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로 건너뛰기
검색
경향신문 언론사 이미지

피말리는 요리지옥서 ‘단출한’ 당근국수와 당근전···“쉽고 맛있는 요리 보여준 걸로 충분”

경향신문
원문보기

피말리는 요리지옥서 ‘단출한’ 당근국수와 당근전···“쉽고 맛있는 요리 보여준 걸로 충분”

속보
경찰, '공천헌금 의혹' 강선우 20일 소환 통보
흑백요리사 ‘가장 궁금한 한 그릇’ 주인공 선재스님
양평에 작은 법당과 주방 딸린 소박한 거처
자극적 경쟁 내세운 서바이벌 출연, 처음엔 고민
“먹는 재료의 귀함, 만드는 마음 알리고 싶었다”
“촬영 즐거워…요리하는 기쁨 알았단 말에 행복”
선재스님이 경기도 양평 선재사찰음식연구소 뒷마당 장독에서 30년 된 간장을 보여주며 “간장은 오래될수록 점성이 생기고 단맛이 난다”고 설명했다.    정지윤 선임기자

선재스님이 경기도 양평 선재사찰음식연구소 뒷마당 장독에서 30년 된 간장을 보여주며 “간장은 오래될수록 점성이 생기고 단맛이 난다”고 설명했다. 정지윤 선임기자


13일 최종회가 공개된 넷플릭스 예능 <흑백요리사: 요리 계급 전쟁 시즌2>(흑백요리사 2)를 본 사람이라면 궁금할 법한 선재스님의 된장 비빔밥. 운 좋게도 그 맛을 조금은 안다. 10년전, 미쉐린 2스타 레스토랑 권숙수의 권우중 셰프와 함께 선재스님 연구실을 찾았을 때 스님은 호박을 넣어 지진 된장과 보리밥, 호배추로 담은 김치를 내왔다. 된장에 밥을 비벼 김치를 얹은 뒤 한 술 가득 입에 넣었다. 첫 맛은 구수하고 투박했다. 몇 번 씹자 이내 산뜻하고 깊은 감칠맛이 입안에 퍼졌다. “스님, 이거 도대체 뭐죠?”. 무심한 줄 알았더니 어느새 무섭게 입에 짝짝 붙는 맛. 결국 솥에 남은 밥까지 싹싹 긁어 먹고야 말았다.

지난 9일 경기 양평에 있는 스님의 거처를 찾았다. 작은 법당과 깔끔한 주방이 있는 소박한 공간이다. 우리밀로 만든 찐빵을 내온 스님에게 “연예인 보는 것 같다”고 농담을 건네자 스님은 “요즘은 초등학생들이 길에서 알아본다”며 고개를 저었다. “가끔 하는 법문과 스님들 대상으로 강의하는 것 외에 다른 활동은 많이 줄였어요. 방송 이후엔 오히려 사람을 잘 안만나요. 다른 분들 음식은 찾아가서 먹을 수 있는데 저는 그럴 수 없잖아요. 오겠다는 분들이 많은데 곤란하기도 하고요.”

스님의 <흑백요리사2> 출연 소식은 방영전부터 화제가 됐다. 톱 7까지 오르는 과정과 선보인 요리들도 관심을 끌었다. 화려한 요리 고수들 사이에서 스님이 사용한 재료와 양념은 ‘별 게 없었’음에도 결이 다른 존재감을 드러냈다. 도파민 터지는 자극적 경쟁을 내세운 서바이벌 예능. 섭외 요청이 왔을 때 고민하지 않은 건 아니다.

“음식은 온 우주의 생명을 먹는 행위지요. 우리가 먹는 재료가 어디서 왔고 누가 먹는지, 또 어떤 마음으로 만들어야 하는지 알리고 싶었어요. 장류같은 우리 전통 발효음식의 훌륭함도요. 딱히 누구를 이겨야겠다거나 몇등을 해야겠다는 마음을 가졌던건 아니었기 때문에 제작진에게 두 번 정도 나오고 떨어지면 좋겠다고 했지요. 그랬더니 웃으며 그래요. ‘아이고, 스님. 그건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고요.”

사찰음식 명장 1호. 2018년부터 3년간 한식진흥원 이사장을 지내기도 한 선재스님은 사찰음식의 대명사다. 아직 사찰음식이 대중들에게 생소하던 1994년 사찰음식에 관한 최초의 논문을 발표하며 국내외에 사찰음식을 알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격무와 공부에 시달렸던 스님은 마흔도 안 된 나이에 간경화로 시한부 진단을 받기도 했다. 정작 자신의 몸은 돌보지 못한 결과였다. 그때부터 사찰음식을 이론적으로 연구하는 것 뿐 아니라 그 정신과 철학을 일상에서 실천하는 일에 정진했다. 음식이야 말로 사람의 몸과 마음을 다스리는 토대라는 믿음으로 수행을 이어왔다.


