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월14일 국민건강보험공단 하청 노동자인 고객센터지부 조합원들이 ‘원청교섭 쟁취! 모든 노동자의 노동기본권 쟁취!\' 신년 결의대회에 참석해 행진하고 있다. 고객센터지부 제공 |
“아무도 못한다던 동희오토에서 이긴다면 그 자체로 큰 의미 아니겠냐, 번듯한 정규직은 아니겠지만 대한민국에서 든든한 금속노조 조합원으로 원청과 마주 앉는다면 가치 있는 삶이 아닐까 생각했어요. 그래서 사무장이랑 둘이 (노란봉투법) 개정되고서 으쌰으쌰 하면서 꿈에 부풀었죠. 그런데 고용노동부 시행령을 보니까 아…. 너무 큰 충격이었어요.”
심인호씨는 기아차의 2차 하청 노동자다. 금속노조 기아차지부 동희오토분회 분회장이다. 한때 조합원 2명에 그쳤던 분회엔 최근 가입자가 200명 가까이 늘었다. ‘노란봉투법’이라 불리는,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사용자 정의가 ‘실질적·구체적으로 근로조건을 지배·결정하는 자’로 확대되자 원청과의 교섭 기대감이 커진 것이다. 한때 회사의 노골적 탄압과 어용노조 위세에 밀려 교섭권을 빼앗기고 고사 직전까지 갔던 분회다. 심씨도 노조 활동으로 해고당해 3년을 싸우고야 복직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버틴 끝에 15년 만에 노조 부흥기를 맞이했다고 생각했다.
겨우 살았는데 다시 벼랑 끝으로
그런데 노동부가 찬물을 끼얹었다. 한 사업장에 노조가 2개 이상일 때 노조끼리 교섭권을 강제 통합하는 ‘창구 단일화’ 제도를 노란봉투법 시행령에 적용했다. 하청 노조가 원청과 마주 앉으려면 원청 노조는 물론 사내의 다른 하청 노조와도 창구를 단일화해야 한다. 노조 간 세력 다툼은 물론, 사용자가 친사 노조를 포섭해 길들일 위험을 초래한다.
비정규직 노조의 반발에 노동부는 2026년 1월까지 입법 예고했던 시행령 초안을 일단 철회했지만, 창구 단일화는 포기하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심씨는 실망을 넘어 분노를 느꼈다. “저희가 기아차와 교섭을 바라는 것도 아니에요. 동희오토(1차 하청)하고라도 교섭하자는 건데 그것마저 안 되면 저희 같은 비정규직 공장은 아예 노조 하지 말라는 거잖아요.”
심인호 금속노조 기아차지부 동희오토분회 분회장이 민주노조 가입을 호소하는 피켓을 들고 조합원들에게 호소하고 있다. 심인호 분회장 제공 |
동희오토 하청 노동자들은 주·야간 10시간 맞교대로 매년 26만 대의 완성차를 만든다. 심씨도 2004년부터 ‘모닝’과 ‘레이’ ‘스토닉’을 만들었다. “말도 안 되는 노동량”이지만 임금은 정규직의 50%도 안 된다. 하청 노조가 인원 충원과 임금 차별 시정을 요구하는 이유다. 그러나 분회는 2005년 설립 이래 한 번도 원청과 교섭하지 못했다. 기아차는커녕 1차 하청인 동희오토조차 교섭을 거부했다. 교섭권을 가진 어용노조와만 대화하겠다는 이유다. 창구 단일화 제도가 유지되는 한 노란봉투법 이후에도 같은 일이 반복될 가능성이 크다.
어용노조 앞세워 하청 노조 무력화
동희오토만의 문제가 아니다. “있을 수 있는 일이냐. 노사관리를 어떻게 해서 이런 결과가 나오느냐.” 제빵기업 ‘파리바게뜨’로 잘 알려진 에스피씨(SPC)그룹의 허영인 회장은 2019년 7월8일 그룹 자회사 ‘피비파트너즈’ 황재복 대표를 강하게 질책했다. 평소 제빵기사 처우 개선에 목소리를 낸 제빵기사 노조(민주노총 파리바게뜨지회)의 임종린 지회장이 노동자 대표로 뽑히자 불쾌감을 드러낸 것이다.
검찰 공소장을 보면 허 회장은 사 쪽에 협조적인 한국노총 노조를 키워 민주노총 노조를 위축시킬 각종 방안을 지시했다고 한다. 신입 채용 때 자동으로 한국노총 노조에 가입하게 하거나 민주노총 노조 조합원에게 승진 불이익을 주는 식이다. 관리자들은 전국의 파리바게뜨 매장을 돌며 ‘민주노총 탈퇴하고 한국노총 가입하라’고 회유했다. 허 회장은 매주 탈퇴 실적을 보고받고 “속도가 늦다”고 질책했다. 그 결과 한국노총 노조가 순식간에 세를 불려 민주노총 노조를 밀어내고 교섭권을 독점했다. 원청이 하청 노조 무력화를 위해 어디까지 영향력을 뻗칠 수 있는지 보여준 사건이다.
