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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칼럼] 철학이 버림받은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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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칼럼] 철학이 버림받은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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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은 마음이 몹시 아팠다.

책을 괜히 손에 든 게 화근이었다.

알랭 바디우의 <들뢰즈, 존재의 함성>.

사놓은 건 2천년인 거 같다.

그때 조금 읽다가 말았다.

그 시절 나는 대우증권 국제금융부에서 CB, BW를 주물럭거리다가 IMF로 수요가 줄어들어 지점으로 밀려나 수익증권을 팔며 이곳저곳 돌아다녔다.


떠돌이 외판원 같아서 시간이 남아 <철학아카데미> 문을 두드렸다.

이정우, 조광제 두 분 거리의 철학자들이 인사동에 그 열린 철학 학교를 세운 것도 그즈음이었다.

신문을 보다가 우연히 발견해 그날 찾아가 가입하고 2년 정도 다녔다.


들뢰즈, 푸코, 알랭 바디우, 메를로 퐁티, 화이트헤드를 들으며 그들의 책도 어느 정도 읽으며 즐거웠던 시간이었다.

건조하고 황폐한 증권시장에 질리고 경제 재앙이 컸던 시절이었고 철학적 갈증이 깊었기에 들뢰즈의 재앙, 사건 같은 철학이 몸으로 흡수됐다.

그때 구입한 책 중 하나인 알랭 바디우의 <들뢰즈, 존재의 함성>을 어젯밤 읽어나가다가 바디우 이 사람 들뢰즈를 자기 잣대로 심하게 해석하는 거 아냐? 생각이 들었다.


알랭 바디우는 그 책에서 들뢰즈의 차이, 다양성을 일자로 구겨놓고 있었다.

책을 덮고 들뢰즈의 반격이 궁금해 들뢰즈를 검색했더니 저 책이 나오기 전에 죽었다.

저 책은 1997년에 출간됐고 들뢰즈는 그 2년 전인 1995년에 사망했다.

나의 올해 계획 중 하나는 그간 읽지 않거나 해석서를 통해 대강 알던 중요한 책들을 원본으로 읽는 것이었다.

칸트의 <순수 이성 비판>.

젊었을 때 읽다가 어려워 중단했고 해석서나 다른 책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책 중 하나이다.

칸트가 서양철학사에 중요한 변곡점 중 하나이기에 그를 직접 만나고 싶어서 읽어나가는 중이었다.

<순수 이성 비판>을 읽으며 느낀 것은 내용도 내용이지만 모종의 아우라 상실 즉 권위의 상실이었다.

누군가의 해석이나 상상으로 볼 땐 알게 모르게 권위가 달라붙는다.

원전을 읽는 맛과 의미는 그런 껍질에서 해방되어 날것과 날것의 만남이다.

어설픔, 불완벽 등이 있는 것들끼리 주관적 솔직이 드러난다.

위대하게만 보였거나 도저히 닿을 수 없는 차원 같은 것이 상대화되는 기분이 있었고 어떤 부분은 비판 거리도 보였다.

그 아우라 및 권위의 상실이 알랭 바디우에게도 느껴졌다.

물론 그 두 철학자는 훌륭하다.

둘 다 서양철학사나 당대의 시대 문제를 겨냥해 지대한 공을 세웠다.

알랭 바디우에게 독특한 해석인 동시에 자기 강화가 느껴져 기분 좋은 동시에 씁쓸해졌다.

들뢰즈, 알랭 바디우 외에 잘 모르는 랑시에르 등을 검색하다가 지금 서구 사회를 떠올렸다.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재정적자로 엉망이 되어 있다.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의 장기화로 인해 에너지, 안보 문제가 크고 난민 문제가 골머리를 썩이며 극우 포퓰리즘이 극성이다.

저출산 고령화로 성장은 멈추고 복지 등 과다 공급에 따른 문제, 세금 저항, 경제 불안에 따른 시위 등 문제가 심각하다.

그러다가 철학의 종말, 그 말을 현실에 비춰보았다.

종말이니 종언이니 하는 말이 떠도는 것은 그만큼 문명의 위기가 깊다는 뜻이다.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오래 전에 <역사의 종언>에서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체제는 더 이상의 대안이 없는 마지막이라고 말했지만 그 후 세계는 어떻게 변했는가.

위에서 약술했듯 지금 미 서구를 보더라도 생각을 달리 하게 된다.

철학의 종말.

그 말이 슬펐다.

아파져 왔다.

포스트모더니즘 철학만 해도 다양하며 약점도 있지만 서양철학사건 현대 유럽 사회에 비춰도 훌륭하다.

정확한 메스, 저울, 탈출구, 새로운 요리법 등 적용 효과가 크다.

그 놀라운 시도, 몸부림, 성과, 찬란한 학문의 빛에도 불구하고 서양 사회, 서양 문명은 거칠게 말하면 주로 돈과 피상성, 물질에 팔리다 보니 저 모양 저 꼴이 됐다.

철학은 뿌리내리지 못해 죽어 유령이 됐고 사회는 좋은 처방을 거부하고 안 좋은 음식 포식하다가 실제, 존재, 영혼, 마음에 이어 물질마저 상실해 허덕이고 있다.

철학이 버림받은 시대에 철학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명훈 소설가 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