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상조 전 국회 행정안전위 수석전문위원
1월은 결심의 달이다. 새해 해낼 것들을 나름 비장한 각오로 정하는 달이다. 만약 아직 정한 것이 없거나 추가할 여백이 있다면 일기 쓰기를 권하고 싶다. 왜 굳이 일기 쓰기 일까?
먼저 ‘난중일기’를 살펴보자. 난중일기 속에는 인간으로서의 고뇌, 절망, 원망 등이 녹아 있다. 이순신 장군은 성웅이기에 모든 아픔을 별일 아닌 듯 손쉽게 이겨낸 것이 아니다. 단 한 번의 전투 승리로 전쟁을 마무리한 것도 아니다. 전쟁은 잔인하게 그리고 간혹 지루하게 7년을 끌었다. 이순신 장군은 하루하루 반성하고 대비하면서 버텨낸 것이다. 이순신 장군 역시 한 인간이었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책이 난중일기이다. 이순신 장군에게 있어 일기는 전쟁이 주는 압박감, 주변 인간들에 대한 실망감 등 모든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었던 것이다. 만약 이순신 장군이 난중일기를 쓰지 않았다면 자칫 전쟁에서 패해 우리 후손들이 지금 일본어를 쓰고 있을지도 모른다.
난중일기의 특징은 무엇보다 내용이 길지 않다는 것이다. 심지어 ‘맑다’가 전부인 일기도 많다. 일기를 쓴다는 것은 하루를 돌아보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내일을 그려본다. 그 종합 결과가 ‘맑다’인 것이다. 맑다의 기록이 하루의 기록이라면 별 값어치가 없을 수 있겠으나 7년 치라면 어떨까? 그것은 역사가 되는 것이다.
만약 선조가 일기를 썼다면 어땠을까? 만약 원균이 일기를 썼다면 어땠을까? 이들도 하루하루를 돌아보며 자신과 주변을 성찰했다면 어땠을까? 그들의 개인적 삶이 달라졌을 것임은 물론이고 백성들의 삶도 달라졌을 것이고 역사적 평가 또한 달라졌을 것이다. 한 마디로 난중일기는 전쟁 중에도 일기를 쓸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책을 넘어 전쟁 중이라면 더더욱 일기를 써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책이다. 최근에 너무 기막힌 일들로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는 정치 지도자들은 분명 일기를 쓰지 않고 있을 것이다. 이순신 장군의 길을 두고 왜 선조와 원균의 길로 가려고 하는가. 하루라도 빨리 일기 쓰기를 권한다.
어떤 이들은 ‘나는 지도자의 위치에 있지 않아서 일기를 쓰지 않아도 된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천만의 말씀이다. ‘초등학교 일기장’을 가지고 있는가? 혹시 가지고 계신 분이 있다면 절대 분실하지 않도록 주의하기 바란다. 세월이 흐른 뒤 펼쳐보라. 왜 일기를 써야 하는지 한 눈에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우주의 빅뱅과 같은 감동이다. 일기장은 그 자리에 가만히 있었지만 세월이 일기장에 들어가 함께 하고 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일기장을 꺼내 볼 때면 웃음과 눈물이 교차한다. 초등학교 시절, 뭐 그리 특별할 것이 없던 반복적 일상속에서 일기거리를 찾아야 했다. 더구나 초등학교 스승님이셨던 아버지의 검열을 받아야 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일기를 써야 했던 그 스트레스보다 일기를 읽고 평을 쓰셔야 했던 아버지의 스트레스가 더 크셨을 것으로 추측된다. 몇 줄 안 되는 글에서 틀린 맞춤법은 아무리 고쳐주어도 반복되었고 내용 또한 ‘참 재미있었다’로 끝이 나는 수준이었으니 얼마나 실망스럽고 화가 나셨을까? 그런 아버지의 인내와 기다림 덕분에 지금 이렇게 글을 쓰는 원동력이 되지 않았나 싶다. 글쓰는 힘의 원천은 분명 초등학교 일기장에 있다.
어쩔 수 없이 썼던 글들이 아직도 남아서 나를 울린다. 내 인생 최고의 걸작은 두 말할 것도 없다. 내가 앞으로 그 어떤 글을 쓰더라도 가격(price)은 몰라도 가치(value)에 있어서 초등학교 일기장을 넘어설 수는 없다. 가격이 가치로 전환되는 환희, 하루하루가 모여 역사가 되는 전율, 그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일기를 쓸 때는 어떤 규칙도 없다. 손 가는 대로 쓰면 된다. 아침에 써도 좋고, 자기 전에 써도 좋다. 심지어 내일 일기를 써도 좋고, 어제 일기를 써도 좋다. 늦기 전에 자신과 민낯으로 마주할 수 있는 은밀한 시간과 공간을 마련하기 바란다. 일기를 쓰면 콘텐츠를 소비하는 사람에서 콘텐츠를 생산하는 사람으로 바뀐다. 일기는 인공지능(AI)이 주인 행세를 하는 사회에서 내가 내 인생의 주인임을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일지도 모른다
서경IN skin@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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