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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평범성’은 부정확한 사고의 전시장

머니투데이 백우진글쟁이(주)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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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평범성’은 부정확한 사고의 전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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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시대, 리더의 생각]단편성에 부정합성까지―오역은 또 오해를 낳고

[편집자주] 생성형 인공지능(AI)이 여러 업무에 자리 잡고 있다. AI 사용으로 업무효율이 향상되는 가운데, AI가 생산한 자료를 받은 사람의 검수 역량이 더 중요해졌다. 의사결정의 정점에서 일하는 리더는 특히 최종 검수자 역할도 수행해야 한다. 여기에 활용할 생각법을 공유한다. AI 답변 대용으로 주로 전문가들이 쓴 글을 검수 대상으로 다룬다.



▲백우진 글쟁이㈜ 대표

▲백우진 글쟁이㈜ 대표

력형 비리가 아니라 권력이 저지른 범죄가 작가적 상상력을 초월했음이 속속 드러난 상황. 권력의 범죄가 어떻게 가능했는지를 두고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이 자주 소환됐다.

이 개념은 독일 출신의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1963년 내놓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제시됐다. 이에 대해 한 사전은 “나치에 의한 유대인 대학살(홀로코스트)은 상부의 명령에 순응한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 자행됐음을 설명하는 개념”이라고 설명한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아렌트가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 과정을 참관하고 저술한 책이다.

이 책에서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을 두 곳에 썼다. 그중 이 개념을 설명한 ‘후기’의 한 대목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그는 단지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결코 깨닫지 못한 것이다. 그로 하여금 그 시대의 엄청난 범죄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게 한 것은 (결코 어리석음과 동일한 것이 아닌) 순전한 무사유였다.”

아렌트의 주장은 온전한가? 이 물음은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바꿀 수 있다. ‘악의 평범성’에 들어맞지 않는 예외가 있었는가? 그 예외가 얼마나 많은가?


◇엘리트와 대중은 나치를 적극 지지했다

#1. 히틀러는 1923년 뮌헨 맥주홀 폭동으로 바이에른주 정부를 전복하려 한 고등반역죄 혐의로 기소됐다. 이때 재판장 게오르크 나이트하르트는 나치에 동조했다. 그는 법정에서 히틀러 등 주범들에 대놓고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 재판장이 판을 깔아주자 히틀러는 법정을 무대로 자신이 독일의 구원자라는 선전전을 폈다. 히틀러는 4시간에 걸쳐 자신의 반역죄를 합리화하는 장광설을 늘어놓았다.

독일 공화국수호법은 독일 내에서 반역죄를 저지른 외국인은 추방토록 규정했다. 당시 히틀러의 국적은 오스트리아였다. 그러나 나이트하르트는 히틀러에게 이 규정을 적용하지 않았다. "히틀러같이 독일인처럼 생각하고 느끼는 사람에게는 적용할 수 없다"는 궤변을 그 논거로 댔다. 선고 형량도 최저(징역 5년)에 그쳤다. 그것도 몇 달 후에는 형 집행을 유예한다는 단서까지 붙였다. 결국 히틀러는 8개월 남짓만 복역하고 풀려났다. 히틀러가 〈나의 투쟁〉을 쓴 것이 이 수감 기간이었다.

나이트하르트 판사 덕분에 히틀러는 국외로 추방되지 않았다. 형량도 가벼워져 짧은 기간만 복역했다. 만약 재판장이 나이트하르트가 아니었다면 독일의 역사는 달라졌을지 모른다. 그러나 나이트하르트가 아니었더라도 히틀러는 얼마든지 우호적인 판결을 받을 지지 기반을 확보하고 있었다.

나치를 지지한 판사로 롤란트 프라이슬러 민족재판소장이 있었다. 프라이슬러는 나이트하르트 판사를 능가한 열성 나치 지지자로서 법정에서 자신의 성향을 거침없이드러냈다. 요컨대, 나치의 집권 뒤에는 엘리트들의 동조가 있었다.


#2. 나치는 유대인 음모론을 바탕으로 세력을 얻었다. 달리 말하면, 제1차 세계대전 패배 후 독일인은 모든 게 유대인 탓이라는 나치의 주장을 적극 지지했다. ‘등 뒤의 칼’ 신화, 즉 독일군은 전장에서 용맹을 떨쳤으나 후방의 유대인과 공산주의자들이 배신해 전쟁에서 패했다는 주장이 낙담한 독일인을 위로했다.

놀랍게도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 패망과 함께 나치의 광기가 종식된 뒤에도 나치 지지자들은 여전히 나치의 음모론과 그에 대한 자기네의 지지를 정당화했다. 영국 작가이자 다큐멘터리 제작자 로런스 리스는 〈나치 마인드〉에서 전후 그들이 들려준 말을 다음과 같이 전했다. “그때가 좋은 시절이었다.” “홀로코스트로 죽은 사람은 30만~40만 명밖에 안 된다.” “온 세상이 독일제국을 반대했는데 이에 맞서 싸운 것은 당연한 일이다.”

#3. ‘악의 평범성’은 순응을 통해 홀로코스트까지 치달은 일련의 의사결정과 실행이 가능했다고 단순화했다. 나치가 권력을 행사한 바탕 중 순응은 극히 일부였다. 기본 바탕은 이미 설명한 대로 지지와 동조였고, 그 다음이 순응이었으며, 일부 반대는 행정적으로 제거되거나 폭압적으로 짓밟혔다.

