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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근, 새벽, 철야…고단한 청춘 채워준 수다와 간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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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근, 새벽, 철야…고단한 청춘 채워준 수다와 간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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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만 해도 서울 시흥이나 오류동, 과천 근처엔 과일 농장이 많았다. 원풍모방의 20대 여성 직원들은 주말이면 일정 금액을 내고 과일을 마음껏 따먹을 수 있는 과수원에 놀러 다니는 게 큰 낙이었다. 필자 제공

1970년대만 해도 서울 시흥이나 오류동, 과천 근처엔 과일 농장이 많았다. 원풍모방의 20대 여성 직원들은 주말이면 일정 금액을 내고 과일을 마음껏 따먹을 수 있는 과수원에 놀러 다니는 게 큰 낙이었다. 필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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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바이쫀득쿠키’(두쫀쿠)라는 게 화제인 모양이다. 시류에 둔감한 내가 딸에게 들은 이야기다. 요거트아이스크림, 마라탕, 전 남친 토스트 등도 한바탕 인기몰이를 했다고 한다. 지난해엔 동네 은행이나 핸드폰 가게 앞에 ‘탕후루 반입 금지’ 안내문이 한참 붙어 있더니, 어느샌가 사라졌다. 가게마저 보이지 않는 걸 보니 요즘은 유행이 꺾인 모양이다.



요즘은 빵이나 과자, 심지어 반찬도 단맛이 강하다. 얼마 전엔 오징어볶음 팩을 샀다가 너무 매워 혼쭐이 났다. 결국 양념을 다 씻어낸 후 묵은 김치를 넣고 국을 끓여서야 먹을 수 있었다. 너무 달거나 맵고 짜고 튀긴 음식들이 유행하는 걸 보며, 정서가 메마른 시대의 허기가 자극적인 미각을 쫓게 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도 해본다.



탕후루와 햄버거는 구경하지 못했던 우리의 젊은 날도 늘 무언가 입맛 당기는 냄새를 탐했다. 섬유·직물 공장 원풍모방에서 3교대로 일하던 시절, 오후 2시에 출근해 밤 10시에 퇴근할 때면 배가 꼬르륵거렸다. 저녁을 먹고도 서너시간을 더 일했기 때문이다. 기숙사생은 밤 10시 이후 공장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하지만 궁하면 통하는 법이다. 자취하는 동료들이 공장 밖 가게에서 주문받은 주전부리를 챙겨와 경비실 문 안으로 넣어주거나, 가게 사장이 미리 주문받은 봉지를 들고 경비실 앞까지 배달왔다. 문틈으로 넘나드는 손길에 ‘사칙 위반’을 적용하지는 않았으니까.



겨울 간식은 찐빵이 대세였다가 언젠가부터 공장에서 대량 생산된 호빵이나 만두로 바뀌었다. 라면땅, 새우깡, 보름달빵, 단팥빵, 소보루빵, 초코파이 등도 인기였다. 사르르 녹는 카스텔라도 좋아했다. 음료로는 간혹 환타나 사이다, 오란씨가 보따리에 포함되곤 했다.



기숙사에서는 조리도구를 쓸 수 없었고 냉온수가 나오는 정수기도 없던 때지만 만약 그때 컵라면이 있었다면 분명 방마다 박스로 들여놓았을 것이다. 목욕탕의 뜨거운 물을 받아서라도 끓여 먹었으리라. 여하튼 조달한 호구지책 보따리를 들고 작업복 입은 채 끼리끼리 옥상에 자리 잡거나 기숙사 방바닥에 둥글게 모여 앉아 탐닉했다. 이렇게 사 먹는 것을 ‘가보시키’(가부시키)라 했는데, 추렴·더치페이를 말하는 일본식 표현이었던 모양이다. 가게에 외상 장부를 달아놓고 월급날이면 방 식구 누군가가 정확히 챙겨 장부에 줄을 그었다. 가게에서 돈을 떼먹혔다는 소리는 한번도 들어보지 못했다. 문득 그 시절 원풍모방 기숙사생들의 촘촘한 외상 장부를 사진이라도 찍어둘 걸, 아쉬움이 남는다.



