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과 전라도를 지켰던 전략적 요충지, 진주
진주성 야경[사진/임헌정 기자] |
(진주=연합뉴스) 현경숙 기자 =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 是無國家)라 했다.
호남이 없으면 나라를 지킬 수 없다는 뜻이다.
임진왜란 때 전라도와 남·서해 바다를 빼앗기지 않았기 때문에 조선은 일본을 막아낼 수 있었다.
침략자 일본에 맞선 방어전에서 조선이 승리할 수 있었던 교두보였던 호남과 이순신을 보호할 수 있었던 데는 진주성 전투의 영향이 컸다.
◇ 임진왜란 3대첩의 현장, 진주성
1592년 10월 2일부터 10일까지 벌어진 1차 진주성 전투인 진주대첩에서 조선은 3천800여명의 군사로 약 2만명의 일본군을 맞아 격퇴함으로써 대승리를 거두었다.
1592년 4월 13일 700여척의 배를 이끌고 부산포를 통해 침략한 일본이 20여일 만에 한양에 도착하는 등 파죽지세로 북상할 때 진주대첩은 조선이 육지에서 일본군을 무찌르고 승리를 거둔 최초의 주요 전투였다.
진주성 공북문[사진/임헌정 기자] |
이듬해 1593년 6월 21일부터 29일까지 9일 동안 전개된 2차 진주성 전투는 조선군의 패배로 끝난다.
일본군 10만여명을 맞아 관군, 의병, 양민 등 7만여 명이 숨지거나 학살되는 참사가 빚어졌다.
하지만 일본군도 수만 명의 사상자를 내는 등 막대한 전력 손실을 입고, 결국 호남 진출을 포기하게 된다.
2차 진주성 전투는 비록 패배로 끝났지만, 일본군에 치명타를 가해 1차 진주성 전투와 마찬가지로 그들의 서진을 저지했다.
"진주가 없으면 호남도 없다." 2차 진주성 전투에 참여했다가 일본에 패하자 아들 김상건과 함께 남강에 투신해 순사한 김천일 장군이 했던 말이다.
김천일은 임진왜란 당시 호남에서 최초로 의병을 일으킨 의병장이다.
2차 진주성 전투에서는 호남 출신 의병들의 참전과 순사가 많았다.
그만큼 당시에 호남을 지키기 위해서는 진주를 방어해야 한다는 전략적 인식이 강했다.
진주성에서 산책하는 시민들[사진/임헌정 기자] |
◇ 무명용사와 백성이 지킨 진주성
1차 진주성 전투 승리는 진주 목사 김시민의 체계적인 지휘, 전라도의 최경희·임계영, 경상도의 곽재우·윤탁·최강이 이끌었던 의병 3천∼4천 명의 후방 지원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병사들은 포를 쏘거나 불화살을 날렸고, 백성들은 기어오르는 일본군에게 돌을 던지거나 뜨거운 기름을 쏟아부었다.
진주대첩은 군과 백성이 함께 이룬 것이었다.
일본이 1차전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 2차 전투에서 동원한 병력은 1차 전투 때의 5배에 가까웠다.
조선군은 이때도 백성들과 힘을 합쳐 치열하게 싸웠지만 중과부적이었다.
게다가 성곽을 지탱하던 흙은 6월 장마를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
성이 함락되자 조선 군과 백성은 일본군에 살육당하거나 남강에 투신해 순절했다.
공북문과 김시민 장군 동상[사진/임헌정 기자] |
경상우도를 대표하는 큰 고을이었던 진주는 일본군이 호남을 점령하려면 확보하지 않으면 안 될 전략적 요충지였다.
진주성 전투에서 조선군이 승리할 수 있었던 데는 진주성이 천혜의 요새라는 점이 작용했다. 진주성은 남쪽에 남강이 흐른다.
서쪽은 나불천이 흐르거나 절벽이다. 북쪽에는 대사지라는 큰 연못이 있었고 동쪽에도 해자가 있었다.
일본군은 물을 건너지 않아도 닿을 수 있는, 북쪽과 동쪽의 일부 성벽으로만 성을 공략할 수 있었다.
진주성의 성곽 길이는 내성만 약 1천700m이고, 외성을 합하면 약 4천m였다.
일본은 강점기에 진주대첩의 패배를 잊고, 진주의 저항정신을 말살하기 위해 진주성의 존재를 없애려 했다.
성곽을 허문 뒤 성돌들을 대사지 연못 속에 수장했다.
시민들이 성돌을 건져 올려 성을 복원하는 것을 원천 봉쇄하기 위해 연못을 매립한 뒤 매립지에 경찰서, 우체국, 학교 등을 지었다.
진주성은 현재 내성의 전 구간이 복원돼 있다.
외성은 내성과 연결된 석축 수십m만 복원돼 있다.
대사지에 매립된 성돌을 찾아내 외성을 부분적으로라도 복원해야 한다는 여론이 없지 않다.
진주성과 남강[사진/임헌정 기자] |
진주성을 아끼는 진주인들의 사랑과 긍지는 대단하다.
