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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사하고, 경조사비 5만원 아끼려다 투명인간됐어요"...돈보다 무서운 관계의 파산 [은퇴자 X의 설계]

파이낸셜뉴스 김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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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사하고, 경조사비 5만원 아끼려다 투명인간됐어요"...돈보다 무서운 관계의 파산 [은퇴자 X의 설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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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함 사라지는 순간, 좁아지는 인간관계]
"연락처 300개인데 벨이 안 울린다"… 50대 고립도 35%
남성이 더 치명적... 가족에 의존하지말고 '동네생활' 늘려야


은퇴하고 처음에는 연락이 곧잘 왔다. 안부를 묻는 직장동료들의 전화가 끊어지는 순간, 혼자 마주하는 식탁이 잦아진다.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면 되겠다고 생각했지만, 그들도 나름의 삶이 바쁘다. 전문가들은 50대에게 아직 회사에 남아 있을 때, '회사밖 인간관계'를 만들어 놓으라고 조언한다. /게티이미지뱅크

은퇴하고 처음에는 연락이 곧잘 왔다. 안부를 묻는 직장동료들의 전화가 끊어지는 순간, 혼자 마주하는 식탁이 잦아진다.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면 되겠다고 생각했지만, 그들도 나름의 삶이 바쁘다. 전문가들은 50대에게 아직 회사에 남아 있을 때, '회사밖 인간관계'를 만들어 놓으라고 조언한다. /게티이미지뱅크


은퇴자 X의 설계

은퇴자 X의 설계


[파이낸셜뉴스] “휴대폰에 연락처는 300개가 넘는데, 막상 전화할 사람은 없다. 계속 좁아지는 느낌이다.”
주된 일자리에서 물러난 50대가 자주 하는 말이다. 회사에 다닐 때는 매일 누군가와 대화했고, 단톡방은 쉴 새 없이 울렸다. 회의가 끝나면 점심을 같이 먹고, 퇴근 뒤엔 술자리가 이어졌다. 인간관계가 ‘내가 노력해서 만드는 것’이라기보다, 그냥 자동으로 굴러가는 시스템처럼 느껴졌던 시기다.

하지만 명함에서 직함이 사라지는 순간, 관계도 같이 얇아진다. 더 무서운 건 이 변화가 서서히 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처음 몇 달은 “고생했다”는 연락도 오고, 송별 모임도 잡힌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달력에서 사람 약속이 빠르게 사라진다. ‘나중에 보자’가 ‘언젠가 보자’로 바뀌고, ‘언젠가’는 대부분 오지 않는다.

‘관계의 절벽’이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이 절벽은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안전망의 문제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숫자가 말하는 현실… ‘고립감’은 감정이 아니라 위험 신호다

인간관계는 흔히 '외로움'같은 감정의 문제로 취급된다. 하지만 통계를 보면, 고립은 감정이 아니라 생활의 안전망 문제다.

사회적 고립도 /그래픽=정기현 기자

사회적 고립도 /그래픽=정기현 기자


국가데이터처에 따르면 지난 2023년 기준으로 우리나라 전체 사회적 고립도는 33.0% 수준이다. 단순히 외롭다는 게 아니라, 세 명 중 한 명은 급할 때 연락할 사람이 없다는 뜻이다. 사회적 고립도는 집안일을 부탁하거나 이야기 상대가 필요한 경우 둘 중 하나라도 도움을 받을 곳이 없는 사람의 비율을 말한다. 쉽게 말해 ‘아플 때 도와줄 사람’이나 ‘우울할 때 말할 사람’이 한 명도 없는 상태를 숫자로 센 것이다.

지난 2019년 27.7%이던 사회적 고립도는 2021년 34.1%로 급등했지만 2023년에는 소폭 하락했다.


나이가 들수록 사회적 고립도는 더 높아진다. 2023년을 기준으로 40대는 30.1% 수준이지만 50대는 35.0%, 60세 이상은 40.7%로 올라간다. 성별로 보면 남성 35.2%가 여성 31.0%보다 높다.

중요한 건 50대가 이 ‘60대 고립’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서 있다는 점이다. 50대는 아직 회사에 다니고, 아직 사람을 많이 만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관계의 상당 부분이 ‘직장이라는 플랫폼’ 위에서만 유지되는 관계인 경우가 많다. 플랫폼이 사라지면 관계도 같이 꺼지는 구조다.