“일종의 공식처럼 노조 파괴”
“SPC그룹, 동희오토, 세브란스병원 사례를 쭉 모아보면 일종의 공식이 나와요. 하청 노조를 고립시키기 위해 또 다른 어용노조를 만들고 지원해서 세를 불리는 거죠. 그렇게 번 시간으로 원청은 사용자성을 부정하는 증거를 만들고요. 제가 원청이면 이번 노동부 시행령을 보고 ‘노동부가 우리한테 살길을 열어주는구나’ 생각할 것 같아요.” 이류한승 공공운수노조 서울지부 조직부장의 말이다.
노란봉투법은 그간 일대일 노사관계로 한정했던 교섭 범위를 원·하청 다자 간 교섭으로 넓혔다. 앞서 현대제철 하청 노조 등이 원청과 교섭할 권리를 구한 소송에서도 법원은 그 권리에 따로 제한을 두지 않았다. 그런데 노동부는 이런 취지와 어긋나는 창구 단일화 제도를 시행령에 다시 소환했다. 하청 노조가 원청과 교섭하려면 먼저 원청 정규직 노조나 하청 내 다른 노조와 교섭권을 놓고 싸워야 한다. 법원이 폭넓게 보장한 원청 교섭권이 순식간에 노조끼리 싸워서 얻어내야 할 전리품으로 바뀌었다.
“정규직 노조는 지금도 공단인지 노조인지 헷갈릴 정도로 사 쪽과 입장이 비슷해요. 정식 교섭도 아닌 협의체에서도 그렇게 미온적인데 거기랑 창구 단일화를 하면 저희(하청 노조)는 진짜 끽소리도 못 내고 죽는 거예요. 저희가 직고용 대신 소속기관화(별도기관 고용)를 받아들인 것도 자율적 교섭을 원해서였거든요.” 김금영 국민건강보험공단(건보공단) 고객센터지부장이 말했다.
건보공단은 4대 공단 중 유일하게 콜센터 하청 노동자를 직고용하지 않았다. 이에 반발해 콜센터 노조가 2021년 파업하자 정규직 노조는 이를 돕긴커녕 ‘콜센터 정규직화를 막겠다’고 공약했다. 조합원들은 지하철역에 정규직화 반대 광고물을 걸었고 ‘파업을 계속하면 호전환(콜센터 고객 문의를 공단 직원이 받는 것)을 안 받겠다’며 하청 노조에 으름장을 놨다.
2021년 6월20일 2차 전면파업에 돌입한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국민건강보험 고객센터지부 조합원 50여명이 강원도 원주 국민건강보험공단 사옥 로비에서 연좌시위를 하고 있다. 국민건강보험 고객센터지부 제공 |
이처럼 하청 노조를 방해하는 원청 노조와도 창구 단일화를 해야 할까. 노동부 시행령에 따르면 그렇다. 원청 사업장 단위로 창구 단일화를 진행하되 예외적인 경우만 개별 교섭(교섭 단위 분리)을 허용하고 있어서다. 규모가 작은 하청 노조는 종속을 우려할 수밖에 없다. “ 정규직 노조에 비하면 저희는 구멍가게만큼 작아요. 그 안으로 들어가면 저희 요구가 다 막히겠죠.” 김 지부장이 말했다.
이런 우려에 대해 노동부는 ‘개별 교섭을 최대한 보장하겠다’는 입장이다. 노조끼리 △현격한 근로조건 △고용형태 △단체교섭 관행 △이해관계 차이가 있으면 창구 단일화를 강제하지 않겠다(‘교섭 단위 분리’)고 했다. 노동부는 이미 “원·하청 노조는 교섭 분리한다” “소속된 상급단체가 다르면 교섭 분리한다”는 약속도 했다.
단일화는 혼란 적다? 교섭 거부 빌미일 뿐
그러나 이는 막상 법이 시행되면 공수표가 될 가능성이 크다. 법원이 이제까지 개별 교섭을 구하는 노조의 요청을 극히 예외적으로만 인정했기 때문이다. 서울행정법원은 2 020년 일반직과의 임금·복리후생 차별을 제기한 근로복지공단 콜센터 노조의 개별 교섭 요구를 기각했다. “근무조건의 차이는 공공기관 특성에 기인한 것”이며 “고용형태도 무기계약직이라는 사정만으로 (일반직과) 다르다고 볼 수는 없다”는 이유다. 2023년 교섭 분리를 요구한 중기통합콜센터 하청 노조도 ‘임금 지급 방식이 유사하다’는 이유로 노동위원회 단계에서 기각당했다.
