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로 건너뛰기
검색
조선비즈 언론사 이미지

[기자수첩] 메모리 수퍼사이클은 추격자의 시간

조선비즈 최효정 기자
원문보기

[기자수첩] 메모리 수퍼사이클은 추격자의 시간

서울맑음 / -3.9 °


메모리 수퍼사이클은 한국 기업만의 잔치가 아니다. 인공지능(AI) 확산과 고대역폭메모리(HBM) 수요 급증으로 글로벌 메모리 시장이 호황기에 진입했지만, 이번 국면은 승자의 축포인 동시에 추격자에게는 ‘시간’을 안겨주는 구간이기도 하다.

현재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가 HBM 시장의 80% 안팎을 점유하고 있으나, 시장조사업체들은 올해 HBM4(6세대 HBM) 전환을 전후해 점유율 재편과 기술 경쟁이 본격화할 것으로 본다. SK하이닉스는 올해도 50% 이상의 점유율을 유지할 것으로 예상되는 반면, 삼성전자는 지난해 2분기 17%까지 하락한 점유율을 올해 30~35% 수준으로 회복하는 것을 목표로 추격 중이다.

메모리 가격 반등은 중국 추격자들의 호흡도 되살린다. CXMT는 D램 시장에서 4~8% 점유율을 확보했고, 2025년 기준 웨이퍼 투입량이 약 273만장으로 추정된다. YMTC는 낸드플래시 시장 점유율이 4~8% 수준에서 올해 15%까지 확대를 목표로 한다. 두 기업은 연 50% 안팎의 생산능력 증설을 추진하며, 미국의 제재 속에서도 중국 증시 상장을 통해 조 단위 자금을 조달해 장비·공정 내재화에 속도를 내고 있다.

범용 D램·낸드 시장에서 가격 사이클은 곧 개발과 양산의 시간과 직결된다. 호황기에 늘어나는 ‘마진의 시간’은 후발주자에게 수율 개선과 공정 학습을 반복할 여유를 제공한다. 초격차는 선언이 아니라, 매 사이클마다 성능·원가·신뢰성으로 증명해야 유지된다.

문제는 이 시간이 어디로 축적되느냐다. AI 반도체 경쟁은 메모리를 더 많이 공급하는 게임을 넘어, 메모리·로직·패키징을 결합한 시스템 단위 최적화 경쟁으로 이동하고 있다. 메모리 주도권만으로는 고객의 설계 단계 의사결정에 깊이 관여하기 어렵다. HBM에서 우위를 확보한 SK하이닉스 역시 로직과 패키징을 포함한 시스템 설계에서는 외부 생태계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구조다.

메모리 호황의 성과를 산업 경쟁력으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시스템 단위 설계·공급 역량이 관건이다. 설계 단계에서 고객의 선택에 관여할 수 있는 구조가 없다면, 메모리에서 확보한 우위는 제품 경쟁력이나 장기적인 고객 관계로 이어지기가 어렵다. 그 한계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다. 작년 1분기 기준 파운드리 시장 점유율은 TSMC 67.6%, 삼성전자 7.7%, SMIC 약 6% 수준으로 격차가 크다.


시스템 단위 설계·공급 역량이 충분히 뒷받침되지 않을 경우, 메모리에서 확보한 성과는 고객의 초기 설계 선택에 반영되기가 어렵다. 그 결과 메모리 호황으로 벌어들인 자금과 기회는 한국 반도체 생태계 안에만 머무르기보다, 파운드리를 축으로 한 TSMC와 중국 팹리스·파운드리 진영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흘러갈 가능성이 커진다.

역사적으로 반도체 산업에서 가장 위험한 시점은 불황이 아니라 호황기다. 과잉투자와 로드맵 오판, 기술 선택의 지연은 대부분 호황기에 누적돼 다음 다운사이클에서 비용으로 돌아온다. 지금의 메모리 수퍼사이클은 한국 기업에겐 다음 격차를 벌릴 마지막 완충지대이자, 중국 기업에겐 추격을 정교화할 수 있는 시간이다. 초격차는 선언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메모리에서 확보한 우위를 시스템 경쟁력으로 확장할 수 있느냐가, 다음 사이클에서 한국 반도체 산업의 위상을 가를 기준이 될 것이다.

최효정 기자(saudade@chosunbiz.com)

<저작권자 ⓒ ChosunBiz.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자수첩] 메모리 수퍼사이클은 추격자의 시간 : zum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