가장 먼저 체감되는 변화, 경조사

관계가 줄어드는 건 연락처 숫자만이 아니다. 은퇴 후 가장 먼저 체감되는 변화는 경조사다.
회사에 있을 때는 청첩장과 부고가 단톡방을 타고 돌았다. 누가 결혼하고 누가 상을 당했는지 자연스럽게 공유됐다. 누군가 빠지면 “왜 안 왔냐”는 말도 들었다. 관계가 ‘정보망’으로 작동하던 시절이다.


그런데 회사를 떠나면 초대장이 먼저 끊긴다. 청첩장을 못 받으면 축의금을 낼 일도 없다. 부고를 늦게 들으면 조문 타이밍을 놓친다. 관계의 문제가 아니라 관계의 ‘입구’ 자체가 닫히는 느낌이다.

하지만 초대장을 받았다고 마냥 반갑지도 않다. 여기서부터 경조사는 ‘관계’가 아니라 ‘정산’처럼 느껴지기 시작한다.

①보내는 사람의 마음: '누구까지 보내야 하지?'
청첩장을 돌릴 때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누구까지 보내야 하지’다. 회사에 있을 땐 단톡방 공지 한 번이면 끝났지만, 퇴직 후에는 주소록이 곧장 선별의 대상이 된다. '오랜만에 연락해서 청첩장 보내면 부담스러워할까' '안 보내면 내가 먼저 관계를 끊는 걸까'가 동시에 떠오른다. 보내는 순간 관계를 확인받는 일이 된다.


②받는 사람의 부담: '얼마를 해야 예의인가'
초대장을 받은 쪽도 편하지 않다. 특히 50대는 ‘돈이 들어가는 만남’이 많아진다. 결혼식, 돌잔치, 장례식, 모임 회비. 예전엔 다 같이 가니까 고민이 없었는데, 이제는 참석 자체가 선택이 되고, 그 선택은 곧 계산이 된다.

서울에 사는 이모씨(56)는 “요즘은 청첩장이 오면 반갑기보다 부담이 먼저 든다”며 “사람을 만나면 돈이 드는 구조가 되다 보니, 아예 관계를 줄이게 된다”고 털어놨다.

③ 피하는 사람의 합리화: '어차피 안 볼 사이잖아'
결국 사람들은 ‘나를 지키기 위해’ 경조사를 피하기 시작한다. 한 번 빠지고, 두 번 빠지고, 그다음부터는 소식을 모르게 된다. 관계는 끊기고, 관계가 끊기니 더 소식을 모른다. 고립은 이렇게 악순환으로 굳어진다.

경조사는 인간관계의 체온계다. 축의금·부의금은 단지 돈이 아니라, 아직 연결돼 있다는 신호다. 그 신호가 끊기는 순간, 50대는 ‘사람이 사라진다’를 가장 현실적으로 체감한다.

50대 남성에게 더 치명적인 이유

같은 은퇴라도 남성에게 타격이 더 크게 오는 이유는 단순하다. 관계의 대부분을 회사가 대신해줬기 때문이다.

회사에서는 ‘업무’라는 주제가 자동으로 대화를 만들었다. ‘직함’이 소개를 대신해줬다. 약속도 회식, 회의, 출장이 알아서 달력에 박혔다.

그런데 은퇴 이후에는 이 세 가지가 한 번에 사라진다. '누구를 만나야 하지?' '무슨 얘기를 해야 하지?', '내가 요즘 뭘 하고 있지?'가 동시에 온다.

특히 회사 안에서만 관계를 형성한 사람의 충격은 더 크다.

서울의 한 제조업체에서 29년을 일한 김모씨(57)는 퇴직 후 3개월 동안 '전화 벨이 안 울리는 공포'를 경험했다고 말한다. “퇴직하고 나서도 동료들이 연락할 줄 알았는데, 처음 한 달만 안부 묻고 끝이더라. 내가 먼저 연락하려니 괜히 민망해서 못하겠고… 그러다 보니 집-헬스장-집만 남았다.”
이런 상태가 길어지면 위험해지는 건 관계만이 아니다. 수면, 식사, 운동 리듬이 무너지고, 마음이 가라앉는다. ‘나는 필요 없는 사람이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 그때부터는 스스로 사람을 피하는 쪽으로 굳어지기 쉽다. 고립은 이렇게 습관이 된다.

'가족이 있잖아'가 답이 아닌 이유

많은 은퇴자들이 '그래도 가족이 있잖아'라고 말한다. 가족은 분명 가장 중요한 관계다. 하지만 가족만 남기는 순간, 관계는 ‘안정’이 아니라 ‘부담’이 될 수 있다.

은퇴 후에는 집에 있는 시간이 늘고, 생활 패턴이 충돌한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는 ‘가사 분담’ ‘생활 리듬’ ‘돈’이 엮이면서 갈등이 커지기 쉽다.