왜 이런 방식을 택했을까. 노동부는 “시행 초기 현장의 혼란을 방지하여 안정된 교섭체계를 이루”(2025년 11월24일자 ‘입법예고’)기 위함이라고 설명한다. 또 “개별 교섭을 하면 원청의 교섭 거부, 소송시 교섭이 장기간 어려워질 우려”(12월1일자 ‘시행령 Q&A’)도 있다고 했다. 즉, 교섭권을 하나로 몰아주는 방식이 개별 교섭보다 혼란이 적고 원청을 교섭 자리로 끌어내기도 유리하다는 설명이다.
2026년 1월6일 ‘비정규직이제그만공동투쟁’이 노동부 시행령 폐기를 요구하는 비정규직 당사자들의 의견서를 서울고용노동청 의자에 올려놓았다. 국민건강보험공단 고객센터지부 등 10개 하청 노조 의견서가 담겼다. 비정규직이제그만공동투쟁 제공 |
그러나 창구 단일화가 존재한 15년 동안에도 원청은 교섭에 응하지 않았다. 오히려 하청 노조를 피하는 관성만 굳어졌다. 한화오션은 조선하청지회가 보낸 4차례 교섭 요구에 여전히 무응답이다. ‘정부의 접근 자체가 달라져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노동부가 가진 기업별 교섭의 상이 너무 뿌리 깊어서 생기는 문제인데요. 우리가 장차 가야 할 길은 원·하청 교섭도 아니고 복수의 원청을 담는 산업별 교섭이에요. 노사가 정말로 마주 앉아 그런 교섭을 할 수 있다면 오히려 파업까지 가지 않고도 이해관계를 조정할 수 있을 텐데, 노동부가 그런 역할을 안 하는 거죠.” 박주영 노동자권리연구소 연구위원이 말했다.
그는 경영계가 주장하는 ‘교섭 무한대 확산’도 지나친 우려라고 본다. “2011년 복수노조 시행 전에도 다 개별 교섭했고요. 노조도 교섭 영향력을 높이려면 서로 단위나 의제를 통합하는 게 더 유리해요. 오히려 교섭을 회피하려는 사업장이 3개, 4개씩 유령노조를 양산하죠.”
2026년 1월15일 충남 세종 한국GM세종물류센터 수출 출하장에서 해고당한 지엠부품물류지회 조합원들과 금속노조 조합원들이 ‘원청 교섭권 쟁취’를 외치며 결의대회를 하고 있다. 지엠부품물류지회 제공 |
신하나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노동위원장도 “노동부가 창구 단일화를 강제할 게 아니라 현장에서 다양한 교섭 사례를 축적하도록 도와야 한다”고 본다. “법 시행 초기에 혼선은 불가피하겠지만 각 산업·업종·사업장 특성에 맞는 자율적 교섭 모델을 유형화하고 모범 사례를 선제적으로 창출해야죠. 유럽처럼 원·하청 교섭을 초기업 교섭 전환으로 이끌어내는 것도 가능할 테고요. 그러고도 교섭을 거부하는 원청엔 신속하고 강력한 대응도 모색해야겠죠. 산업안전 의제 등 하나라도 실질적 지배력이 확인되면 원청 사용자로 간주하고 쟁의 조정 절차를 적극 진행해야죠.”
노동부에 정리해고는 그저 남 일
교섭을 이끌어낼 노동부의 역량은 이미 시험대에 올랐다. 한국지엠(GM)은 2025년 11월28일 세종물류센터 하청 노동자 120명이 소속된 하청업체와 돌연 계약을 해지했다. 4개월 전 물류센터에 노조가 설립되자 이들이 소속된 하청을 내보낸 것이다. 해당 업체는 약 한 달 뒤인 12월31일 조합원들에게 해고를 최종 통보했다. 상황을 바꿀 말미가 한 달가량 있었으나 노동부는 면담 외에 별다른 행정력을 발휘하지 않았다.
“11월 업체 변경 직후 노동청을 찾아갔는데 ‘사적 계약이라 개입하기 힘들다’며 무성의한 태도로 일관했어요. 노조에 대한 보복성 해고가 명백한데도요. 해고된 뒤에도 ‘물리적 충돌이 없게 해달라’며 사태 해결보다 정권에 갈 부담을 더 신경 쓰더라고요. 특별근로감독은 아직도 안 했어요. 저는 지엠이 해고를 감행할 때 그런 분위기를 고려했다고 봐요. 노동부가 이렇게 나오는데 어느 원청이 하청 노조와 교섭할까요?” 최현욱 지엠부품물류지회 사무장이 말했다.
신다은 기자 down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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