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는 올해를 ‘생산적 금융 원년’으로 선언하며 금융자금의 흐름을 비생산적 영역에서 생산적 영역으로 전환하겠다는 목표를 내세웠다. 저성장이 고착화된 한국 경제에서 금융의 역할이 다시 질문받는 배경이다. 그동안 금융 공급은 담보와 신용을 기준으로 부동산과 가계대출에 집중돼 왔고, 혁신기업과 성장 초기 산업으로의 자금 유입은 제한적이었다. 본지는 생산적 금융이 구호에 그치지 않고 실제로 작동하기 위해 필요한 조건을 살펴봤다. 돈을 굴려 돈을 버는 금융을 넘어, 기업과 산업을 키우는 금융으로 전환할 수 있을지 짚어본다. [편집자주]
외환위기 이후 굳어진 ‘부동산 담보 중심’의 영업 구조가 국가 잠재성장률을 갉아먹고 있다. 자본이 혁신 산업으로 흘러가지 못하고 부동산 시장에 고이면서, 투자와 고용이 함께 위축되는 악순환이 이어지는 실정이다. 이에 이재명 정부는 가계·부동산 자금을 기업과 모험자본으로 물꼬를 돌리는 ‘생산적 금융’을 해법으로 제시했다. 다만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금융 시스템 전반의 개편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정책 실효성에 한계가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1673조 부동산 쏠림, 국가 잠재성장률 좀먹는 ‘독’
한국 금융의 생산적 기능을 약화시키는 주범은 부동산이다. 지난 1999년 외환위기 당시 대기업 연쇄 부도를 겪은 은행권은 20여년간 ‘안전한 먹거리’인 부동산 담보 영업에 몰두해왔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2024년 말 국내 은행들의 부동산 관련 대출 잔액은 1673조8000억원에 달했다. 2019년과 비교하면 506조7000억원(43.4%) 늘었다. 연평균 증가율은 7.5%로, 전체 원화대출(7%)과 명목 GDP(4.6%)보다 가팔랐다. 부동산 관련 대출이 명목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019년 57.2%에서 2024년 65.7%로 8.5%p 확대됐다.
국내 은행이 부동산 대출에 치중하는 이유는 리스크 회피와 수익성 때문이다. 기업 대출에 비해 개별 대출 규모가 작아 관리가 용이한 데다, ‘부동산 불패’ 신화가 건재한 만큼 돈 떼일 가능성이 낮기 때문이다. 그만큼 은행 수익률도 높아진다. 차주가 빚을 갚지 못해도 은행은 담보로 잡은 부동산을 경매에 부쳐 손실을 곧바로 메울 수 있다. 반면 제조업 연구개발(R&D)나 신산업 투자는 담보가 없고 회수 기간이 길어 은행권의 외면을 받는 실정이다.
그래픽=한지영 디자이너 |
외환위기 이후 굳어진 ‘부동산 담보 중심’의 영업 구조가 국가 잠재성장률을 갉아먹고 있다. 자본이 혁신 산업으로 흘러가지 못하고 부동산 시장에 고이면서, 투자와 고용이 함께 위축되는 악순환이 이어지는 실정이다. 이에 이재명 정부는 가계·부동산 자금을 기업과 모험자본으로 물꼬를 돌리는 ‘생산적 금융’을 해법으로 제시했다. 다만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금융 시스템 전반의 개편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정책 실효성에 한계가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1673조 부동산 쏠림, 국가 잠재성장률 좀먹는 ‘독’
한국 금융의 생산적 기능을 약화시키는 주범은 부동산이다. 지난 1999년 외환위기 당시 대기업 연쇄 부도를 겪은 은행권은 20여년간 ‘안전한 먹거리’인 부동산 담보 영업에 몰두해왔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2024년 말 국내 은행들의 부동산 관련 대출 잔액은 1673조8000억원에 달했다. 2019년과 비교하면 506조7000억원(43.4%) 늘었다. 연평균 증가율은 7.5%로, 전체 원화대출(7%)과 명목 GDP(4.6%)보다 가팔랐다. 부동산 관련 대출이 명목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019년 57.2%에서 2024년 65.7%로 8.5%p 확대됐다.
국내 은행이 부동산 대출에 치중하는 이유는 리스크 회피와 수익성 때문이다. 기업 대출에 비해 개별 대출 규모가 작아 관리가 용이한 데다, ‘부동산 불패’ 신화가 건재한 만큼 돈 떼일 가능성이 낮기 때문이다. 그만큼 은행 수익률도 높아진다. 차주가 빚을 갚지 못해도 은행은 담보로 잡은 부동산을 경매에 부쳐 손실을 곧바로 메울 수 있다. 반면 제조업 연구개발(R&D)나 신산업 투자는 담보가 없고 회수 기간이 길어 은행권의 외면을 받는 실정이다.
