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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이우 루시에 뿌리를 둔 ‘러시아 민족’이라는 신화 [.t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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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이우 루시에 뿌리를 둔 ‘러시아 민족’이라는 신화 [.t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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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수도 모스크바 한복판에 10세기 말 키이우(키예프) 루시 공국을 통치했던 블라디미르 대공의 거대한 동상이 서 있다. 글항아리 제공

러시아 수도 모스크바 한복판에 10세기 말 키이우(키예프) 루시 공국을 통치했던 블라디미르 대공의 거대한 동상이 서 있다. 글항아리 제공


2022년 2월21일(현지시각),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대국민 담화를 발표했다. 장황한 연설은 불길한 암시를 품고 있었다. “우크라이나는 우리에게 단순히 이웃 국가가 아니라 러시아의 역사와 문화, 정신세계와 분리될 수 없는 일부다.” 불과 사흘 뒤, 푸틴은 우크라이나를 전격으로 침공하는 “특별군사작전”을 감행했다. 금방 끝날 줄 알았던 푸틴의 전쟁은 4년이 다 되도록 지속하고 있다.



지난해 6월 푸틴은 자국이 주도하는 국제경제포럼(SPIEF)에서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은 한 민족이며, 그런 의미에서 우크라이나 전체가 우리 것”이라고까지 주장했다. 그동안 푸틴의 ‘러시아-우크라이나 동질성’ 주장은 수도 없이 되풀이됐다. 푸틴이 “역사적 사실”이라고 말하는 근거는 뭘까? 어디까지가 진실 혹은 거짓일까?



우크라이나 출신 동슬라브 역사 전문가 세르히 플로히의 ‘로스트 킹덤’은 15세기 후반 모스크바 공국이 키이우 공국(현 우크라이나)과 벨라루스(백러시아)를 통합한 때부터 1917년 러시아 혁명과 옛소련 시절, 1991년 소비에트 연방 해체 이후 오늘날까지 러시아 민족주의와 제국주의 역사를 재구성하고 그 배경과 전망을 분석한 책이다. 베네딕트 앤더슨이 주저 ‘상상된 공동체’(1983)에서 서구의 민족 개념은 18세기에 발명된 허구라고 설명했는데, 이에 관한 적실한 사례를 보여주는 책이기도 하다.



로스트 킹덤 l 세르히 플로히 지음, 허승철 옮김, 글항아리, 3만원

로스트 킹덤 l 세르히 플로히 지음, 허승철 옮김, 글항아리, 3만원


플로히는 냉전 시기인 1953년 옛 소련에서 우크라이나 혈통의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1990년 키이우 국립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이듬해 소비에트연방이 무너지자 캐나다로 이주한 뒤, 2007년부터 미국 하버드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최근 몇년 새 한국에도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글항아리·2024), ‘유럽의 문 우크라이나’(한길사·2022), ‘핵전쟁 위기’(삼인·2022), ‘체르노빌 히스토리(책과함께·2021)’, ‘얄타: 8일간의 외교 전쟁’(역사비평사·2020) 등 5권의 저서가 번역돼 나왔다. 그중 네 권에 이어 이번 책도 번역한 허승철 고려대 명예교수는 우크라이나 주재 한국대사(2006~2008)를 역임한 슬라브학 전문가다.



러시아는 어디에서 시작해 어디에서 끝나는가, 러시아 국민을 이루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라는 질문은 오랫동안 러시아 사상가들을 사로잡았다. 이런 고민은 1991년 소련 몰락으로 커다란 ‘러시아 문제’로 바뀌었고, 곧 세계적 문제가 되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질긴 악연은 러시아 엘리트들이 자국과 동슬라브족 이웃 국가들을 공동의 역사·문화적 공간, 나아가 같은 민족으로 간주해 온 데서 비롯한다.



플로히는 인상적인 장면으로 책을 연다. 2016년 11월, 러시아 수도 모스크바 크렘린의 한복판에 높이 18m의 거대한 동상이 제막됐다. 한 손에 십자가, 다른 한 손엔 검을 들고 선 동상의 주인공은 블라디미르 대공. 10세기 말에서 11세기 초 동슬라브족 중심의 공국 연합체인 키이우 루시(키예프 루스)의 최고 통치자였다. 오늘날 러시아의 모태가 된 모스크바 공국은 그보다 한 세기가 늦은 1147년 키이우 루시의 대공인 유리 돌고르키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진다.



