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ESS 중앙계약시장 입찰/그래픽=이지혜 |
저가수주 경쟁은 산업의 아편과 다름없다. 지금 당장은 모두 기분이 좋다. 낙찰자는 안정적으로 물량을 확보할 수 있고 발주자는 싼 가격에 제품을 제공받는다. 문제는 결국 산업의 미래 성장성을 갉아먹는 독이 된다는 점이다. 가격 경쟁에만 집착하다 보면 기술 개발과 품질 혁신, 안전성 강화와 같은 본질적인 경쟁력이 뒷전이 된다. 산업 생태계 자체를 황폐화시킬 수도 있다.
이미 2010년대 조선업에서 전례가 있다. 업황 부진 속에 각 조선사는 '일단 도크부터 채워놔야 한다'는 절박함에 가격 싸움에 몰두했다. 이렇게 수주한 물량은 당장의 아픔을 참는 알약이 됐을지는 모르지만 결국 조선업 생태계를 침체시킨 원흉이 됐다. 배를 만들어도 이익이 남지 않으니 기업의 체력은 더욱 약해졌고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는 근로자들은 조선소를 떠났다.
최근 LNG(액화천연가스) 운반선 위주의 사이클이 시작된 이후 저가수주의 그늘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조선업계에 "이 사이클이 끝나도 결코 가격 경쟁에 집착하던 그때로 돌아갈 수 없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그런데 이 길을 K배터리가 그대로 답습하는 듯한 모습이 ESS 입찰에서 관측되고 있다. 어려운 업황으로 인해 공장 가동률이 극도로 떨어진 가운데, 어떻게든 물량을 확보하려는 조급함이 저가수주 경쟁으로 몰리는 구도가 똑 닮았다.
K배터리는 이미 글로벌 시장에서 저가 제품을 앞세운 중국의 공세에 속수무책 밀려왔다. 총 40조원 규모로 진행되고 있는 정부 주도 ESS 사업까지 저가수주로 얼룩진다면 K배터리는 더 이상 비빌 언덕이 없다. 특히 저가 ESS용 배터리를 만들려면 값싼 중국산 소재 사용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는 것도 문제다. 이는 국내 광물·소재·부품·장비 기업들이 구성하고 있는 배터리 생태계 자체가 위기의 늪에 빠지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다. 국가의 주요 에너지 믹스 콘셉트인 ESS가 껍데기만 국산이고 내부는 중국산 소재로 채워진다는 얘기다.
정부는 제2차 ESS 입찰을 준비하며 가격 평가 비중을 기존 60%에서 50%로 조정하는 등 제도개선에 나섰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저가수주 경쟁을 막기 어렵다. 입찰 가격 하한선을 두는 것과 같은 현실적 대안도 충분히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정부가 국가 전략 산업의 내실과 미래 가치를 지키는 방향을 설정하기를 바란다. 그래야만 ESS 입찰이 K배터리 생태계가 중국과 진검승부를 벌일 수 있는 체력을 비축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최경민 기자 brown@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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