현행 자본규제는 생산적 금융 전환의 걸림돌로 작용한다. 은행은 국제결제은행(BIS)이 정한 자기자본비율을 준수해야 한다. 자기자본비율은 은행의 위험가중자산 대비 자기자본 비율로 산출한다. 위험가중자산은 은행이 가진 대출·채권·펀드·주식 등 자산을 위험도에 따라 가중치를 적용해 재산정한 것이다. 위험도가 높은 주식은 반영 비중을 높이고 안전한 담보 대출은 비율을 낮게 잡는 방식이다. 임수강 생산과포용금융연구회 부대표(경제학 박사)는 “혁신·지역 기업 대출은 동일 수익에도 가계대출보다 훨씬 많은 자기자본을 요구해 자본 확충 부담을 키운다”며 “은행 입장에서는 위험 가중치가 낮은 주택담보대출을 선호할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말했다.
금산분리 원칙도 신산업 자금 유입을 가로막는 제도로 꼽힌다. 금산분리는 산업자본과 금융자본 사이에 칸막이를 두는 원칙이다. 산업자본의 은행 지분 보유를 4%로, 은행의 비금융회사 지분은 15%로 제한하는 것이 골자다. 재벌의 금융기관 사금고화와 기업 부실의 금융 전이를 차단하기 위해 도입됐던 이 원칙은 신산업 투자 돈줄을 가로막는 장벽이 된 지 오래다. 전략산업에 한해 금산분리 원칙을 탄력적으로 적용해 숨통을 틔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배경이다.
외부 요인만큼이나 강력한 장벽은 은행 내부의 경직된 성과평가체계(KPI)다. 현재 국내 은행의 KPI는 연체율·부실률 방어에 초점이 맞춰져 있고, 성과 평가 기간이 제한적이다. 김대종 세종대 경영학과 교수는 “신산업이나 지역 기업 대출은 성공해도 보상이 제한적인 반면, 실패시 입는 인사평가상 불이익이 너무 크다”며 “직원 개인 입장에서는 리스크를 감수하며 혁신 기업을 발굴하기보다, 안정성이 높은 주담대에 매달리는 것이 훨씬 유리한 구조”라고 지적했다. 김용기 생산과포용금융연구회 대표(전 일자리위 부위원장) 역시 “당장 분기별, 연도별 수익과 건전성 지표에 목을 매는 구조에서는 수년에 걸쳐 결실을 보는 혁신 산업에 투자하는 모험이 불가능하다”며 “연체율·부실률 중심 KPI를 유지하는 한 현장은 ‘사고만 피하자’는 방향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다”고 내다봤다.
그래픽=한지영 디자이너 |
기업대출 확대냐, 모험자본 이동이냐…생산적 금융의 향방은
이처럼 외부 규제와 내부 요인이 동시에 얽힌 상황에서, 전문가들은 생산적 금융의 안착을 위해 지원 대상과 방식의 명확화가 시급하다고 입을 모은다. 은행의 기업대출 총량을 늘리는 ‘양적 확대’에 치중할지, 금융시스템의 무게중심을 투자 중심의 ‘모험자본 생태계’로 이동시킬 것인지에 대한 정책 방향부터 확정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현행 은행 중심 대출 구조를 유지할 경우,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과제는 중소기업을 둘러싼 고질적인 정보 비대칭 문제다. 김용진 교수는 “중소기업은 시장이 모르는 정보가 많아 은행이 리스크를 감수하기 어렵다”며 “은행이 기업에 돈을 빌려주는 채권자에 머물지 말고, 일부를 직접 투자해 ‘주주’로 참여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은행이 주주가 되면 기업 내부의 사정을 깊이 이해할 수 있어 ‘깜깜이 대출’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를 통해 기업이 위기에 처했을 때는 지분 관계를 바탕으로 지원을 지속하고, 기업이 성장했을 때는 투자 수익을 회수해 또 다른 혁신 기업에 투자하는 ‘선순환 구조’가 가능하다는 분석이다.
이는 독일의 ‘관계형 금융’ 모델과 유사한 접근이다. 관계형 금융은 은행이 중소기업에 장기대출·컨설팅 등을 제공하며 두터운 신뢰 관계를 쌓고, 단순 대주를 넘어 사업 성과까지 공유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국내에서 해당 모델을 구현하려면 금산분리 원칙 및 BIS 규제의 개편이 선행돼야 한다. 현행법상 금융지주사는 비금융사 주식을 5%, 은행은 15% 이상 보유할 수 없어 핵심 주주가 될 길이 막혀 있다. 또한 주식 투자는 위험가중치가 높게 산정돼 BIS 비율 관리가 시급한 은행 입장에선 현실적인 제약이 따른다. 해법으로는 은행 외 금융 주체를 활용하자는 의견이 제기됐다. 중소기업 상당수가 지방에 소재한 만큼, 지역 밀착형 금융인 상호금융을 정책금융의 보완 축으로 활용하자는 것이다. 다만 상호금융에 맞는 별도의 건전성 관리 체계가 우선 마련돼야 한다는 전제가 뒤따른다.