한국전쟁으로 촉석루가 불에 타자 시민들은 진주고적보존회를 만들어 1956년부터 복원 사업을 추진했다.
시민 성금에 국비·도비·시비가 더해져 촉석루 복원은 1960년 완료됐다.
전쟁 직후의 가난과 혼란을 고려하면 진주성에 대한 진주 사람들의 애정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다.
현재 진주성은 진주 제일의 시민 휴식처인 동시에 관광지이다.
그만큼 시민에게 가까이 있고, 풍광이 아름답다. 느긋하게 흐르는 남강 수면에 비치는 진주성의 야경은 사진작가들을 매혹한다.
◇ 국보였던 촉석루
논개의 의열을 상기하는 의암
촉석루[사진/임헌정 기자] |
평양 부벽루, 밀양 영남루와 함께 한국 3대 누각으로 꼽히는 촉석루는 진주성의 남쪽 벼랑 위에 우뚝 솟아 있다.
고려 고종 24년(1241)에 처음 지어진 후 몇 차례 불탔고, 여러 차례 고쳐 지어졌다.
조선 초 영의정 자리에 올랐던 하륜이 쓴 '촉석루기'는 '강 가운데 우뚝 솟은 바위 위에 지은 까닭'이라고 누각 이름의 유래를 밝히고 있다.
한자 '곧을 직'(直) 자가 3개 모인 '촉'(矗)은 '곧추 솟았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촉석루는 전시에는 전투를 지휘하는 본부였고, 평화 시에는 시인 묵객들이 풍류를 즐기던 명소였다.
남쪽에 있었기 때문에 '남장대'라고도 불렸다.
장대는 장수가 올라서서 명령, 지휘하던 곳이다.
촉석루는 한국전쟁으로 불타기 전까지 국보 제276호로 지정돼 있었다.
복원된 뒤 2020년 경상남도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촉석루를 국가지정유산 보물로 승격시켜야 한다는 운동이 일고 있다.
촉석루 앞 남강변에 있는 의암(義巖)은 2차 진주성 전투 때 논개가 순국한 바위이다.
촉석루 아래 의암[사진/임헌정 기자] |
진주성이 함락돼 성안의 민·관·군이 순절할 때 논개는 의암으로 왜장을 유인해 그를 끌어안고 남강에 투신했다.
'의암'은 의로운 바위라는 뜻이다.
촉석루 바로 옆에는 논개의 넋을 기리기 위해 그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사당인 의기사가 있다.
영조 16년(1740) 경상우병사 남덕하가 영조의 윤허를 얻어 지었다.
천민 출신 여성을 위해 사당을 짓도록 임금이 허락한 사례는 조선 시대를 통틀어 의기사가 유일하다.
◇ 국립진주박물관
국립진주박물관[사진/임헌정 기자] |
진주박물관은 경상남도에서 처음으로 건립된 국립박물관이다.
진주성 안에 자리 잡고 있다. 입지의 역사성을 중시해 '임진왜란과 동아시아'라는 주제에 특화돼 있다.
임진왜란 실이 별도로 설치돼 조선과 명이 일본의 침략에 맞서 싸운 7년 전쟁의 전개 과정과 영향을 당시의 무기와 여러 역사 기록으로 생생하게 보여준다.
천자총통, 지자총통, 중완구, 비격진천뢰 등 임진왜란 때 조선군이 사용했던 무기들을 전시하고 있다.
경남 지역 역사와 문화도 연구, 전시하고 있다.
역사문화홀은 경남 문화유산의 다채로움을 편안하게 즐길 수 있는 공간이다.
홀에서는 문화재 감상뿐 아니라 독서나 휴식도 할 수 있다.
두암실은 경남 사천 출신 재일교포 두암 김용두(1922∼2003) 선생이 일본에서 수집해 기증한 문화유산을 전시한다.
보물로 지정된 서화, 도자기, 공예품이 여러 점이다.
진주박물관 역사문화홀 전시 유물[사진/임헌정 기자] |
◇ 16세기 말 동북아의 운명을 바꾼 국제 전쟁
임진왜란은 조선과 일본, 두 나라 사이의 전쟁이 아니었다.
조선, 명, 일본이 벌인 동북아 국제전이었다.
청일전쟁이나 한국전쟁과 마찬가지로 강대국 사이에 낀, 혹은 국제 역학관계 변화의 소용돌이에 휩쓸린 한반도가 전장으로 전락한 사례였다.
전쟁이 끝난 뒤 중국에서는 명이 소멸하고 청이 등장한다.
일본에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끄는 새 정권이 들어선다.
명·청 교체기에 떠오르는 강국과 지는 강국의 틈바구니에서 조선은 또다시 병자호란이라는 외침을 겪게 된다.
한반도는 1592년부터 1598년까지 지속된 긴 전화를 마침내 극복했다.
승리의 원동력은 이름 없는 백성들의 끈질긴 저항이었다. 진주성은 그 저항의 상징이다.
조선시대 총통[사진/임헌정 기자] |
※ 이 기사는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6년 1월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ksh@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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