<흑백요리사2>는 지난해 일흔을 맞은 스님에게 새롭고 신선한 시도였다. “촬영 내내 재미있었어요. 거기서 만난 99명의 참가자들은 정말 자신의 삶을 치열하게 살아온 수행자시더라고요. 그 중 한분이 저를 보면서 요리하는 기쁨을 알게 됐다고 하시더군요. 전에는 잘해야겠다는 생각으로만 음식을 만들었다면서. 너무 고마웠지요. 그런 마음을 갖고 요리하는 사람이 더 많아질수록 먹는 사람들도 더 행복해지거든요.”

다른 참가자들의 요리 중 스님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건 뭐였을까. 스님은 김도윤 셰프가 만들었던 메밀국수를 꼽았다. “승소, 즉 스님을 웃게 한다고 할만큼 스님들이 국수를 많이 좋아해요. 메밀국수도 즐기는 편이지요. 김도윤 셰프가 정성스럽게 만드는 모습, 그리고 음식에 대한 자세를 보며 특히 감탄스러웠어요.”

선재스님은 당근을 주제로 온갖 요리를 만들어내며 피말리는 승부를 가리는 ‘무한요리지옥’에서 탈락했다. 스님이 만들었던 당근국수와 당근전, 당근장아찌는 평소에도 즐겨 먹었던 메뉴들이다. 주위에선 “좀 더 어렵고 점수를 더 많이 얻을만한 메뉴를 내놓지 그랬냐”며 안타까움도 토로했지만 스님은 단호했다. “제가 아플 때 당근주스를 많이 먹었어요. 몸이 힘들 때 당근으로 해 먹었던 음식들도 큰 도움이 됐고요. 그래서 제가 많이 먹었던, 사람들이 집에서 쉽고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당근요리를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거면 충분히 된거예요.”


스님 손맛의 비법 중 하나를 꼽자면 아마도 장맛을 빼놓을 수 없을 게다. 그 때문에 장독대를 보고 싶다고 청했다. “날이 흐려서 항아리 뚜껑 열면 안될텐데”하고 잠시 망설이던 스님은 겉옷을 챙겨 입은 뒤 문 밖으로 나섰다. 건물 바로 뒤켠에 크고 작은 항아리 30~40개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된장과 간장, 고추장, 김치, 두부장, 식초 등이 채워진 항아리를 두고 스님은 “나를 살려주고 생명을 주는 보물들”이라고 소개했다. 작은 항아리에서 스님이 꺼내준 거무스름한 무언가를 입에 넣자 황홀한 감칠맛이 폭발했다. 감식초에 절인 다시마였다. 이어 큼직한 항아리 뚜껑을 연 스님은 나무국자로 뭔가를 떠올렸다. 30년간 익어온 간장이다. 절제된 짠 맛을 내며 혀끝에 부드럽게 와 닿은 간장에선 은은한 단맛이 이어졌다. 비빔밥에 들어갔던 그 간장이냐고 호들갑을 떨자 스님은 “이 간장 가져갔더라면 더 맛있는 비빔밥을 만들었을 것”이라며 웃었다.

스님은 “대신 오늘은 이 간장으로 차 한잔 만들어 드리겠다”면서 “맛도 맛이지만 귀한 약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아무리 스님이지만 좀 과장 아니신가요?’. 의심많은 한 중생의 표정을 알아채고는 스님이 말을 이었다.

“제가 지난해 20여명의 일행과 인도 성지순례를 가면서 이 간장이랑 김치, 된장을 싸갔어요. 도착하자마자 힘들어 하는 분들에게 간장을 한 숟갈씩 먹게 했지요. 가져간 장으로 끼니마다 반찬도 만들어 나눠먹었고요. 현지 여행을 안내하셨던 여행사 사장님이 그래요. 30년 넘게 인도 여행을 다녔는데 배탈이나 몸살난 사람 하나도 없는 팀은 저희가 처음이라고.”


선재스님은 “행복한 사람이 음식을 만들면 먹는 사람도 행복해진다”고 말했다.  정지윤 선임기자

선재스님은 “행복한 사람이 음식을 만들면 먹는 사람도 행복해진다”고 말했다. 정지윤 선임기자


박경은 선임기자 king@kyunghyang.com

▶ 매일 라이브 경향티비, 재밌고 효과빠른 시사 소화제!
▶ 더보기|이 뉴스,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 점선면

©경향신문(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