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뒤 1500억달러 규모, 반도체 위상 육박
릴리·노보 경구제 경쟁, ‘주사기 공포’ 끝낸다
우시·론자·후지필름, 글로벌 생산 전쟁 가열
릴리·노보 경구제 경쟁, ‘주사기 공포’ 끝낸다
우시·론자·후지필름, 글로벌 생산 전쟁 가열
일라이릴리. [로이터] |
[게티이미지뱅크] |
[헤럴드경제=최은지 기자] 장기 보관 시 냉장고 한편을 비워야 하고 이동 시마다 온도 변화를 신경 써야 했던 번거로움, 매주 배꼽 주위에 바늘을 직접 찔러넣어야 했던 심리적 저항감. 비만 환자들을 치료 현장에서 주저하게 했던 이 ‘물리적·심리적 장벽’들이 이제 하루 한 알의 알약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올해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제44회 JP모건 헬스케어 콘퍼런스(JPMHC)’의 화두는 2년 전과는 확연히 달랐다. 당시가 비만 치료제의 압도적인 ‘체중 감량 효과’ 자체에 주목하던 시기였다면, 올해는 ‘복약 편의성’과 ‘공급망 혁신’이 시장의 주도권을 결정짓는 2라운드의 서막을 알렸다.
현재 글로벌 비만 치료제 시장은 향후 10년 내 1500억달러(약 217조원) 규모에 달할 것으로 전망된다. 단일 약물 계열(GLP-1)이 형성할 글로벌 비만 치료제 시장 규모가 대한민국 경제의 중추인 반도체 산업의 위상에 맞먹는 수준으로 성장할 것이라는 분석이다.
이 거대한 ‘쩐의 전쟁터’에서 선두 주자 일라이 릴리의 데이비드 릭스 CEO는 여유와 자신감을 동시에 드러냈다. 그는 지난 13일(현지시간) 메인트랙 발표 후 후발 주자들이 비만 치료제 시장에 대거 참전하는 상황에 대한 질문을 받자 “파티에 오신 걸 환영한다(Welcome to the party)”며 여유를 보였다. 그는 “이 시장은 매우 크고, 경쟁은 오히려 과학적 진보를 앞당길 것”이라며 선두 주자로서의 자신감을 드러냈다.
이는 비만 치료가 일시적 유행이 아닌 전 인류적 만성 질환 치료의 ‘표준’이 되었음을 선언함과 동시에, 제조 역량과 글로벌 공급망을 이미 구축한 선두 주자로서의 압도적 격차를 과시한 것으로 풀이된다.
▶‘오르포글리프론’이 가져올 일상의 혁명 = 릭스 CEO의 자신감 뒤에는 임상 3상 막바지에 다다른 경구용 비만 신약 ‘오르포글리프론’이 있다. 이 약은 기존 주사제의 최대 약점인 ‘바늘’과 ‘냉장 보관’이라는 제약을 동시에 깨뜨렸다. 주사기에 대한 공포(Needle Phobia)로 치료를 망설이던 환자들에게 상온 보관이 가능한 알약은 단순한 제형의 변화를 넘어 치료 접근성의 혁명이다.
특히 릴리는 이 알약의 가격을 한 달 기준 150달러(약 21만원) 수준으로 책정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콜드체인이 미비한 신흥국 시장을 선점해 비만약의 ‘민주화’를 이루겠다는 포부다. 릭스 CEO는 “주사 거부감이 있는 환자들에게 오르포글리프론은 가장 강력한 대안이 될 것”이라고 단언했다.
시장 점유율 1위인 노보 노디스크 역시 수성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노보는 이번 행사에서 주사제 위고비와 동등하거나 그 이상의 효과를 내는 ‘고농축 경구제’ 데이터를 제시했다. 노보 측은 “비만은 한 번의 처치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관리가 필요한 만성 질환”이라며, 특히 고령층이나 복합 질환 환자들에게 최적화된 복약 환경을 제공해 경쟁사의 추격을 따돌리겠다는 구상이다.
글로벌 빅파마들의 추격도 매섭다. 이번 행사에서 로슈는 “비만 치료 분야 글로벌 톱3 플레이어가 되겠다”고 선언하며 총 5건의 임상 결과를 예고했다. 로슈는 카못 테라퓨틱스 인수를 통해 확보한 후보물질들을 활용, 근손실을 최소화하는 ‘고품질 감량’을 차별화 포인트로 내세웠다.
암젠은 한 달 혹은 분기에 한 번 투여하는 장기 지속형 주사제 ‘마리타이드’의 경쟁력을 과시했다. 로버트 브래드웨이 암젠 CEO는 “매주 투여하는 번거로움에서 환자를 해방시키는 것이 목표”라며 압도적인 복약 편의성을 강조했다.
▶CDMO 업계도 지각변동…‘생산 전쟁’ 2막 = 주사제에서 알약으로의 변화는 단순히 약의 형태가 바뀌는 것을 넘어 CDMO 산업에도 영향을 끼칠 전망이다. 노보 노디스크의 ‘위고비’나 릴리의 ‘젭바운드’는 ‘펩타이드(단백질)’ 성분으로, 미생물이나 세포를 배양해 정제하고 무균 상태에서 주사기에 채워 넣는 PFS 설비가 핵심이다. 그러나 릴리의 ‘오르포글리프론’은 소분자 화합물(Small Molecule)로, 일반 감기약과 같은 고형제 생산 라인과 유사하다.
다만 알약 형태의 비만 치료제 상용화가 본격화되더라도, 당분간 PFS 생산과 공존하는 형태로 시장이 형성될 전망이다. PFS는 매일 약을 챙겨 먹기 힘든 환자층을, 알약은 대중적인 시장을 타깃할 수 있어 두 시장 모두 소구력이 있다는 분석이다.
우시앱텍은 지난해 펩타이드 생산 역량을 2019년 대비 200배 성장한 10만리터 이상으로 확충하며, 상업화된 GLP-1 약물 7개 중 1개를 지원하는 최대 거점으로 부상했다. 이에 맞서 론자는 고도화된 펩타이드 합성 기술을, 후지필름은 대규모 완제 공정(DP) 역량을 내세우며 ‘비만약 골드러시’의 핵심 수혜를 정조준하고 있다.
비만 치료제는 이제 ‘얼마나 체중을 줄이느냐’의 단계를 넘어, ‘얼마나 평범한 일상에 스며드느냐’의 싸움으로 진화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