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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의 눈] 염치불고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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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의 눈] 염치불고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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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코인 5% 급등, 9만5000달러도 돌파
자녀 사랑 않는 부모 없다지만
꽃길 깔아주려 온갖 편법 자행
정치인이나 고위공직자라면
국민이 원하는 염치는 있어야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20년 넘게 교류한 지인은 최근 이런 말을 했다. 매사 까칠한 건 기자라는 직업적 특성이 아니라 그저 인품이라는 것이다. 그래도 나이 들어선지 세상에 유해진 것 같다는 그나마 듣기 좋은 신년 인사를 건넸다.

정재영 사회부장

정재영 사회부장

어떻게 살아왔는지는 본인이 가장 잘 안다. 지인의 지적과 덕담을 다 받아들일 순 없지만 주변 반응을 보면 대체로 틀리지 않는 것 같다. 이 순간에도 본질이 드러난 것 같은데, 사실 누군가 MBTI를 물으면 아직도 그냥 BB형이라고 답한다. ‘남들 다 하는 거 굳이 따르고 싶지 않다’고 애써 고집해본다.

어느 순간부턴 ‘좋은 사람이 아닐 수 있다’고 의심하며 산다. 큰 의미 없이 던진 한마디라 여겼지만 상대가 핏대 세우며 항변해 ‘아뿔싸’ 할 때가 있다. 변명을 보태며 자기방어에만 힘썼던 젊은 시절을 지나 이젠 사과부터 하는 중년이 된 건 비겁해서가 아니라 세상 이치를 조금씩 알게 됐기 때문일 것이라고 위안한다. 주변에 ‘말이든 행동이든 결국 돌아온다’고 강조하는 건 사실 쉽지 않은 일이라서 스스로 끊임없이 다짐하고 다짐하는 과정임을 고백한다. 타인에 피해 주지 않고 소소한 만족을 추구할 뿐이다.

두 아이가 곁에서 자라면서부터 세상에 좀 더 유해지면서도 예민해진 것 같다. 아이들과 가끔 티격태격하지만 사실 재밌어서란 건 어른이 될 때까지 들키지 않으려 한다.

자녀를 생각하고 사랑하지 않는 부모는 세상에 없다. 만고불변 이치이지만 때로 비뚤어진 사랑법에 낙담하거나 분노하는 일도 있다. 근래 하루가 멀다 하고 나오는 정치인, 고위공직자 얘기다. 국민에게 넘겨받은 막대한 권한을 남용해 자녀의 미래를 담보하는 것이 과연 사랑일까.


자녀 입시 등 앞날을 위한다며 부정한 청탁과 온갖 불법을 저지르는 건 너무 자주 접해 구태스럽다.

주변 직원들을 하릴없이 동원해 성인인 자녀 업무를 돕게 하고, 로또 아파트를 얻으려 자녀의 출가를 숨기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군 복무를 집 근처에서 하게 하려고 어떤 일을 했을지 짐작하고 싶지 않다. 고위공직자가 되려는 정치인은 자녀가 성년이 되기 전 재산을 편법 증여하고선 “세금을 다 냈다”고 항변한다. 통상 부모 찬스는 합불법(合不法)을 넘나들어 부러워해야 할지 헷갈리지만, 이쯤이면 뭔가 뒤처진 기분보다 그 아이들 걱정이 앞선다. 이런 몰염치(沒廉恥)를 자랑스럽게 생각할 것 같아서다.

의료계 한 인사는 최근 여러 정치인의 행태에 “조국 가족이 억울해 보이는 신기한 경험을 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딸의 의학전문대학원 입시 과정에서 벌인 사문서위조 등 혐의가 인정돼 실형을 선고받고 8개월 복역하던 조국혁신당 조국 대표도 특별사면 이후 “자식 입시 비리에 대해 반성하고 국민께 사과드린다. 부모 찬스를 가지지 못한 청년들에게 특히 더 죄송한 마음”이라고 했다. 이를 사과로 봐야 할지 모르겠지만 최강욱 전 의원이 조 대표 아들의 허위 인턴증명서 발급 혐의가 인정돼 징역형을 선고받고 의원직까지 잃은 걸 보면 불법적인 부모 찬스였던 건 명확하다. 의료계 그 인사는 지금 벌어지는 일들을 조 대표 때보다 더한 일로 평가한 셈이다.

부당한 거대 여당 탓에 12·3 비상계엄을 했다고 주장하던 전직 대통령은 계엄 1년이 넘어 구형이 다가오자 당시 계엄의 부정적 영향을 알리고 이를 말리는 장관들이 없었다고 ‘남 탓’하기 시작했다. 혀가 짧아 말이 느리다는 ‘꼼수’ 덕에 구형이 미뤄진 법정에서 변호인과 대화하며 웃는 모습을 국민은 황망하게 지켜봤다. 국민을 두려움에 떨게 하고도 1년 넘게 제대로 된 사과 한마디 없더니 수치심은 고사하고 체면조차 없는 이런 상황에서 중형은 당연하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걸 명제로 보면,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에서 ‘어떻게 저런 사람이 저 위치까지 갔을까’로 사고는 확장한다.

자녀에 꽃길을 넘겨주려 법의 틈새를 꾸준히 파고든 이들이 굳이 힘없는 서민까지 아우르는 권한과 책임을 받아들일 것 같진 않다. 정치인, 고위공직자라면 국민이 요구하는 정도의 염치는 있어야 한다. 다음 세대가 그대로 따라 할 텐데, 이젠 염치불고(廉恥不顧)한 그들을 더는 보고 싶지 않다.

정재영 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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