독재 권력의 기본 원천이 법을 초월한 탄압과 이를 통한 공포임을 나치가 단적으로 보여준 대상이 한스 숄, 조피 숄 남매였다. 이들은 뮌헨대 학생들이 주축을 이룬 저항 조직 ‘백장미’의 일원이었다. 남매는 나치의 유대인 학살과 비인간적인 전쟁의 죄악상을 비판하는 전단을 만들어 배포했다. 곧바로 게슈타포에 체포된 두 사람은 국가반역죄와 이적죄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사형은 항소 절차 없이 집행됐다. 체포에서 처형까지 나흘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들 사례를 아우르면서 당시 실상을 전하는 설명은 적어도 다음과 같은 내용이어야 한다. “나치의 유대인 음모론을 적극 지지한 사람들이 나치에 권력을 부여했고 권력의 부당한 행사에 적극 가담했다. 그 결과 인종 범죄가 계획되고 실행될 수 있었으며, 그 과정에서도 많은 민간 독일인이 숨은 유대인을 밀고하는 등 학살을 자발적으로 도왔다. 홀로코스트는 나치와 그 수하 조직 이 홀로 저지른 범죄가 아니라 독일인과 독일이 저지른 범죄라는 전체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유대인 음모론이 홀로코스트로 치닫기까지 여러 단계를 거쳤고, 각 단계에는 층층이 위계가 있었으며, 그 층마다 결정이나 행위의 강도가 스펙트럼처럼 펼쳐졌다.


그중 하나, 무사고적 실행을 떼어내 그 사태를 설명하려는 시도는 가볍디가볍다.” 생성형 인공지능(AI) 중 하나에 ‘악의 평범성’ 개념을 비판해보라고 주문했다. 다음과 같은 답이 나왔다.

◇AI “가해자의 의도적 선택과 책임을 과도하게 희석”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은 가해자의 사유 부재를 강조함으로써 구조적·관료적 폭력의 작동 방식을 날카롭게 포착했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이 개념은 가해자의 의도적 선택과 책임을 과도하게 희석시킬 위험이 있다. 실제로 많은 가해자는 규범에 무비판적으로 순응한 것이 아니라 출세·이익·이념에 대한 능동적 계산 속에서 행동했다. 또한 ‘평범성’이라는 표현은 피해 경험의 급진적 파괴성을 언어적으로 축소하고, 악의 감정적·이데올로기적 동원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는 한계를 지닌다.”

지금까지 ‘악의 평범성’이 완결성과 거리가 먼, 말하자면 단편적인 설명임을 살펴봤다. 이제 필자는 한나 아렌트가 정합성을 어기며 서술했음을 지적하고자 한다. 쉽게 말하면, 그는 내용과 반대 단어를 연거푸 썼다.

그 대목은 다음과 같다.

“(홀로코스트를 어떤 개념으로 표현하느냐는 논의) ‘행정적 대학살’이라는 표현이 청구서를 더 잘 채울 수 있는 것 같다. 이 용어는 영국의 제국주의와 연관이 있다. 영국은 인도에 대한 지배를 유지하는 수단으로서 그러한 절차들을 고의적으로 거부했다. 이 표현은 그런 야수적인 행위가 오직 외국민족이나 다른 인종에 대해서만 저질러질 수 있다는 편견을 불식시킨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영국은 인도에서 행정적 대학살을 저지른 적이 있다. 따라서 ‘고의적으로 거부했다’는 ‘저질렀다’로, ‘편견을 불식시킨다’는 ‘관점을 주입한다’로 고쳐야 한다. 필자가 이 서술의 부정합성을 놓고 AI들과 대화해본 결과, 제미나이가 가장 이해도가 높았다.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영어로 썼다. ‘악의 평범성’은 본문에는 끝 문장에 한 번, 다음과 같이 나온다.

“이는 마치 이 마지막 순간에 그가 인간의 연약함 속에 이루어진 이 오랜 과정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교훈을 요약하고 있는 듯했다. 두려운 교훈, 즉 말과 사고를 허용하지 않는 악의 평범성을.”

‘연약함’으로 오역된 단어는 wickedness다. 역자는 이를 weakness로 착각했다. 따라서 ‘인간의 연약함 속에 이루어진 이 오랜 과정’이 아니라 ‘인간의 악을 다룬 긴 재판 과정’이다. ‘말과 사고를 허용하지 않는’의 원문은 word-and-thought-defying으로, ‘형언하기도 파악하기도 어려운’ 정도로 옮겨야 한다. 이 문장을 틀리지 않게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그는 마지막 몇 분간, 인간의 악을 다룬 긴 재판 과정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교훈을 요약한 것 같았다. 즉, 형언하기도 파악하기도 어려운 악의 평범성이 무섭다는 교훈을.”

위 오역은 엉뚱한 오해를 낳았다. 한 대학교수는 아렌트가 “말하기의 무능이 어떻게 사유의 무능으로 이어지고, 그것이 결국 악행으로 이어졌는지를 주목했다”고 주장했다.

우리가 얻을 교훈은 둘이다. 첫째, 총체적인 현실을 한 가지 변수로 설명하려고 하는 시도는 무망하다. 둘째, 음모론은 위험하다. 한국에서도 외국과 외국인에 대한 혐오가 단속적으로 불거지고 있다. 이 정서는 음모론과 결합하기도 한다. 우리가 경계할 것은 ‘악의 평범성’이 아니라 대중의 정서를 파고드는 음모론이다. 포용과 융합의 리더십이 필요한 때다.

▶본 기사는 입법국정전문지 더리더[the L]ader) 1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백우진 글쟁이(주)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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