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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맘’을 비난할수록 ‘아들’과 ‘사회’의 책임은 희미해진다 [플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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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맘’을 비난할수록 ‘아들’과 ‘사회’의 책임은 희미해진다 [플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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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그우먼 강유미가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 ‘강유미 yumi kang 좋아서 하는 채널’에 업로드된 ‘중년남미새’ 영상의 섬네일. 유튜브 캡처

개그우먼 강유미가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 ‘강유미 yumi kang 좋아서 하는 채널’에 업로드된 ‘중년남미새’ 영상의 섬네일. 유튜브 캡처


새해 첫날부터 홈런이 터졌다. 코미디언 강유미가 지난 1일 자신의 유튜브 채널 ‘좋아서 하는 채널’에 올린 ‘중년남미새’라는 제목의 영상이 3일 만에 조회수 백만을 돌파하며 온라인을 뜨겁게 달궜다. <개그 콘서트> 시절부터 ‘사랑의 카운슬러’, ‘GoGo! 예술 속으로’ 같은 프로그램에서 일상 속 디테일을 동물적인 감각으로 해석했던 강유미는 이제 인류학자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다양한 인물을 흉내 낸다. 그런 강유미의 인기 콘텐츠 중 하나는 2024년에 올라왔던 ‘남미새 영혼에 빙의된 여자’였는데, 남미새란 ‘남자에 미친 X끼’의 줄임말이다.

[플랫]유튜브에서 확장되는 ‘강유미의 유니버스’

이번 ‘중년남미새’에서는 중년이라는 설정을 추가하면서 약간의 변주를 줬다. 강유미의 영상은 지난해 초 열풍을 일으켰던 이수지의 ‘대치맘’ 캐릭터가 야기한 논쟁과도 일정 부분 겹치는 지점이 있다. 조롱과 풍자, 사회 비판과 여성혐오 사이의 아슬아슬한 줄타기가 환호와 비판을 동시에 끌어들인다. 단순한 이분법을 넘어서, 여성 캐릭터가 의미화되는 방식과 코미디를 받아들이는 대중의 감정이 들끓는 결절점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GoGo! 중년남미새 속으로!

[플랫]‘중년 남미새’ 영상 공방…‘내면화된 여성혐오’ 풍자와 분열 사이

중요 부위만 가리는 ‘독기룩’을 입고 남자친구와 남사친에게 목을 매던 남미새와 달리, 이제 나이가 든 중년남미새는 회사에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고, 결혼했으며, 아들이 있다. 기본적인 태도는 상냥하고 친절하지만 부하 직원 중 여성에게는 비꼬거나 뒷담화를 하는 식으로 공격성을 드러낸다. 반면 남성 직원에게는 ‘아들 같아서’ 애틋하다며 한없이 너그럽다. 아들 사진을 자랑하던 중년남미새는 “우리 아들램 딴 년 줄 수 있을까?”, “나쁜 시어머니 완전 예약이야.”라며 아들에 대한 독점욕과 허상 속 아들의 배우자를 향한 질투를 드러낸다. “요즘 남자애들이 여자애들 눈치 더 보잖아.”라며 역차별을 걱정하는가 하면, 요즘 여자애들은 영악하고 감정 기복이 심하다며 질색한다. 썸네일 속 캐릭터의 머리에 떠 있는 ‘(아들맘)’이라는 자막처럼, 중년남미새가 미치는 남자는 아들이라는 존재다. 중년남미새는 이 지점에서 남자를 연애 대상으로만 좋아하는 젊은 남미새와 구별되며, 아들을 오냐오냐 키우는 ‘아드리즘’(온라인상의 조어) 문화가 남성을 성차별과 젠더 폭력의 주범으로 키운다는 분노의 버튼을 누른다. 중년 여성들이 아들에게만 너그럽고 딸에게는 가혹하다는 감각은 가정 내 성차별을 넘어서서 광범위하다. ‘K 장녀’ 밈은 집안의 첫째임에도 남동생과 차별당하며 책임과 의무만 짊어진 원한이 만들었고 소위 ‘서브웨이맘’ 밈은 서브웨이에서 일하는 남성 청년이 아들 같아서 애틋하고 짠하다고 눈물짓던 4050 여직원이, 진짜 딸뻘인 여성 직원에게는 목 막히니까 커피 타오라고 구박한 일화에서 유래했다.

