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화에어로스페이스 K9 자주포.사진=한화에어로 제공 |
[뉴스웨이 이승용 기자]
무기 시장에서 성능은 이제 기본값이다. 최근 유럽에서는 여기에 하나의 조건이 더 붙었다. 바로 '납기'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좋은 무기'보다 '빨리 오는 무기'가 더 절실해졌고, 그 변화의 한복판에서 K-9 자주포는 가성비 무기를 넘어 '즉시 전력화'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몇 년 전만 해도 "한국 자주포요?"라는 반문이 먼저 나오던 시장이다. 지금은 "그래서 언제 받을 수 있죠"가 먼저 튀어나온다. 방산 시장에서 성능표는 곧 신분증이지만, 전쟁이 길어질수록 그 신분증보다 더 강력한 것이 납기표라는 사실을 유럽이 몸으로 배운 셈이다.
K-9이 최근 유럽 재무장 흐름의 중심 무기로 부상한 배경도 결국 이 변화와 맞물려 있다. K-9은 현재 폴란드·루마니아·핀란드·노르웨이·에스토니아·호주·이집트 등 11여 개국에서 운용 중이며, 지난해 기준 글로벌 155㎜ 자주포 수출 시장 점유율이 55%에 달한다는 추정치도 나온다. 누적 운용 대수는 1800문을 넘긴 것으로 평가된다. 이미 '깔려 있는 무기'라는 사실 자체가 신뢰로 환산된 것이다.
전쟁에서의 검증은 보고서가 아니라 현장에서 이뤄진다. K-9은 혹한의 북유럽부터 사막과 고산지대까지 다양한 환경에서 실전 운용되며 성능을 입증했다. 성능 하나로 경쟁을 압도했다기보다는, 유럽이 원하는 조건이 바뀌는 순간 그 조건에 가장 현실적으로 부합한 무기라는 평가가 더 정확하다.
유럽이 요구한 조건은 단순했다. 노후 자주포를 단기간에 대체할 수 있을 것, NATO 표준에 부합할 것, 혹한과 고온 환경에서 검증됐을 것, 무엇보다 대량 도입이 가능할 것. 포병 소모량이 폭증하자 유럽 각국은 '언젠가 교체'가 아니라 '지금 당장 보강'으로 방향을 틀었다.
폴란드는 이 변화의 대표적 사례다. 2022년 7월 체결한 대규모 계약에는 K9A1 대량 도입과 함께 후속 개량형의 현지 생산이 포함됐다. 단순 구매를 넘어 차체 생산 기술 이전, 정비·개량, 탄약 운용까지 아우르는 포병 생태계 구축으로 거래의 성격이 확장됐다.
북유럽 역시 흐름은 같다. 노르웨이와 핀란드는 혹한 환경에서의 기동성과 운용 안정성을 이유로 K-9을 선택했고, 에스토니아는 대러 억제 전략의 핵심 포병 전력으로 이를 배치했다. 루마니아도 자주포와 탄약운반차를 패키지로 도입하며 이 흐름에 합류했다.
독일의 궤도형 자주포와 비교하면 K-9의 위치는 더욱 분명해진다. 독일산 자주포는 최고 성능 평가를 받지만, 가격과 유지 부담 역시 크다. 대당 2000만 달러 안팎으로 거론되는 가격대에서는 성능 경쟁이 아니라 예산 경쟁이 된다. 중량 역시 더 무거워 기동성과 운용 부담이 뒤따른다.
반면 K-9은 필요한 성능을 갖추면서도 운용비와 납기 측면에서 설득력을 확보했다. 상대적으로 낮은 가격 장벽은 '최고 성능 한 대'보다 '검증된 두 대를 더 빨리 받겠다'는 전시 현실과 맞아떨어진다.
그래서 오늘날 자주포의 경쟁력은 성능표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계약서에 찍히는 납기, 실제 유지 가능한 운용비, 현지에서 얼마나 수월하게 굴릴 수 있는지가 함께 평가된다. 완제품 판매에서 현지 생산·군수지원·교육까지 포함한 패키지 모델로 진화하면서, K-9은 무기가 아니라 '운영 플랫폼'으로 거래되기 시작했다.
전쟁이 길어질수록 성능은 기본 옵션이 되고, 그다음부터는 얼마나 빨리 전력을 채우고 얼마나 오래 유지할 수 있는지가 승부를 가른다. K-9은 그 냉혹한 채점표에서 가장 높은 점수를 받은, 유럽식 현실주의의 표준이 됐다.
이승용 기자 senna@newsw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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