기숙사의 가보시키는 전통이자 문화였는데, 1980년대 초 갓 입사한 후배들은 우스꽝스러운 일화도 남겼다. 금지 품목인 소주를 수박과 과자 사이에 숨겨 들어와 마침 비어 있던 한 동료의 방에서 판을 벌였다는 게다. 급기야 카세트 음악에 맞춰 춤을 추다가 기숙사 사감에게 적발되었다. 잠근 문을 두드려 대는 사감의 목소리에 혼비백산해 넘어지며 박살 난 수박에 엉덩이가 물든 채 호된 훈계를 들었다며 하하 웃었다.



차마 응하지 못한 유혹도 있었다. 깊은 밤 기숙사 언덕 아래에서 들려오던 “찹쌀떡 사려!” 소리였다. 월급날이 아니고서야 현금을 지니기도 어려웠지만 담장이 너무 높았다. 한 방에 열세명이 촘촘히 누운 밤, 기숙사의 담을 넘나들다 조금씩 멀어지는 찹쌀떡 장수의 여운에 겨울밤이 왠지 좀 쓸쓸했다.



1970년대만 해도 서울 시흥이나 오류동, 과천 근처엔 과일 농장이 많았다. 원풍모방의 20대 여성 직원들은 주말이면 일정 금액을 내고 과일을 마음껏 따먹을 수 있는 과수원에 놀러 다니는 게 큰 낙이었다. 필자 제공

1970년대만 해도 서울 시흥이나 오류동, 과천 근처엔 과일 농장이 많았다. 원풍모방의 20대 여성 직원들은 주말이면 일정 금액을 내고 과일을 마음껏 따먹을 수 있는 과수원에 놀러 다니는 게 큰 낙이었다. 필자 제공


1970년대만 해도 서울 시흥이나 오류동, 과천 근처엔 과일 농장이 많았다. 소그룹으로 무리지어 농장 나들이도 꽤 다녔다. 공장을 벗어나 시골길을 걸으면 목장도 없는데 ‘목장 길 따라’ 같은 노래가 절로 흥얼거려졌다. 과수원은 일정 금액을 내면 과일을 마음껏 따먹을 수 있었다. 아침 6시에 출근해서 오후 2시에 퇴근할 때나 주말을 이용했는데 삼삼오오 몰려간 농장에서 다른 그룹 동료들을 만나기도 한 걸 보면 원풍 노동자들의 단골 농장이 있었던 것도 같다.



형광등 불빛 가득한 공장에서 기계 돌아가는 소리와 실뭉치만 보다가 만나는 과수원의 초록빛은 눈이 시리게 청량했다. 먼지 자욱한 작업대 대신 흐드러진 포도 넝쿨이 그늘을 만들어 주었고, 기계 소음 아닌 바람에 흔들리는 잎사귀 소리가 귀를 맑게 해주었다. 흙냄새와 익어가는 과육 냄새가 특히 벅찬 건 농촌 출신이어서이리라.



우리는 원두막에 퍼지르고 앉아 본전을 뽑겠다며 경쟁하듯 포도알을 입에 넣었다. 하지만 분주하던 손길이 느려지면 누군가의 입에서 노래가 흘렀다. ‘돌아와요, 부산항에’로 구성지게 흐르다가 어느덧 ‘나를 울려주는 봄비’로 가라앉아 와인이라도 마신 척 공연히 취했다. 서로의 보라 빛깔 혀를 보며 깔깔 웃기도 했다. 그러다 잠시 원두막에 누우면 고향의 논밭에서 자라던 벼와 보리 감자꽃이며 냉이 향이 나는 듯했다.



농장을 나서면서 한 바구니 사서 든 포도는 함께 못 간 방 식구들을 위한 선물이었지만, 어쩌면 우리가 담아 간 것은 고향 냄새였다. 기숙사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다음 계절에 영글 딸기와 복숭아를 기약하며 그렇게 청춘은 포도알처럼 여물었다.