또 자녀와의 관계는 이미 과거와 다르다. 예전처럼 '부모-자녀'가 한 생활권으로 묶이지 않는다. 부모는 바빴다가 시간적인 여유가 생겼지만 자녀가 바빠졌다.

이에 가족 관계를 지키려면, 가족 밖 관계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 정서적 기대가 가족에게만 쏠리지 않는다.

즉, 은퇴 후 관계의 핵심은 '가족으로 돌아간다'가 아니라,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바깥 관계를 설계한다는 쪽에 가깝다.

가족만으로는 버티기 어렵다… 그래서 ‘동네’가 중요해진다

실제 국가데이터처에 따르면 50대 이상의 가족관계 만족도는 전 연령 평균을 밑돈다.

2024년 자료를 기준으로 평균 가족관계 만족도는 63.% 수준이다. 이중 13~19세의 가족관계 만족도는 80.8%, 20대는 73.3%, 30대 72.3%로 평균을 넘어선다. 그러나 50대는 58.1%, 60대 이상의 경우는 55.0%에 불과하다. 특히 전 연령대의 가족관계 만족도는 상승하는 추세지만 50대 이상은 기준선을 크게 밑돌고 있다.

가족관계 만족도 /그래픽=정기현 기자

가족관계 만족도 /그래픽=정기현 기자


반면 50대 이상은 현재 거주하는 시도 지역에 대해 소속감을 크게 갖고 있다. 지난 2023년 수치를 기준으로 전체 연령대의 지역사회 소속감은 72.4% 수준이다. 연령별로는 30대의 경우 64.4%, 40대 70.1% 수준이지만 50대는 74.5%, 60대 이상에서는 77.9%로 상승한다.

가족규모가 축소되고, 기능이 약화됨에 따라 전통적인 가족의 역할들 중 일부는 공동체나 지역사회로 대체되고 있는 것이다.

지역사회 소속감 /그래픽=정기현 기자

지역사회 소속감 /그래픽=정기현 기자


전문가 조언: "관계를 남기는 3가지 행동 기술"

은퇴세대가 급격히 늘어나다보니 좋은 조언은 많다. 문제는 실천이다. 관계는 마음먹는다고 남지 않는다. 일정표에 박아야 남는다.

행동 기술 1. '먼저 연락하라'
퇴직 후 가장 위험한 행동은 ‘누가 연락해주길 기다리는 것’이다. 먼저 손 내미는 것은 자존심을 굽히는 일이 아니라 안전망을 지키는 일이다. '요즘 어때, 얼굴 한번 보자'는 한 문장이 관계를 살린다.

행동 기술 2. '직함이 아닌 기능으로 소개하라'
자기소개에서 '전 OO 부장입니다'를 지워야 한다. 대신 'OO 분야에서 20년 일했고, 요즘은 사진을 배우고 있습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소속이 아닌 기능과 취향을 말할 때 새로운 관계가 유입된다.

행동 기술 3. '정기 약속을 만들어라'
나중에 한번 보자는 관계를 끝내는 문장이다. '매달 둘째 주 목요일 점심'처럼 정기적인 약속을 만들어야 관계에 관성이 생긴다.

연초 점검 질문 3가지

△명함이 없어도 나를 설명할 문장이 있는가(직함 말고 기능).
△이번 달 ‘내가 먼저’ 연락해 만든 약속이 1개라도 있는가.
△회사 사람이 아닌 모임(취미·배움·봉사)이 달력에 고정돼 있는가.

관계는 저절로 남지 않는다. 남길 관계를 선택하고, 일정에 박아두고, 먼저 움직인 사람에게만 남는다.

돈은 계산해서 준비하지만, 사람은 “알아서 남겠지”라고 방치하는 순간 사라진다. 50대는 아직 늦지 않다. 하지만 준비하지 않으면, 은퇴와 동시에 사람은 빠르게 줄어든다. 재테크보다 더 세밀한 '인(人)테크'가 필요하다.

관계는 마음이 아니라 일정표에서 만들어진다. 오늘 달력에 ‘사람 약속’ 하나를 고정하지 못하면, 은퇴 후 달력은 가장 먼저 비어버린다.

'은퇴=퇴장'이라는 낡은 공식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평균수명 83세 시대, X세대가 본격적인 은퇴를 맞이하면서 기존의 은퇴 개념 자체가 재정의되고 있습니다. 그들의 '인생 2막' 이야기를 담은 [은퇴자 X의 설계]가 매주 토요일 아침 독자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기자페이지를 구독하면 편하게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kkskim@fnnews.com 김기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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