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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춤한 美·英, 치고 올라온 中… 무비자 경쟁에 뒤집힌 여권 파워

조선비즈 유진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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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춤한 美·英, 치고 올라온 中… 무비자 경쟁에 뒤집힌 여권 파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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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각국 여권 파워 지형도가 요동치고 있다. 10년 전까지 세계에서 가장 많은 국가들을 무비자로 방문할 수 있었던 미국과 영국은 쇠락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반면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은 무비자 입국 가능 국가를 빠르게 늘리고 있다. 여권에 담긴 국력과 외교적 신뢰도가 서구권에서 동양권으로 이동하고 있다고 전문가들은 평가했다.

13일(현지시각) 영국 글로벌 이주 자문사 헨리앤파트너스가 발표한 최신 헨리 여권 지수(Henley Passport Index)에 따르면 전 세계 192개국을 비자 없이 방문할 수 있는 싱가포르가 여권 파워 1위를 차지했다. 한국과 일본은 각각 188개국으로 공동 2위에 올랐다. 헨리 여권 지수는 국제항공운송협회(IATA) 데이터를 바탕으로 특정 국가 여권 소지자가 비자 없이 입국 가능한 국가 수를 집계해 순위를 매기는 대표적인 지표다.

이스라엘 하이파에서 한 미국 시민이 키프로스로 향하는 배에 오르기 전 여권 더미를 들고 기다리고 있다. /연합뉴스

이스라엘 하이파에서 한 미국 시민이 키프로스로 향하는 배에 오르기 전 여권 더미를 들고 기다리고 있다. /연합뉴스



이번 발표에서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은 영국의 기록적인 하락이다. 영국은 지난 1년 사이 무비자 입국 가능 목적지가 8곳이나 줄었다. 이번 조사 대상 국가 가운데 가장 큰 감소 폭이다. 한때 미국과 함께 공동 1위를 기록하며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했던 영국 여권은 이제 7위(182개국)까지 밀렸다. 브렉시트(EU 탈퇴) 이후 유럽 연합 내 자유 이동 체제 수혜를 잃은 데다, 최근 영국의 외교적 영향력과 경제적 위상이 예전만 못하다는 사실이 수치로 증명됐다는 평가다.

미국 역시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미국은 지난해 10월 발표에서 12위로 추락하며 사상 처음으로 10위권 밖으로 밀려났다. 이번 1월 발표에서는 10위(179개국)로 복귀하며 순위는 소폭 반등했다. 그러나 실질적인 이동 편의성은 3개월 만에 오히려 더 떨어졌다. 지난해 10월 180곳이던 무비자 입국 가능 지역은 올해 1월 기준 179곳으로 한 곳 더 줄었다. 순위가 두 계단 오른 이유는 상위권 국가들 사이에서 상대적인 순위 변동에 따른 결과일 뿐, 미국 여권 경쟁력이 회복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고 헨리앤파트너스는 평가했다.

미국은 지난해부터 여러 국가와 맺었던 비자 면제 상호주의 관계를 후퇴시키는 방향으로 정책을 운용하고 있다. 브라질과 베트남 등은 미국이 자국민에게 비자 면제 혜택을 주지 않자 상호주의 원칙을 내세워 미국인에 대한 비자 면제 조치를 철회했다. 이는 미국 여권이 과거 누리던 글로벌 이동의 기본권적 지위가 구조적으로 무너지고 있음을 시사한다.

세계 여권 파워, 엇갈린 궤적

세계 여권 파워, 엇갈린 궤적



반면 중국은 이례적인 상승세를 보이며 대조를 이뤘다. 중국은 지난 10년간 여권 순위를 30계단 가까이 끌어올렸다. 2015년 94위에 머물렀던 중국은 올해 59위로 급등했다. 2020년대 들어 중국은 중동, 중앙아시아, 남미, 동유럽, 아프리카 일부 국가를 중심으로 무비자·간소화 협정을 공격적으로 확대하고 있다.


특히 최근 2년 동안에만 40개국 이상에 무비자 입국을 허용하는 공격적인 개방 정책을 펼쳤다. 중국 정부는 지난해 11월 우리나라를 포함한 45개국 일반 여권 소지자를 대상으로 한시적인 일방적 비자 면제 방침을 연장한다고 발표했다. 올해 기준 중국이 외국인에게 무비자 입국을 허용하는 국가는 77개국에 달한다. 46개국에 그치는 미국을 압도한다.

아랍에미리트(UAE)도 중국 못지 않게 여권 파워에서 두각을 드러내고 있다. UAE는 지난 10년간 무비자 입국 가능 국가를 107곳 추가하며 올해 5위에 등극했다. 지수 역사상 가장 빠른 속도로 성장한 국가로 꼽힌다.

전문가들은 이런 현상을 두고 소프트파워가 역전되고 있다고 해석했다. 미국이 보안과 불법 이민 차단을 이유로 빗장을 걸어 잠그는 사이, 중국이나 UAE는 무비자 혜택을 외교적 도구로 활용해 우군을 확보했다. 자국인 이동성만 일방적으로 챙기기보다 상대 국가에 문턱을 낮추며 국제적 신뢰를 쌓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국제 정치 전문가인 미샤 글레니비엔나 인문과학연구소(IWM) 소장은 “지정학적 갈등이 심화하면서 국가 간 이동이 점점 더 정치화되고 있다”며 “여권 파워 하락은 해당 국가가 국제 사회에서 점차 고립되고 있다는 위험 신호일 수 있다”고 분석했다.


8일 중국 동북부 헤이룽장성 쑤이펀허시 공동 검사장에서 입국 승객들이 세관 검사를 받고 있다. /연합뉴스

8일 중국 동북부 헤이룽장성 쑤이펀허시 공동 검사장에서 입국 승객들이 세관 검사를 받고 있다. /연합뉴스



실제 올해 조사에 따르면 전 세계적으로 국적에 따른 이동 편의성 격차는 갈수록 벌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여권 지수 1위 싱가포르(192개국)와 최하위인 아프가니스탄(24개국) 사이의 격차는 168개국으로 벌어졌다. 지수 산출을 시작한 20년 이래 최대치다.

헨리 앤 파트너스 회장인 크리스찬 케일린 박사는 “상위권 국가들이 전례 없는 이동의 자유를 누리는 반면 하위권 국가들은 더욱 고립되고 있다”며 “이는 단순히 여행의 불편함을 넘어 부와 기회의 불평등을 고착화한다”고 했다.

유진우 기자(ojo@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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