1970년대만 해도 서울 시흥이나 오류동, 과천 근처엔 과일 농장이 많았다. 원풍모방의 20대 여성 직원들은 주말이면 일정 금액을 내고 과일을 마음껏 따먹을 수 있는 과수원에 놀러 다니는 게 큰 낙이었다. 필자 제공

1970년대만 해도 서울 시흥이나 오류동, 과천 근처엔 과일 농장이 많았다. 원풍모방의 20대 여성 직원들은 주말이면 일정 금액을 내고 과일을 마음껏 따먹을 수 있는 과수원에 놀러 다니는 게 큰 낙이었다. 필자 제공


원풍모방 맞은편 영화제과에는 노조 지부장이 잘 사주던 곰보빵이 있었다. 영등포산업선교회나 시국 집회에 가면 늘 지부장이 있었고 집회를 마치면 우르르 함께 버스를 타고 돌아와 참새가 방앗간 못 지나듯 제과점에 들어갔다. 지부장이 “여기 넓적빵 주세요”라고 주문하면 여자 직원이 “아저씨는 맨날 넓적빵이래” 짐짓 눈을 흘겼다. 빵은 뷔페 접시만큼 크고 저렴해 여럿이 나눠 먹기 좋았다.



정류장 안쪽 골목에는 원풍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아하!” 할 충남식당이 있었다. 쫄깃한 떡국떡이 한줌 들어간 그 집 떡라면은 기숙사생들의 최애 메뉴였다. 수백인분의 밥을 대형 스팀으로 쪄내는 공장 식당 밥이 푸슬푸슬하고 근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고향에서 가져온 고춧가루에 간장을 섞어 밥을 비벼 먹었을까. 그러니 충남식당 아주머니가 직접 담근 겉절이와 떡라면의 맛은 그야말로 꿀맛이었다.



원풍모방 맞은편 길 건너에는 대림시장도 있었다. 시장 안 노점에는 잡채 순대 어묵 떡볶이도 있지만 특히 철판볶음이 근사했다. 월급날이나 친구가 찾아올 때의 특별식이었는데 소리만으로도 침이 넘어가는 지글지글 달군 넓은 철판에 순대 허파 당면 양배추를 듬뿍 볶아 먹노라면, 수다도 자글자글 익어갔다. 여자들끼리 노점에 앉아 술 마시는 건 좀 눈치 보이는 시대이긴 했으나 그래도 드물게는 소줏잔도 곁들이다 보면 우리의 휴일이 나른하게 저물었다.



티브이 속 ‘흑백요리사’의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음식들을 보며 문득 엉뚱한 상상을 해본다. 소박했던 옛 음식을 주제로 하는 경연이 있다면 어떨까? ‘오징어 게임’에 등장한 달고나가 세계 사람들의 이목을 모으지 않았나. 수십만원씩 한다는 명장의 요리는 언감생심이라 해도 그 시절 경비실 문틈으로 건네받던 만두와 찐빵 봉지의 따끈함은 음식을 넘어서는 그리움이니까. 자극적인 음식으로 입맛이 길들어진 시대라지만, 사실 우리가 정말 그리워하는 것은 혀를 찌르는 맛이 아니라 부족한 밥상에 숟가락 하나를 더 얹어 보듬던 풍경일지도 모르겠다.







장남수 | 경남 밀양 출생. 1958년생으로 열여섯살부터 공장에서 일하며 신정야학에서 공부했다. 원풍모방에서 노동조합 활동을 하다 해고된 뒤 노동운동을 하며 글을 써왔다. 늦깎이로 검정고시를 거쳐 성공회대에서 공부했다. 지금은 제주도에 살면서 걷고 배우며 글쓰기를 계속하고 있다. 1984년 ‘빼앗긴 일터’를 시작으로 ‘빼앗긴 일터, 그 후’ ‘파문’ ‘노동의 시간이 문장이 되었기에’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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