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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때는 말이야” 똑똑했던 김 사원은 왜 꼰대 부장이 됐나

이데일리 김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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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때는 말이야” 똑똑했던 김 사원은 왜 꼰대 부장이 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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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DI '한국 근로자는 왜 나이 들수록 역량 감소하나' 분석
'청년→중년→장년' 인지역량 감소..한국만의 현상
장시간 근로 관행에 자기계발 투자할 시간·여력 부족
연공서열식 임금체계로 성과·역량 보상 미비
배우면 보상받고, 일하며 배울 수 있는 시스템 구축해야
[이데일리 김정민 경제전문기자]이 기사는 최근 한국개발연구원(KDI)이 발표한 보고서 ‘근로자 인지역량의 감소 요인과 개선방안’에 담긴 통계와 분석을 바탕으로, 한 직장인의 커리어 변화를 스토리텔링 방식으로 재구성했다. 왜곡된 노동시장 구조와 보상체계가 어떻게 ‘유능했던 신입’을 ‘꼰대 부장’으로 만들어 가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가상의 인물 ‘김유능’을 설정했다.

챗 GPT로 생성한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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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사 첫날, 김유능 사원은 단연 눈에 띄었다.

보고서는 군더더기 없었고, 숫자에 강했다. 회의에서 핵심을 짚는 질문을 던졌다. 선배들은 “요즘 신입답지 않다”고 입을 모았다. 김유능은 이름 그대로 ‘유능한 신입’이었다.

통계로도 김유능 사원의 역량은 확인할 수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10년 주기로 실시하는 국제성인역량조사(PIAAC)에 따르면, 2011~2012년 진행한 1주기 조사에서 한국의 25~29세 근로자는 수리력(7위)과 언어능력(4위)에서 회원국 중 상위권을 차지했다. 김유능 사원은 이 ‘상위권 세대’의 한가운데 서 있었다.

문제는 시간이 흐르면서 시작됐다.

‘공부할 시간 없는’ 김유능 대리

대리로 승진하자 김유능의 하루는 빡빡해졌다. 야근과 보고, 끝없는 회의가 이어졌다. 퇴근 후 자기계발은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체력의 문제’였다. 김유능 대리가 책을 덮고 TV앞 소파에서 졸고 있는 동안 그의 ‘인지역량’(cognitive skill)은 조금씩 퇴화하고 있었다.

‘인지역량’은 사람이 정보를 이해하고, 판단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필요한 기초적 사고 능력이다. 단순한 지식의 양이 아니라, 변화에 적응하고 다시 배울 수 있는 두뇌의 기본 체력이다.


KDI 보고서 ‘근로자 인지역량의 감소 요인과 개선방안’에 따르면 한국 근로자의 인지역량은 청년기부터 이미 하락세에 접어든다. 20~30대에는 OECD 평균을 웃돌던 수리력과 언어능력이 40대에 이르면 평균 이하로 떨어진다.

특히 25~29세였던 근로자가 40대 초반이 되면 수리력은 평균 14점, 언어능력은 19점 가까이 감소한다. 미국·일본·이탈리아 등 주요 선진국에서는 같은 연령대에서 이런 급격한 하락이 관찰되지 않는다. 한국만의 현상이다.

‘공부할 이유가 없는’ 김유능 과장

과장이 되자 김유능은 더 이상 ‘공부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배워도 달라지는 게 없기 때문이다. 역량이 늘어도 보상은 미미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은 근로자의 수리력 점수가 ‘1 표준편차’만큼 증가할 때 임금은 2.98% 증가하는데 그쳤다. 프랑스(4.99%)나 일본(6.43%), 독일(7.38%), 미국(8.10%)보다 크게 낮다. 분석 대상 27개국 평균(6.13%)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

언어능력을 기준으로 봐도 양상은 비슷하다. 언어능력 점수가 1 표준편차만큼 증가할 때 각국의 근로자가 받는 임금의 증가율은 미국(8.79%), 독일(6.69%), 일본(5.08%), 프랑스(3.51%), 우리나라(3.05%) 순이다. 분석 대상 27개국 평균은 5.31%이다.

보고서는 한국 노동시장의 구조적 문제점으로 연공서열 중심 임금체계를 지목했다.


2025년 6월 기준 ‘사업체노동력조사 부가조사’에 따르면, 국내 사업체 중 기본급 운영체계가 없어 명확한 임금결정 기준이 미비한 사업체의 비중이 63%에 달하는 한편, 근로자의 역량 및 직무능력을 반영할 수 있는 직능급 또는 직무급을 운영하고 있는 사업체는 각각 9.5%, 8.6%에 불과하다.

반면 우리나라 근로자의 근속연수에 따른 임금 증가는 여타 OECD 회원국에 비해 매우 크다. PIAAC 1주기 조사에서 우리나라 근로자의 임금은 근속연수가 1년 증가할 때 2.05%씩 증가했다.

같은 시기 프랑스(0.41%), 미국(0.89%), 일본(1.03%), 독일(1.08%)보다 두 배 이상 높은 수준이다. 분석 대상 OECD 27개국 평균은 0.71%에 그쳤다.

‘김무능’이 된 꼰대 김유능 부장

부장이 된 김유능은 회의 때마다 부하 직원들 앞에서 툭하면 이렇게 말한다.

“나 때는 말이야…”

새로운 시스템에 익숙하지 않고, 변화하는 업무 방식에 불평이 많고, 과거의 성공 경험만 반복해서 꺼내 드는 상사. 김유능은 어느새 ‘꼰대 김부장’이 됐다. 후배들 사이에서 그의 별명은 ‘김무능’이다.

그러나 이같은 퇴화는 개인의 문제만이 아니다.

보고서는 이를 ‘역량의 감가상각’이라고 설명한다. 한국은 이 감가상각 속도가 유독 빠르다. 청년기부터 시작돼 중·장년기에 가속화한다. ‘오래 버틸수록 유리한’ 연공서열식 임금체계 아래서는 새로운 도전보다 실패를 최소화할 수 있는 과거의 방식에 머무르는 게 자연스러운 선택이다.

보고서는 분명히 말한다. 김유능이 김무능이 된 이유는 구조에 있다고. △역량이 보상받지 못하는 임금체계, △연공 중심 승진 구조, △학습할 시간과 공간의 부족. 이런 환경에서 근로자는 공부하고 역량을 끌어올려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한다.

꼰대는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 오히려 한때 유능했던 사람일수록, 성공 경험이 강했던 사람일수록 더 과거에 집착한다.

보고서는 해법도 제시했다. △역량과 성과에 기반한 임금체계, △학습이 실제 보상으로 이어지는 구조, △근로자가 배울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근로환경이다.

김유능 부장은 여전히 근면 성실하다. 다만 이 사회가, 그리고 회사가 그에게 계속 유능해야 할 이유를 주지 않았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