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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사피엔스’에서 ‘호모 프롬프트쿠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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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사피엔스’에서 ‘호모 프롬프트쿠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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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 시대는 인간을 정의하는 기준도 흔든다. 생각하는 인간 ‘호모 사피엔스’는 이제 질문을 설계하는 인간 ‘호모 프롬프트쿠스’로 변신하고 있다. 픽사베이

인공지능 시대는 인간을 정의하는 기준도 흔든다. 생각하는 인간 ‘호모 사피엔스’는 이제 질문을 설계하는 인간 ‘호모 프롬프트쿠스’로 변신하고 있다. 픽사베이


카페에 앉자마자 우리는 메뉴보다 먼저 콘센트를 찾는다.



노트북을 펼치기 전, 스마트폰을 내려놓기 전, 시선은 자연스럽게 벽면을 훑는다. 전력이 확보되는지가 이제 하루의 가능성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인류는 자신을 이해하고 규정하기 위해 끊임없이 새로운 이름을 부여해 왔다.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는 사유하는 인간, 호모 파베르(homo faber)는 도구를 제작하는 인간, 호모 루덴스(homo ludens)는 놀이를 통해 세계를 해석하는 인간을 의미한다. AI 시대에 접어든 지금, 인간을 정의하는 기준 역시 새로운 전환점에 놓여 있다. 이 변화에 대응해 제시되는 개념이 호모 프롬프트쿠스(homo prompticus)이며, 이는 질문을 설계하는 인간을 가리킨다.



여기서 프롬프트(prompt)는 AI에 명령어를 입력하는 기술적 행위를 넘어선다. 그것은 AI라는 거대한 물질·에너지·연산 인프라 속에 잠재된 지능을 호출하고 방향을 부여하는 행위다.




챗GPT에 “오늘 날씨를 알려줘”라고 입력하는 순간, 우리는 하나의 그래픽처리장치(GPU)만을 작동시키는 것이 아니라, 연산의 흐름을 총괄하는 중앙처리장치(CPU)와 연산 결과를 임시로 저장하고 불러오는 메모리 반도체(HBM·DRAM)를 동시에 가동하는 복합적 호출을 실행한다. 이 세 가지 핵심 반도체의 동시 작동은 데이터센터의 전력 소비와 냉각 시스템을 움직이고, 더 나아가 화석연료·원자력·재생에너지로 이어지는 에너지 생산 체계와 직결된 연쇄반응을 촉발한다. 결국 짧은 질문 한 줄은 GPU·CPU·메모리로 구성된 반도체 삼각 축을 흔들며, 무거운 물질세계 전체를 작동시키는 출발점이 된다.



AI는 스스로 완결된 지능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질문을 통해서만 활성화되는 잠재적 지능이다. 호모 프롬프트쿠스란, 이러한 잠재성을 질문이라는 열쇠로 열어 사용하는 존재를 뜻한다. 이는 단순히 궁금증을 던지는 호모 인터로간스(homo interrogans)나 탐구를 지속하는 호모 퀘렌스(homo quaerens)를 넘어, AI가 이해할 수 있는 맥락과 구조를 사전에 설계하는 전문적 질문자의 위상을 포함한다.



AI의 일상화는 인간의 역할을 근본적으로 재편한다. 인간은 더 이상 기억과 계산의 주체로 남아 있을 필요가 없게 되었다. 대신 인간은 무엇을, 어떤 방식으로 질문할 것인가를 선택하는 존재로 이동한다. 이 변화는 편의성의 증대가 아니라 인식 구조 자체의 이동이다. 답을 만들어내던 인간은 질문을 설계하는 인간으로 전환되고, 인간의 고유성은 지식의 축적량이 아니라 질문의 질과 방향성으로 규정되기 시작한다. 호모 프롬프트쿠스는 지식을 소유하는 존재가 아니라, 질문이라는 매개 장치를 통해 지능을 호출하고 운용하는 존재다. AI 시대의 인간성은 더 많이 아는 능력이 아니라, 어떤 질문으로 세계를 열어젖히는가에 의해 재정의되고 있다.



디지털 노마드와 달리, 콘센트 유목민은 전기라는 고정된 기반 시설에 결박된 채 이동하는 생존형 존재다. 픽사베이

디지털 노마드와 달리, 콘센트 유목민은 전기라는 고정된 기반 시설에 결박된 채 이동하는 생존형 존재다. 픽사베이




콘센트 유목민, 전력을 찾아 떠돈다







스마트폰 배터리가 20% 아래로 떨어지는 순간, 우리는 무의식적인 불안 상태에 들어간다. 카페에 들어서면 좌석의 안락함보다 먼저 콘센트의 위치를 탐색한다. 공항, 도서관, 기차역에서 사람들이 벽을 따라 앉아 있는 이유도 명확하다. 그곳에 전력을 공급하는 접속 지점, 즉 콘센트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제 콘센트 유목민(outlet nomads)이 되었다. 이 개념은 디지털 노마드(digital nomad)와 연결되지만, 더 근본적인 물질 조건을 드러내는 개념이다. 디지털 노마드가 인터넷과 노트북만 있으면 어디서든 일할 수 있는 장소의 자유를 상징한다면, 콘센트 유목민은 그러한 자유가 전력 인프라에 의해 엄격하게 조건지어져 있음을 폭로한다. 낭만적 이동자로 그려졌던 디지털 노마드와 달리, 콘센트 유목민은 전기라는 고정된 기반 시설에 결박된 채 이동하는 생존형 존재다. 우리는 장소에서는 자유로워졌지만, 전력에서는 여전히 구속된 상태에 놓여 있다.