15~16세기 모스크바 공국은 몽골 제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급속히 세력을 확장했다. 글항아리 제공

15~16세기 모스크바 공국은 몽골 제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급속히 세력을 확장했다. 글항아리 제공


푸틴은 동상 제막 연설에서 블라디미르 대공이 “러시아 영토를 넓히고 지킨 자”라며 “동등한 여러 민족, 언어, 문화, 종교로 이뤄진 하나의 위대한 가족 연합”을 이뤘다고 칭송했다. 그는 대공이 채택한 기독교(동방정교회)가 “러시아·벨라루스·우크라이나 국민이 공유하는 영적 원천이 됐다”고도 했다. 이 동상은 현대 러시아의 역사적 정체성에서 키이우 루시가 차지하는 중요성을 보여준다.



앞서 1472년, 모스크바 공국의 대공 이반 3세는 20년 전 오스만 제국에 멸망한 동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의 조카딸 소피아를 두번째 아내로 맞았다. 모스크바 공국이 로마 제국의 적통을 잇는다는 상징성은 키이우 루시 영토 전체에 대한 권리 의식으로 이어졌다. 그렇게 러시아 제국의 씨앗이 싹텄다. 모스크바 공국이 몽골 속국(킵차크 칸국)에서 독립해 제국으로 발전하는 동안 국가 이념의 초석이 된 것은 ‘키이우 루시’ 기원 신화였다. 왕조는 제국 통치의 정통성을 키이우 루시의 뿌리에서 찾았지만, 점차 스스로 건국 신화의 일부로, 나아가 허구에 기댄 역사적 사실의 담지자가 되어 갔다.



키이우 루시 유산에 대한 러시아 엘리트들의 소유권 주장은 근대의 시작과 함께 왕조와 종교적 개념에서 인종·민족적 개념으로 발전했다. 지은이는 “러시아 제국이 18세기에 ‘민족’이란 아이디어를 수용하면서, 오늘날 러시아인·우크라이나인·벨라루스인과 정치·문화적으로 러시아화한 비슬라브족 출신 엘리트를 포괄하는 ‘러시아 민족 정체성 모델’을 만들어냈다”고 본다. 대러시아(러시아)-소러시아(우크라이나)-백러시아(벨라루스)가 주축인 “삼분적 러시아 민족”의 탄생이다.



발명된 ‘러시아 민족’은 이후 지배 엘리트의 이념이나 정치적 상황에 따라 롤러코스터를 탔다. 우크라이나인이 최대 피해자였다. 1917년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은 러시아인·우크라이나인·벨라루스인에게 별개의 민족이라는 지위를 부여했다. 1930년대 초 스탈린은 소비에트 연방에 편입된 우크라이나의 독립 열망을 ‘홀로도모르(대기근 학살)’를 통해 처참하게 짓밟았다.



지난해 12월29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군부 최고 지휘관들과 우크라이나에서 벌이고 있는 ‘특별군사작전’에 대한 상황 점검 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AFP 연합뉴스

지난해 12월29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군부 최고 지휘관들과 우크라이나에서 벌이고 있는 ‘특별군사작전’에 대한 상황 점검 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AFP 연합뉴스


1954년 흐루쇼프가 이끄는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재통합을 추진했다. 당시 소련 역사학자들은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이 한 민족의 지파가 아니라 별개의 민족이라고 주장했지만 묵살됐다. 과거 러시아제국의 차르(황제)들이 새로운 영토를 획득하면서 의도치 않게 “러시아계와 비러시아계 노동계급의 유대를 강화”했다는 기발한 계급 담론이 ‘사회주의 연방에서 러시아 제국주의의 재등장’이라는 모순을 해결하고 정당화했다. 1991년 소련 붕괴 후 옐친은 연방 내 비러시아 공화국들의 독립을 용인했으나, 푸틴은 이를 ‘지정학적 재앙’으로 규정하며 ‘포스트 소비에트’ 러시아 제국의 부활을 꿈꾼다. 2014년 우크라이나령 크림반도 합병과 2022년 우크라이나 전면 침공은 그 폭력적 실현의 사례다.



지은이는 “러시아 민족의 미래와 이웃들과의 관계는 중세 키이우 국가의 상상적인 동슬라브 단일성이라는 ‘잃어버린 낙원’(‘로스트 킹덤’이란 책 제목이 여기서 나왔다)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러시아연방의 국경 안에서 근대적 시민 국가를 형성하는 데 있다”고 말한다. 과거 영 제국의 중심부(영국 본국)나 독일 같은 근대 민족국가도 자국 밖의 영어권·독일어권 국가와 고립 지역의 독립을 인정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기다리고 있는 것은 새로운 냉전 혹은 이보다 더 끔찍한 상황일지도 모른다”는 지은이의 경고는, 책을 다 읽고 난 뒤라면 섣부른 엄포로만 들리지 않는다. 책(원저)이 나온 지 5년 뒤, 러시아는 실제로 우크라이나를 전면 침공하면서 ‘신냉전’이 언제든 무력 충돌의 ‘열전’로 격화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



조일준 선임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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