그렇다. 중년남미새는 여성이지만 여성혐오를 한다. 남편과 아들에게 자아를 의탁하고, 여성을 괴롭힌다. 누군가는 엄마의 얼굴로, 누군가는 직장 상사의 권위로, 누군가는 시어머니의 이름으로, 기타 온갖 관계 속에서. 그래서 강유미의 영상 댓글란에는 현실의 중년남미새에게 당한 사람들의 성토가 만선이다. 어떤 면에서 중년남미새라는 캐릭터는 여성을 괴롭히는 여성을 향한 통쾌한 한 방이자, 관계에서 우위를 점한 강자 혹은 여성조차 남성중심적 사고를 내면화하는 구조를 비판하는 풍자일 수 있다. 동시에 생각해 봐야 한다. 누군가를 비판할 때 여성이라는 점이 강조되거나 여성성이 혐오의 구실이 된다면, 복잡하고 중층적인 문제의 원인이 오직 그의 탓인 양 단순화된다면 이 또한 그가 약자라는 증거다. 예를 들면 중년남미새는 이름만 새로 얻었을 뿐, 여성혐오 놀이의 전통을 계승한 인물이다. 그는 휘황찬란한 폰케이스와 텀블러, 로고를 강조하는 명품 악세사리, 긴 머리를 쉴새없이 넘기는 동작으로 육화한다. 이처럼 ‘나이 들었음에도 여성성이 과도한’ 여성을 싫어하고 조롱하는 감성은 유구하다. 집단 기준에서 바람직하지 않은 가치관을 지닌 여성을 공격하는 패턴 또한 마찬가지다. 과거에는 자신의 일에 몰두하는 여성을 이기적이라고 비난했고, 요즘에는 남편이나 자식에게 의존하거나 헌신하는 여성을 한심하다고 조롱한다. 팀플의 무임승차자처럼 여기면서 말이다.

한편 강유미의 영상에 달린 댓글 중 여성 청소년들이 쏟아내는 애환이 주목할 만하다. 디지털 시대의 ‘고어 남성성’이라고 불릴 만큼 착취적인 문화가 지배적인 가운데, 여성 청소년은 혐오 발언이나 디지털 성폭력으로 고통받는다. 이는 분명 사회가 적극적으로 응답해야 하는 고통이지만 문제의 화살을 “아들 똑바로 키우라”라며 개인에게 돌리는 방향은 우려스럽다. 아들을 숭배하고, 아들에게 거절과 좌절을 학습시키는 대신 딸에게 배려와 주의를 강요한 양육 문화와 가정 교육은 물론 문제적이다.그러나 청년 남성을 성숙한 시민의 일원으로 길러내지 못한 것은 우리 사회 전체의 실패다. 근본적인 문제는 가부장제 이데올로기고, 오랫동안 제지받지 않은 착취적 남성성은 디지털 시대의 기술 발전과 만나 지금껏 없던 형태로 폭주한다. 법은 그 속도를 따라오지 못하고, 무분별한 민원과 아동학대 신고로부터 교육자를 보호하지 않은 결과 교육 현장이 붕괴했다. 2025년 화제작 <소년의 시간>(넷플릭스)은 동급생을 살해한 13세 소년 제이미를 둘러싼 유해한 온라인 문화를 입체적으로 추적했다. 이 거대하고 복합적인 원인들 중 ‘아들맘’은 가장 편리하고 비난하기 좋은 표적이 된다. 90년대를 강타한 카피 “남자는 여자하기 나름”가처럼 (이때의 남자는 남편을 의미했다) 남성을 돌보고 관리할 의무를 여성에게 전가하는 것이다. 아들맘을 비난할수록, 아들 개인과 사회의 책임은 희미해진다. 하다못해 아들파파의 몫마저도.