반면 모험자본 생태계로의 전환을 택할 경우, 중소기업이 채권이나 주식을 발행해 자본을 직접 조달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조언한다. 특히 비상장 주식 거래를 통해 자금이 원활하게 유입될 수 있는 환경이 필수적이다. 김용진 교수는 “현재는 사실상 불가능하다”며 “코넥스(중소·벤처기업 전용 시장)는 거의 유명무실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지난 2013년 출범한 코넥스 시장은 자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는 초기 중소·벤처 기업이 자금을 원활하게 조달할 수 있도록 설립됐으나, 현재는 본래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대안으로 제시되는 코스닥 역시 한계는 뚜렷하다. 기관 투자자 비중이 90%에 달하는 미국 나스닥과 달리, 코스닥은 개인 투자자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도 민간 모태펀드를 육성해 기관 투자자의 유입 경로를 넓히고, 시장 안정성을 높야 한다는 분석이 힘을 얻는 이유다.
“부동산 ‘퇴로’ 끊고 생산적금융 시스템 고정해야”
전문가들은 자금의 ‘유입 경로’를 넓히는 것만큼, 부동산으로의 ‘유출 경로’를 차단하는 정책 병행도 시급하다고 지적한다. 임수강 박사는 “비생산적 금융의 축소는 자연스럽게 생산적 금융의 확장으로 이어진다”며 “다주택자의 담보대출 제한을 실행하기 위해 여러 정책 수단을 동원해야 한다”고 밝혔다. 특히 위험가중치 조정 등 규제 장치를 활용하면 다주택자 중심의 담보대출을 효과적으로 억제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이는 개별 금융회사 차원을 넘어 중앙은행과 정책금융의 역할 재정립 논의로 이어진다. 임수강 박사는 한은의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금융통화위원회의 중립적 개편이 시급하다고 진단했다. 현재 금통위는 당연직(총재·부총재) 외에 기획재정부 장관, 한은 총재, 금융위원장,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전국은행연합회 회장이 각각 추천하고 대통령이 임명하는 7인 체제다. 임수강 박사는 “현재의 추천 구조는 은행과 대기업 중심의 목소리에 치우쳐 있어 실물경제나 노동, 중소기업, 금융소비자의 입장을 대변하기 어렵다”며 “통화신용정책의 중립성을 확보하기 위해 노동조합 추천 인사를 포함하는 등 위원 구성의 다양성을 보장하는 한국은행법 개정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금융 현장의 유인 구조 재편에 그치는 것 대신, 금융 시스템 전반을 재설계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해외의 경우, 금융 시스템 전반의 역할 분담이 확립돼있다. 미국은 은행 대출보다 벤처캐피탈·사모펀드·자본시장 중심의 모험자본 생태계가 발달해 있다. 은행이 초기 위험을 직접 떠안기보다 성장단계별로 금융을 분담하는 구조가 정착돼 있는 것이다. 이에 한국도 은행과 정책금융, 자본시장 간 연계 구조를 구축해야 한다는 제언이다.
이 과정에서 시장 물꼬를 터주는 정책금융기관의 ‘마중물’ 역할이 강조된다. 민간 금융사는 시장 논리에 따라 보수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독일의 경우 독일재건은행(KfW)이 민간 금융과 공동 투자·대출 구조를 형성해 초기 위험을 흡수하고 민간 자본의 참여를 끌어내 왔다. 김대종 세종대 경영학과 교수는 “정책금융은 민간 금융을 대체해서는 안 되고, 마중물 역할에 집중해야 한다”며 초기 위험이 큰 영역에서는 정부가 일부 리스크를 분담하고, 사업이 궤도에 오르면 민간 자금이 자연스럽게 유입되는 구조가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핵심은 “영구적 개입이 아니라 단계적 퇴장”이라고 당부했다.
금융권 내부의 지배구조와 은행의 KPI(핵심성과지표) 체계 역시 손질돼야 한다. 이창민 한양대 경영학과 교수는 “대기업과 은행 경영진이 비효율적 자본 배분을 고수하는 배경에는 나쁜 지배구조가 있다”며 “투명한 지배구조가 확립되어야만 경영진이 현상 유지에 급급한 관행에서 벗어나 혁신 투자를 단행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실무진의 평가 체계와 관련해서 서지용 상명대 경영학부 교수는 “은행 KPI를 기존의 단기 건전성 중심에서 3~5년 단위의 장기 성과(ROE 및 생산적 자본 순환 기여 지표) 중심으로 전면 재설계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또 서 교수는 성과보수를 장기 성과 및 환수제와 연동할 것을 강조하며 “성공 시 확실한 보상을 제공하고 실패 리스크는 분산시키는 글로벌 수준의 장기 평가 체계가 해법”이라고 덧붙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