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골공원 원각사무료급식소서 점심 봉사
노숙인·저소득 노인 300명에 따뜻한 한끼
김치 한술·계란장 배식 임무…양 조절 중요
2시간반간 숨돌릴 틈없어…귀가해서야 배고파
노숙인·저소득 노인 300명에 따뜻한 한끼
김치 한술·계란장 배식 임무…양 조절 중요
2시간반간 숨돌릴 틈없어…귀가해서야 배고파
김치와 계란장 담기 |
(서울=연합뉴스) 이진주 인턴기자 = 멸치 대가리를 땄다.
중멸치를 손질하며 막중한 책임감을 느낀 건 처음이었다.
어린 시절 할머니 옆에서 재미 삼아 했던 멸치 손질이 아니었다. 노숙인과 저소득 노인 300명의 한 끼 식사에 들어간다고 생각하니 신중해졌다.
비릿한 멸치 냄새를 맡으며 멸치 몸통과 대가리를 헷갈려 담지 않도록 집중했다.
그렇게 10여분이 지났을까. 다른 봉사자 2명과 함께 손을 맞추니 식탁에 수북이 쌓여 있던 손질 전 멸치가 어느새 바닥을 보였다.
지난 13일 탑골공원 원각사무료급식소 봉사는 이렇게 시작했다.
멸치 손질 |
강추위에 서울 시내버스 파업이 겹친 이날 오전 10시30분 종로3가 원각사 무료급식소에 도착하자 관리인들이 꽁꽁 언 빙판을 깨고 치우고 있었다.
급식소 건물 안에 들어가 앞치마를 맨 후 손을 씻었다. 인사를 나눌 새도 없이 멸치 손질 임무가 주어졌다.
식탁에 신문지를 빈틈없이 펼친 후 멸치 한 박스를 와르르 쏟았다. 자리에 앉아 멸치 몸통과 대가리를 구분해 각각 다른 봉지에 담았다. 다음 날 점심에 쓰일 멸치였다.
이날 봉사자들은 주로 40~60대였고, 30대 3명에 20대는 기자가 유일했다.
멸치 손질을 끝내고 후식으로 제공될 귤과 쿠키 상자를 바깥으로 옮겼다. 15㎏짜리 귤 상자를 들어 옮기자 어르신들이 "번쩍번쩍 잘 드네"라며 칭찬을 해주셨다. 별일도 아닌데 칭찬에 힘이 났다.
후식으로 나갈 귤 박스 옮기기 |
1993년부터 쉬는 날 없이 노숙인과 저소득 노인에게 무료로 점심을 제공하는 원각사 무료급식소는 아침 일찍 어르신을 맞이한다.
빠른 번호표를 받기 위해 오전 5시부터 줄을 서 계신 어르신들에게 오전 7시에 1차 번호표, 오전 10시에 2차 번호표를 배부한다.
오전 11시가 되자 봉사자들에게는 설거지(4명), 국 서빙(6명), 배식(6명)으로 업무가 분장됐다.
이날 메뉴는 카레, 미역국, 매콤단무지, 어묵볶음, 김치, 계란장.
이중 김치와 계란장 배식 임무를 맡았다. 잘게 썬 김치를 작은 숟가락으로 듬뿍 떠 접시에 담고 반으로 가른 계란장을 예쁘게 옆에 놓는 일이다.
급식소 문 바로 앞 배식 자리에 서서 위생모와 위생장갑을 끼고 배식 준비를 마쳤다. 딸랑딸랑. 11시30분, 긴장감에 작게 한숨을 쉬니 배식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끝도 없이 줄을 선 어르신들이 하나둘씩 급식소로 들어와 음식을 받아 가기 시작했다.
지난 13일 배식을 받기 위해 줄을 선 어르신들 |
배식은 생각보다 신경 쓸 게 많았다.
시작한 지 1분만에 양 조절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나치게 많이 드리면 배식하다 부족해질 수 있고, 그렇다고 적게 드리면 어르신 간 형평성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또 손에 힘을 주면 계란장 노른자가 쉽게 분리됐다. 계란 모양새가 망가지면 배식을 못 하게 되거나 항의가 들어올 수 있으니 신중히 집어야 했다. '멀티 모드'에 돌입해 왼손으로 김치, 오른손으로 계란장을 배식했다.
