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사회심리학자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은 「자유로부터의 도피(Escape From Freedomㆍ1941년)」에서 자유를 지키기 위해 감내해야 하는 책임의 무거움을 짚어준다. 프랑켄슈타인 박사에게는 '생명 창조'의 자유가 있다. 자신이 생명을 창조할 자유가 있으니 생명을 창조할 능력만 있으면 생명을 창조하면 된다. 그런데 그에겐 '책임 의식' 따윈 없다.
어떤 자유에든 무거운 책임이 따르게 마련이다.[사진|뉴시스] |
영화 프랑켄슈타인을 연출한 리들리 스캇 감독은 전작 '프로메테우스(2012년)'에서 기억에 남을 만한 장면을 선보였다. 과학자 찰리와 인간이 창조한 안드로이드 데이비드(마이클 패스벤더 분)의 대화 한 토막이다.
안드로이드가 찰리 박사에게 묻는다. "인간은 왜 우리를 만들었지?" 찰리가 심드렁하게 대답한다. "왜? 우리가 만들 수 있으니까 만들었지." 그는 자유에 따라야 하는 '책임'에 무관심한 태도를 보인다.
자신들이 창조한 안드로이드와 눈높이를 맞춰야 할 책임을 소홀히 한 과학자들은 안드로이드 데이비드에게 몰살당한다. 아이를 낳을 수 있고 낳을 자유도 있다고 마구 낳아서는 안 된다. 고통이 수반되는 양육의 책임이 따른다.
프랑켄슈타인 박사 역시 '생명 창조'의 성공에 따라올 부와 명성의 '보상'만 생각했을 뿐, 만약 실패할 경우에 자신이 져야 할 책임은 생각해 본 적 없었던 듯하다. 결국 생명 창조의 결과가 '괴물의 탄생'으로 나타났을 때 그 책임으로부터 도피한다. 에리히 프롬이 말하고 싶었던 '자유로부터의 도피'는 풀어쓴다면 '자유에 따르는 책임으로부터의 도피'다.
독일 국민들은 역사상 가장 완벽한 민주주의 체제였던 '바이마르 헌법'에 따른 '바이마르 공화국(Weimarer Republikㆍ1918~1933년)'을 창조해놓고 프랑켄슈타인 박사와 마찬가지로 그 체제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할 경우에 따르는 책임을 질 생각은 없었다.
그 책임으로부터의 도피는 히틀러라는 괴물을 탄생시켰지만 누구도 그 괴물의 탄생에 책임지지 않고 모두들 프롬의 분석처럼 '책임의 외주화(남 탓)'에 몰두한다. 일부는 자신들이 창조한 히틀러가 괴물이 된 것은 미국과 영국, 프랑스의 압박 때문이라고 괴물 탄생의 책임을 외부로 돌리거나, 내부에서도 서로 '폭탄 돌리기' 했다.
계엄이 야당의 국정마비 때문이었다는 '계몽령' 타령이나 자기편끼리 폭탄을 돌리는 등 다양한 책임의 외주화 모두 히틀러 시대에 봤던 책임으로부터의 도피 현상의 재림이다. 그중에도 압권은 사법부의 무책임이었다.
괴물이 탄생한 결정적 사건은 1923년 소위 뮌헨 '맥주 홀 폭동(Beer Hall Putsch)'이다. 그해 11월 8일 히틀러와 나치 지지자들은 바이에른주州 뮌헨 도심의 맥주 홀에서 바이에른 주지사를 감금하고 쿠데타를 일으켰다.
인상적인 것은 독일 남부 바이에른주는 우리로 치면 'TK'와 같은 보수 우파의 성지다. 김민재가 뛰고 있는 독일축구 최강 'FC 바이에른 뮌헨'이 자리 잡은 그곳이다. FC 바이에른 뮌헨의 구호는 "mia san mia"다. 김민재 축구중계를 열심히 찾아보는 축구팬들이라면 'mia san mia'라는 구호나 현수막을 듣고 보고 했을지도 모르겠다.
