곳은 전전두엽과 측유상핵을 잇는 신경회로였다. 전전두엽은 감정 조절과 판단을 맡는 뇌의 핵심 영역이다. 반면 측유상핵은 스트레스나 부정적 자극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부위로 알려져 있다.

연구진은 실험용 쥐에게 반복적인 스트레스를 가했다. 그러자 변화는 행동보다 먼저 뇌에서 포착됐다. 전전두엽에서 측유상핵으로 이어지는 신경 신호가 평소보다 훨씬 강하고 빠르게 쏟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마치 전선에 과부하가 걸린 것처럼요.” 연구에 참여한 한 관계자는 이렇게 설명했다. 실제로 이 상태에 놓인 쥐들은 눈에 띄게 달라졌다. 평소라면 다른 쥐에게 다가가 냄새를 맡고 주변을 맴돌던 행동이 사라졌다. 대신 구석으로 숨거나, 접촉 자체를 피했다. 사람으로 치면 ‘약속을 취소하고, 방 안에 틀어박히는’ 모습에 가까웠다.


◆빛을 비추자 행동이 돌아왔다

연구팀은 여기서 실험을 멈추지 않았다. “이 과열된 회로를 잠시 꺼주면 어떻게 될까?”라는 질문을 던졌다. 광유전학(옵토제네틱스) 기술을 이용해 해당 신경회로의 활동을 정밀하게 조절했다.

결과는 극적이었다. 과도하게 활성화돼 있던 회로를 억제하자 쥐들의 행동이 빠르게 바뀌었다. 다시 다른 개체에게 다가가고, 주변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스트레스에 눌려 닫혀 있던 ‘사회성 스위치’가 켜진 순간이었다.


연구진은 이 장면을 “가장 인상적인 순간”으로 꼽았다. 사회적 회피 행동이 성격이나 학습의 결과가 아닌 조절 가능한 뇌 회로의 문제임을 눈으로 확인했기 때문이다.

연구진은 스트레스가 이 회로를 과도하게 활성화시키며, 사회적 회피 행동을 유발한다는 사실을 동물 실험으로 확인했다. 게티이미지

연구진은 스트레스가 이 회로를 과도하게 활성화시키며, 사회적 회피 행동을 유발한다는 사실을 동물 실험으로 확인했다. 게티이미지


이번 연구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갔다. 사람을 만나 즐거움을 느끼게 하는 도파민 보상 시스템과의 연결도 확인했다. 전기생리학 실험 결과, 문제의 신경회로는 도파민 중추와 직접적으로 연결된 세포들의 활동을 억제하고 있었다.

우울증 상태에서는 사람을 만났을 때 느껴야 할 ‘보상 신호’ 자체가 약해진다는 뜻이다. 즐겁지 않으니 굳이 만나고 싶지 않다. 사회적 위축은 그 결과로 나타난 행동이었다.

◆몸이 아파도 마음은 닫힌다

이번 연구의 또 다른 특징은 스트레스의 범위를 넓혔다는 점이다. 정신적 스트레스뿐만 아니라 신체적 스트레스 역시 같은 뇌 회로를 자극해 사회적 행동을 위축시킨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몸이 아플 때 유독 사람 만나기가 싫어지고, 모든 일이 귀찮아지는 이유가 단순한 기분 탓이 아니라는 설명이다. 연구진은 “신체적 고통 역시 뇌 회로를 통해 사회적 행동에 영향을 준다는 점을 동물 모델에서 처음으로 입증했다”고 밝혔다.

정 교수는 “우울증에서 흔히 보이는 사회적 위축을 뇌 회로 수준에서 정확히 짚어냈다는 데 의미가 있다”며 “외로움과 고립을 동반하는 다양한 정신질환 치료 연구의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연구 결과는 국제학술지 Progress in Neurobiology에 게재됐다. 우울증은 더 이상 ‘마음이 약해서’ 생기는 문제가 아니다. 사람을 피하고 싶어지는 순간 뇌 안에서는 분명한 신호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그 스위치는 다시 켤 수 있다는 가능성도 함께 확인됐다.

김현주 기자 hjk@segye.com

ⓒ 세상을 보는 눈, 세계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