인지과학자 앤디 클라크(Andy Clark)와 데이비드 찰머스(David Chalmers)가 제시한 ‘확장된 마음’(extended mind) 개념은 이 상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이 개념에 따르면 인간의 인지는 두뇌 내부에만 머무르지 않고, 스마트폰·태블릿·컴퓨터와 같은 외부 도구까지 포함하여 신체와 환경으로 확장된다. 우리가 외부 도구를 신뢰하며 반복적으로 사용할 때, 그 도구는 단순한 보조 수단이 아니라 인지 과정의 필수 구성 요소가 된다.



리튬 기반 배터리 기술의 정착은 이러한 확장된 마음을 현실의 일상 조건으로 만들었다. 스마트폰과 노트북은 이제 단순한 기기가 아니라 외부 기억장치이자 확장된 뇌의 일부로 기능한다. 그러나 이 확장된 마음은 리튬이라는 물질이 전기를 저장하고 공급하는 동안에만 유지된다. 배터리가 방전되는 순간, 우리의 인지 능력 역시 급격히 위축된다. 카페나 코워킹 스페이스에서 벽면의 콘센트를 먼저 확인하는 장면은 현대판 오아시스를 찾는 유목 생활과 다르지 않다. 이는 인간이 본래부터 도구와 결합해 살아온 타고난 사이보그적 존재임을 보여주는 일상적 증거다. AI라는 비물질적 지능을 활용하기 위해 우리는 역설적으로 전선과 콘센트라는 지극히 물리적이고 고정된 지점에 신체를 접속해야 한다.



이동은 가능하지만, 그 자유는 언제나 전력이 공급되는 조건 아래에서만 성립하는 제한된 자유다. Berke Citak/ Unsplash

이동은 가능하지만, 그 자유는 언제나 전력이 공급되는 조건 아래에서만 성립하는 제한된 자유다. Berke Citak/ Unsplash




오늘날의 이데아는 ‘지속적 연결성’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의 이데아론에서 이데아란 감각적으로 보이는 사물들 이전에 존재하는 완전하고 변하지 않는 본질을 뜻한다. 우리가 현실에서 경험하는 대상과 현상은 모두 이 이데아가 물질세계에서 불완전하게 모방된 그림자에 가깝다. 이러한 플라톤적 관점에서 볼 때, 콘센트 유목민 현상은 ‘지속적 연결성’이라는 이데아가 감각 세계에서 물질적 제약과 충돌하며 드러난 불완전한 구현이다. 이는 단순히 인터넷 접속을 유지하려는 기술적 필요가 아니라,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항상 응답할 수 있고 언제든 호출될 수 있는 상태로 남아 있으려는 존재론적 욕망을 반영한다. 콘센트 유목민은 이와 같은 추상적 이데아가 물질세계에서 가장 직접적으로 형상화된 인간형이라 할 수 있다.



벽면의 콘센트와 충전 케이블, 보조 배터리는 지속적 연결성이라는 이데아가 일상에 남긴 감각적 흔적이다. 이 관점에서 콘센트 유목민은 자유로운 이동성의 상징이라기보다, 연결을 유지하려는 강박이 물질로 응결된 존재로 해석된다. 이동은 가능하지만, 그 자유는 언제나 전력이 공급되는 조건 아래에서만 성립하는 제한된 자유다.



2010년대에 확산한 디지털 노마드 담론은 장소로부터의 해방을 핵심 이상으로 내세웠다. 노트북과 네트워크만 있으면 어디서든 일할 수 있다는 이 상상은 공간적 구속을 약화하는 데는 성공했다. 그러나 2020년대에 들어서며 그 담론의 이면이 분명해졌다. 우리는 장소에서는 유목민적 존재가 되었지만, 전력이라는 새로운 기반 조건에는 이전보다 더 깊이 의존하게 되었다.



카페에서 벌어지는 콘센트 좌석 쟁탈전, 공항 충전 스테이션 앞의 상시적인 대기 행렬, 보조 배터리 대여 서비스의 일상화는 이러한 전환을 보여주는 구체적 장면들이다. 이동의 자유는 확장되었지만, 그 자유는 배터리 잔량과 충전 가능성에 의해 끊임없이 관리되고 조정된다.



이 현상은 밈처럼 짧은 시간 확산했다가 사라지는 문화적 파동과는 성격이 다르다. 밈이 디지털 환경에서 모방과 확산을 통해 빠르게 소비되고 소멸하는 상징이나 행동의 단위라면, 콘센트 유목민 현상은 전력 인프라에 대한 의존이 일상 깊숙이 스며들며 구조적 조건으로 굳어지고 있다.



