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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을읽다]외교는 풀렸지만, 과학기술 협력은 다르다

아시아경제 김종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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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을읽다]외교는 풀렸지만, 과학기술 협력은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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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국내 기업들 사이에서는 중국을 둘러싼 기술 인력 유출과 관리 문제가 다시 민감한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핵심 연구 인력이 중국 기업으로 이직하거나, 공동연구 과정에서 기술정보의 공유 범위를 둘러싼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특허 침해와 영업비밀 유출을 둘러싼 법적 분쟁도 이어지고 있다. 외교 현장에서 들리는 '협력'이라는 단어와 달리, 기업 현장에서는 여전히 경계의 신호가 꺼지지 않은 상태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한·중 정상회담이 열렸다. 정상 간 대화가 재개되고 협력 의지가 확인되면서 양국 관계는 다시 대화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이 변화가 곧바로 과학기술 협력의 확대로 이어질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정상회담 공동 메시지에는 과학기술 혁신과 디지털 협력, 인적 교류 확대 같은 표현이 빠지지 않았지만, 오늘날 과학기술 협력은 선언만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연구 범위와 데이터 접근, 지식재산권의 귀속, 인력 이동 제한까지 모두 계약과 규정으로 세세하게 명시돼야 한다. 기술 협력은 정치적 합의가 아니라, 실무적이고 구체적인 협상의 결과물이다.

글로벌 통신사 로이터는 한·중 정상회담 관련 한국이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모색하는 동시에 미국과의 기술 동맹을 함께 고려해야 하는 입장"에 놓였다고 소식을 전했다. 이 문장은 한국 외교가 처한 현실을 정확히 짚고 있다. 과학기술 협력 여부는 정상 간 대화보다, 기업과 연구기관이 감당해야 할 법적·경제적 리스크에 의해 좌우된다.

구체적인 사례를 살펴보자. 인공지능(AI)과 반도체 분야에서 미국과 유럽은 중국과의 기초과학 연구, 환경·보건 분야 협력은 유지하면서도, 첨단 반도체 장비와 인공지능 연산 기술, 핵심 데이터 접근은 엄격히 통제한다. 연구실 문은 열어두되, 공장과 데이터센터의 문은 닫아두는 방식이다. '협력'이라는 표현 아래에서도 기술의 단계에 따라 조건은 크게 달라지는 것이다.

미국 유력 일간지 뉴욕타임스는 최근 기술 협력을 "국가 전략의 일부로 관리되는 영역"이라고 했다. 기술 협력이 신뢰에 기반한 교류의 단계를 벗어나, 국가 전략과 안보 판단에 따라 관리되는 영역으로 이동했다는 의미다. 협력은 가능하지만, 별도의 조건과 관리 없이는 지속되기 어렵다. 그 책임 또한 정부보다 현장의 기업과 연구기관이 떠안을 가능성이 높다.


한국의 상황은 더 미묘하다. 중국은 여전히 중요한 협력 대상이자 최대 교역국 중 하나이며, 과학기술 연구 역량에서도 세계 최상위권에 속한다. 동시에 한국은 반도체와 AI, 첨단 제조 분야에서 미국 중심의 기술 생태계에 깊이 편입돼 있다. 어느 한쪽과의 협력을 단절하는 선택은 현실적이지 않다. 그렇다고 모든 기술을 동일한 기준으로 협력할 수도 없다.

실제 연구와 산업 현장에서는 이런 현상이 이미 반영되고 있다. 공동연구는 가능하지만 연구 주제는 세분화되고, 인력 교류는 허용되더라도 민감 기술 분야는 제외되는 경우가 많다. 데이터 공유 역시 협력이라는 명분 아래에서도 가장 마지막까지 조심스럽게 다뤄진다. '과학기술 협력'이라는 하나의 표현 아래 허용되는 영역과 관리되는 영역이 달라지는 것이다.

이번 정상회담으로 한·중 과학기술 협력의 문이 완전히 열렸다고 보기는 어렵다. 기술 협력이 전면적으로 확대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도 현실과는 거리가 있다. 외교는 관계의 분위기를 바꿀 수 있지만, 과학기술 협력의 범위는 국제 질서와 기술 경쟁, 안보 인식 속에서 결정된다.


한·중 정상회담 이후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협력의 성과 자체보다, 외교와 과학기술이 작동하는 방식의 차이일 것이다. 외교는 분위기를 관리하지만, 기술 협력은 계약으로 움직인다. 무엇을 공유하고 무엇을 보호할 것인지, 그 판단은 결국 현장의 기업과 연구기관에 달려 있다.

김종화 기자 justi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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