정권을 결사옹위하는 게 그 정권을 지지한 유권자의 책임일까.[사진|뉴시스] |
우리말로 하면 '우리는 누가 뭐래도 우리다'라는 뜻이다. 우리식으로 말하면 TK의 '우리가 남이가?'라는 건배사와 묘하게 닮았다. 바이에른은 BMW의 본거지인데, 우리네 영호남 지역감정처럼 인접한 슈투트가르트(Stuttgart)가 위치한 바덴뷔르템베르크(Baden-Württemberg) 주와 지역감정이 첨예해서 슈투트가르트에 생산거점을 갖고 있는 포르쉐와 벤츠를 거부하고 죽기 살기로 BMW만 탄다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BMW는 '바이에른 모터 공업 주식회사(Bayerische Motoren Werke)'의 약칭이다. 바덴뷔르템베르크주는 진보적 녹색당의 세력이 가장 강한 곳인 반면 바이에른은 '얼죽 보수당'이다. 그 유명한 '맥주 홀 폭동(1923년 11월)' 사건은 우익의 성지 바이에른 뮌헨에서 민주주의가 못마땅했던 사람들이 모여 폭동을 일으켜 16명의 나치 지지자들과 4명의 경찰관이 사망한 '내란'이었다.
히틀러는 분명 국가전복을 시도한 '내란 우두머리'였지만 황당하게도 사형이나 종신형이 아닌 9개월 징역형이라는 상징적 처벌에 그쳤다. 더욱 황당했던 것은 히틀러에게 '민주적 재판절차'라는 형식논리에 사로잡혀 무제한적인 반론권을 인정하면서 히틀러가 '반론'이 아닌 정치연설을 하고 피고인이 재판장을 준엄하게 질타하고 가르치는 어이없는 재판이 이어졌다.
결국 재판정을 히틀러의 정치선전의 무대로 제공해 히틀러를 전국구 스타로 키워주고 극우들의 아이콘으로 등극하는 대관식의 무대로 만들어줬다. 사법부는 자신들이 감당해야 할 책임을 회피하고 법의 형식논리 속으로 도피해버렸다.
1923년 가장 민주적인 바이마르 공화국의 재판정 모습은 지금 우리네의 내란 재판의 모습과 묘하게 닮았다. 끝없이 징징거리면서 '침대재판'을 시전하는 내란재판이 히틀러의 폭동재판과 문득 오버랩되는 오늘이다.
[※ 참고: 지난 16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 35부(백대현 부장판사)는 윤석열 전 대통령의 특수공무집행방해,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 등의 혐의 선고 공판에서 징역 5년을 선고했다. 이번 선고는 윤 전 대통령을 둘러싼 비상계엄 4개 재판은 물론 윤 전 대통령이 기소된 7개 재판에서 나온 첫 결과다.
윤 전 대통령의 내란 우두머리 혐의 1심 선고는 2월 19일 예정돼 있다. 조은석 내란 특별검사팀은 13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5부(지귀연 부장판사) 심리로 열린 결심 공판에서 윤 전 대통령의 내란 우두머리 혐의에 사형을 구형했다.]
도전에 제대로 된 응전을 하면 그 문명은 성장(growth)하고 도전에 실패하면 몰락(fall)한다는 것이 토인비의 '도전(challenge)과 응전(response)'의 역사법칙이다. 그러나 그 속을 들여다보면 토인비가 실제로 강조하는 싶었던 핵심은 응전(response)이라는 단어 속에 숨어있다.
'response'라는 말은 '책임(responsibility)'이라는 말의 뿌리이기도 하다. '대응'한다는 곧 책임을 진다는 뜻이 된다. 내외의 도전을 받을 때 구성원 모두가 자기의 책임으로부터 도피하지 않고 각자 자기 자리에서 맡은 바 책임을 다하는 것이 곧 응전이라는 의미다.
1923년 히틀러는 국가전복을 시도했지만 재판부는 그에게 9개월 징역형이란 상징적인 처벌을 내렸다. 역사적 실수였다. [사진 | 영화 다운폴 한 장면] |
하버드대학의 정치학자 스티븐 레비츠키(Steven Levitsky)와 대니얼 지블랫(Daniel Ziblatt)은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How Democracies Die?ㆍ2018년)」에서 자제하지 않는 권한 행사를 민주주의 사망원인으로 꼽는다.
결과에서 기인하는 책임의 무거움을 인식하면 권한 행사를 자제한다. 그러나 대개 민주주의의 사망 원인은 권력자의 자제력 잃은 권력행사보다는 국민들이 자신들의 피조물인 그 권력자가 괴물이 되지 않도록 감시해야 할 책임에 소홀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더 정확할 듯하다.
유권자가 선거를 통해 '피조물'인 정권을 '창조'했으면 피조물인 정권에 책임을 져야 한다. 정권을 결사옹위하는 것이 책임지는 게 아니라 정권을 감시하는 것이 책임이다. 정권 감시의 책임을 다했다면 결사옹위할 필요도 없을 듯하다. 새 정권만이라도 또 다른 괴물의 탄생이 안 되기를 소망한다. 자유처럼 소중한 것은 없지만 책임이 따르지 않는 자유는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괴물이 된다.
김상회 정치학 박사|더스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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