박완서가 일찍이 <꿈꾸는 인큐베이터>(1993)에서 고백했듯이, 아들을 향한 모성에는 남다른 부분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가장 유명한 구절은 다음과 같다. “아들을 낳음으로써 나는 내가 남자가 된 것처럼 당당해졌다. 정말이지 나는 그들 앞에서 더는 여자 노릇을 할 필요가 없었다. 아들 생각만 하면 나는 겁날 게 없었다. 아들은 나에게 있어서 후천적인 남성 성기였다.” 가부장제는 아들을 낳은 여성에게 비로소 제대로 된 지위를 준다. 괜히 “딸 낳은 중전, 아들 낳은 후궁” 같은 밈이 유명한 게 아니다. 남아선호사상은 너는 평생 불완전하다는 부정을 겪은 존재에게 비로소 인정받는 경험을 선별적으로 선사하고, 아들 없는 여자와 구별 짓는다. <꿈꾸는 인큐베이터> 속 주인공인 ‘나’는 아들을 낳기 위해 딸을 낙태하고, 아들을 낳은 후에야 낙태를 종용한 시가에 안하무인으로 굴며 자신의 분노를 발산할 기회를 얻는다. ‘나’는 아들이 없으면 비참하다고 주장하며 우연히 만난 남성에게 아들이 없다는 아쉬움을 조금이라도 찾아내고자 혈안이 된다. 강유미식으로 말하자면 전형적인 중년남미새다. 가해자이자 피해자이며, 서글픈 굴절혐오이자 자기혐오다. 아들이라는 존재에게만 다양한 특권을 발급하는 세상에서 어떤 여성들이 아들을 유난히 사랑하는 것은 불가피한 전개다. 그런 행태가 비위에 거슬리고 불쾌함을 느끼는 감정 또한 자연스럽다. 선해할 필요는 없다. 조롱하며 놀릴 수도 있다. 다만 내가 웃는 이 코미디가 못된 맛이라는 사실을, 인간은 혐오적인 것에 잘 웃는다는 진실을 받아들이자는 것이다.


“SNL에서 mz 조롱 보고 깔깔거리던 사람들 여기선 엄근진되는 게 쳐웃김”. 강유미 영상에 달린, 1만 이상의 ‘좋아요’를 받은 댓글이다. ‘MZ’라며 ‘요즘 것들’을 조롱할 때는 낄낄거리던 4050이, 막상 자신이 타겟이 되니 다른 반응을 보인다는 말이다. MZ, 대치맘, 남미새, 주기자…어떤 캐릭터가 떠오를 때마다 논쟁은 불탄다. 풍자인가 조롱인가? ‘나’가 속하지 않은 정체성은 안전하게 놀릴 수 있으니 재미있는 풍자고, ‘나’가 속하면 기분이 나쁘니까 비윤리적인 조롱인가? 현실적으로 깨끗한 구별은 불가능하다. 웃음에는 공격성이 들어간다.

그것이 웃음의 특성이니, 누구도 해치지 않는 무결하고 무해한 코미디란 불가능한 환상일 지도 모른다. 이 질문을 해결하고자 작년에 스탠드업 코미디를 배우러 다녔다. 그곳에서 배운 것은, 특정 조건이 잘 설정되면 비도덕적이고 못된 웃음일지라도 안전하게 즐길 수 있다는 사실이다. 차별과 혐오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이 모였다고 믿는 공간에서, 차별과 혐오는 실컷 헛소리로, 뜬금없는 슬랩스틱으로 취급되었다. 그러니까 중년남미새나 MZ, 대치맘이 풍자인지 조롱인지 판단하는 것보다, 어떤 캐릭터가 ‘마음 놓고 욕해도 되는 욕받이’로 도마에 오르는 과정과 선별 배경을 이야기하고, 그것이 현실의 혐오로 이어지지 않도록 합의하는 감수성이 더 필요하다.

▼이진송 계간 홀로 발행인


플랫팀 기자 flat@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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