지하철 역사와 공공시설에 휴대기기 충전을 보조하는 설비가 상시로 설치되고, 공항과 대형 시설 전반에 충전할 수 있는 좌석이 기본 인프라처럼 확산하는 흐름은 이를 분명히 보여준다. 더 나아가 일부 카페와 작업 공간에서는 콘센트 유무가 좌석 선호를 좌우하는 핵심 요소로 작동하며, 공간 배치와 운영 방식 자체를 변화시키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콘센트 유목민이 단순한 생활 습관을 넘어, 도시 공간과 일상 설계의 전제를 재편하는 중요한 변수로 자리 잡았음을 시사한다.



잠들기 전 침대 옆 콘센트에 케이블을 꽂는 행위는 이제 하루를 마무리하는 자연스러운 생활 습관이 되었다. 픽사베이

잠들기 전 침대 옆 콘센트에 케이블을 꽂는 행위는 이제 하루를 마무리하는 자연스러운 생활 습관이 되었다. 픽사베이




충전, 인류의 새로운 생활 의례가 되다







인류학에서 의례(ritual)는 사회적 의미가 부여된 반복 행위를 뜻한다. 식사, 기도, 장례식은 모두 공동체가 공유하는 의례다. 그렇다면 21세기 인류에게 가장 보편적이면서도 비의식적으로 수행되는 의례는 충전이다.



우리는 하루에 최소 한 번, 많게는 서너 번 스마트폰을 충전한다. 잠들기 전 침대 옆 콘센트에 케이블을 꽂는 행위는 이제 하루를 마무리하는 자연스러운 생활 습관이 되었다. 충전 중 화면에 표시되는 배터리 아이콘은 에너지가 회복되고 있음을 알려주는 생명 신호처럼 작동한다. 충전이 완료되면 우리는 안정과 준비 상태에 들어간다. 다음 하루를 감당할 수 있는 조건이 복원되었기 때문이다.



이 의례의 핵심은 유한성과 의존성에 대한 반복적 확인에 있다. 우리는 디지털 기술이 제공하는 무한한 연결성과 즉각적 응답성에 익숙해졌지만, 동시에 그 모든 기능이 물질적 한계 위에 놓여 있음을 매일 경험한다. 배터리는 소모되고, 충전은 필수가 되며, 전력망은 중단 없이 유지되어야 하는 보이지 않는 전제 조건으로 자리 잡았다.



충전은 또한 불평등을 가시화하는 지표다. 선진국의 도시에서는 공공장소마다 충전 포트가 설치되어 있지만, 개발도상국의 외곽 지역에서는 전력 공급 자체가 불안정하다. 콘센트에 접근할 수 있는 능력의 차이는 곧 디지털 접근성의 차이로 이어진다. 이 맥락에서 ‘충전권’은 편의가 아니라 생존 조건에 가깝다. 더 나아가 충전은 지속가능성의 문제와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리튬 배터리 생산을 위해 칠레, 볼리비아, 아르헨티나의 염호에서는 대규모 리튬 채굴이 일상화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지역 생태계는 훼손되고, 원주민 공동체는 만성적인 물 부족에 직면한다. 우리가 매일 밤 아무 의식 없이 반복하는 충전이라는 행위 뒤에는, 지구 반대편에서 누적되는 환경적·사회적 비용이 함께 작동하고 있다.



호모 프롬프트쿠스는 질문을 잘하는 인간이 아니라, 자신의 질문이 어떤 세계를 호출하는지 성찰하는 인간이다. 픽사베이

호모 프롬프트쿠스는 질문을 잘하는 인간이 아니라, 자신의 질문이 어떤 세계를 호출하는지 성찰하는 인간이다. 픽사베이




더 나은 질문이 세계를 바꾼다







호모 프롬프트쿠스로서 인간은 새로운 윤리적 국면에 들어섰다. 질문할 자유는 보편화되었지만, 그 질문이 무엇을 작동시키고 무엇을 소모하는지 인식하는 일은 책임의 영역이 되었다.



충전은 단순한 기술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물질·에너지·환경과 맺는 관계를 드러내는 인류학적 순간이다. 우리는 케이블과 배터리, 데이터센터와 발전소, 광산과 냉각수로 이루어진 네트워크 속에 깊이 얽혀 있다.



이제 질문은 남는다. 더 많은 질문이 아니라, 덜 파괴적인 질문을 선택할 수 있는가.



AI 인류학은 질문의 표면 아래로 내려가, 기술의 편리함 뒤에 숨겨진 물질의 무게와 그 비용을 가시화한다. 이 관점에서 호모 프롬프트쿠스는 질문을 잘하는 인간이 아니라, 자신의 질문이 어떤 세계를 호출하는지 성찰하는 인간이다. 더 나은 질문을 설계하는 일은, 더 나은 세계를 선택하는 윤리적 실천이 된다.





손현주/전주대 창업경영금융학과 교수(미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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