'타이밍'도 잘 맞춰야 한다. 김치를 뜰 때 접시가 내 앞으로 오는 타이밍과 맞지 않으면 맑은 김치국물이 배식대에 뚝뚝 떨어지기 일쑤였다. 배식하는 내내 옆에 있는 분홍색 행주로 배식대 위 김치국물의 흔적을 닦았다.
만석일 때 반찬 재빨리 담아놓기 |
좁은 공간에 어르신들이 몰려들면서 "안에 자리 있나요?"·"어르신 안쪽으로 들어가세요"·"설거지 빠르게 부탁합니다"·"여기 접시랑 국 좀 더 갖다 주세요" 등 봉사자들의 우렁한 외침이 이어졌다.
야외에 줄을 섰던 어르신들은 접시에 음식을 담고서야 건물 안에 차려진 식탁에 앉을 수 있었다. 4인용 식탁 4개와 벽에 붙은 9인용 긴 식탁 2개가 끊임없이 채워졌다.
회전 속도는 빨랐지만 앉을 자리가 없어 어르신들이 들어오지 못할 때면 마음이 조급해졌다.
조금씩 눈발도 날리는 추위 속에 전동 휠체어를 타고 온 분들이나 급식소 안쪽 자리를 잡지 못한 분들은 야외에 차려진 6인용 식탁에 앉아야 했다. 뜨끈한 미역국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길 바랄 수밖에 없었다.
양 조절에 신경을 쓰느라 힘을 줬는지 숟가락을 쥔 손가락이 저려오기 시작했다. 잠시 위생장갑을 벗고 '잼잼'하며 손을 풀고 싶었지만 숨 돌릴 틈도 없었다. 활짝 열린 문에서는 영하 6도의 차가운 겨울바람이 들어왔다.
지난 13일 급식소를 빼곡히 채운 어르신들 |
슬슬 지치기 시작해 부지불식간 시계를 들여다보고 있던 차 "잘 먹었습니다"라는 인사가 정신을 차리게 했다.
숟가락을 고쳐잡은 후 '신속하게 적당히 담기'를 되뇌며 배식을 이어갔다.
이날 오신 어르신은 총 294명. 밖에서 안내하던 봉사자가 급식소 안으로 들어와 10명이 남았다는 소식을 알리자 여기저기서 "고지가 보인다"는 속삭임이 들렸다.
카레와 김치의 궁합 때문인지 김치가 인기였다. 모자라지 않을 것 같아 더 달라고 하는 분에겐 웃으며 반 술을 더 드렸다. "아이고 감사합니다"라는 인사를 들으니 뭉클해졌다.
하지만 양 조절에 실패한 품목도 있다. 배식 중간에 어묵볶음이 동났다. 또 40명쯤 남았을 때 카레소스가 부족할 것 같다는 우려도 나왔다. 그러나 다행히 잘 마무리됐다.
낮 12시40분께 배식을 끝낸 후 뒷정리에 돌입했다. 배식대를 정리한 후 행주로 식탁을 닦고, 의자를 거꾸로 식탁 위에 올리고 바닥을 쓸고 닦았다.
지난 13일 배식을 받기 위해 줄을 선 어르신들 |
2시간반의 봉사가 끝나고 귀가하는 봉사자들의 얼굴에는 저마다 미소가 피어올랐다. 누군가의 절실한 밥 한 끼를 차렸다는 보람 덕분이리라.
급식소를 나오니 살을 에는 겨울바람이 불었다. 한 끼를 해결하기 위해 새벽부터 번호표 대기 줄을 서고, 다시 배식을 받기 위해 기다리셨을 어르신들을 생각하니 바람이 더 차갑게 느껴졌다.
어르신들에게 따뜻한 밥 한 끼를 드렸다는 생각에 배고픈 줄도 몰랐다가 집에 도착하자 그제야 허기가 몰려왔다.
그렇지만 마음만은 어느 때보다 든든하게 채워진 하루였다.
ju@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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