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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귀연 재판장님, ‘프로’는 끌려다니지 않습니다[김민아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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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귀연 재판장님, ‘프로’는 끌려다니지 않습니다[김민아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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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내란 사건 결심공판에 윤석열·김용현 피고인 등이 출석했다. 이날 결심 공판은 마무리되지 못한 채 13일로 연기됐다. 서울중앙지법 제공

지난 9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내란 사건 결심공판에 윤석열·김용현 피고인 등이 출석했다. 이날 결심 공판은 마무리되지 못한 채 13일로 연기됐다. 서울중앙지법 제공


법정 드라마의 주역은 전통적으로 검사였다. 트렌드가 변했다. 판사가 뜬다. <프로보노>에선 전직 판사 출신 공익변호사가, <판사 이한영>에선 현직 판사가 주인공이다. 소재도 달라졌다. 과거 검찰과 권력의 유착을 다뤘다면 이제는 법원 수뇌부와 거대 로펌의 결탁이다. 대법관과 로펌 설립자가 재판을 거래하고, 로펌 대표가 판사 사위에게 미리 작성한 판결문을 건네며, 고위 법관은 특정 로펌이 대리하는 사건은 모조리 패소하도록 사주한다. 몇 해 전만 해도 이런 드라마가 방송됐다면 법원행정처에서 항의했을 터다. 이제 법원은 고요하고 대중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사법 신뢰가 추락했다.

전 대통령 윤석열의 내란 우두머리 혐의 재판 결심이 미뤄졌다. 지난 9일로 예정됐던 검찰 구형과 피고인 최후진술은 13일로 연기됐다. 원인 제공자는 전 국방부 장관 김용현의 변호인들이었다. 이들은 쟁점과 무관한 궤변을 늘어놓고, 특검을 인신공격하고, 시민을 겨냥해 음모론을 제기했다. 일부 변호인은 “(말을) 빨리 하면 혀가 짧아 말이 꼬인다”며 노골적 지연 전술을 썼다.

법정의 권위를 모욕하고 조롱한 변호인들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담당 재판부인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5부(재판장 지귀연 부장판사)의 책임도 그 못지 않다고 본다.

재판장은 ‘법정의 왕’이다. 법정 내 모든 상황을 통제할 권위와 권한을 갖는다. 피고인이든 변호인이든 검사든 방청객이든 발언을 중단시킬 수 있고, 행동을 제지할 수 있으며, 퇴정은 물론 감치 처분도 할 수 있다. 재판부가 법정에 들어설 때 모두가 기립하는 것은 이 같은 ‘소송지휘권’을 존중한다는 표시다.

지귀연 재판장은 소송지휘권을 사실상 포기했다. 억지 주장을 제지하기는커녕 “(피고인 측의) 절차적 만족감도 중요하다”며 방관했다. 외려 변호인들의 항의를 받고 사과하기도 했다. “불쾌하셨으면 너무 죄송합니다. 100퍼센트 제 잘못입니다. 변호사님 말씀에 토 달아서 죄송합니다.” 기사를 읽고도 믿기지가 않아 녹화중계 영상을 확인했다. 재판장이 사과를 연발하는 사이 내란 수괴는 웃거나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지난 3월 지 재판장은 윤석열 측의 구속취소 청구를 받아들여 풀어줬다. 구속기간을 ‘날(日)’이 아닌 ‘시간(時)’ 단위로 계산해야 한다는 점을 이유로 들었다. 수십 년간 유지돼온 관행이 왜 대통령의 내란 사건에서부터 바뀌어야 하는지는 설명하지 않았다. 이후에도 검찰은 구속기간을 ‘날’ 단위로 산정하고 있다. 결국 윤석열 1인만이 ‘전무후무한’ 수혜자가 된 것이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5부는 본래 경제·식품·보건 전담 재판부다. 내란 사건을 선거·부패 전담부 대신 지귀연 재판부가 맡게 된 데부터 논란이 있었지만, 일단 넘어가자. 지 재판장은 피고인의 방어권 보장을 명분으로 ‘탈권위적 소송지휘’(라 쓰고 ‘만담 재판’ ‘예능 재판’이라 읽는다)를 해왔다. 묻고 싶다. 경제·식품·보건 사건 재판에서도 피고인의 방어권을 무제한 보장해왔는가? 소상공인이나 식당 주인이 누리지 못하는 혜택이라면 내란사범도 누려선 안 된다.

절차적 흠결을 남기지 않으려는 뜻은 이해한다. 그러나 재판은 TV토론이 아니며, 재판장은 토론 진행자가 아니다. 아니, TV토론에서도 패널리스트가 장광설을 늘어놓거나 혐오 발언을 하면 진행자가 개입한다. 재판 과정에 비춰볼 때 결심 공판에서 피고인 측 ‘시간 끌기’는 예측 가능했다. 미리 발언시간을 제한하는 등 소송지휘권을 행사했다면 모든 절차를 종결할 수 있었을 것이다.

토론 MC보다도 너그러운 판사를 두고 내란세력 변호인(이하상)은 말했다. “지귀연이 우리 편이냐? 절대 아니다 여러분. 저런 말에 속아선 안 된다.” 혀가 짧다고 했던 변호인(권우현)은 자랑했다. “(윤석열 전) 대통령님께서 저한테 ‘변론 정말 잘하고 있다’고 이야기하셨다”(이상 유튜브 채널 ‘진격의 변호사들’). 지 재판장은 스스로는 물론 법원 전체를 웃음거리로 만들고 있다. 기계적 형평이 내란 재판의 역사성·중대성을 앞설 수는 없다.


99%의 법관들이 격무에 시달리면서도 묵묵히 소임을 다하고 있음을 안다. 실제로 다른 내란 사건에는 추상 같이 단호한 재판장들이 있다. 하지만 지금 시민이 가장 주목하는 재판은 내란 수괴 윤석열 사건이고, 그 재판장은 지귀연 판사다.

시민은 그에게 정의의 사도가 되길 기대하는 게 아니다. 공직자로서의 책임감과 전문가다운 프로페셔널리즘이면 충분하다. 지 재판장은 “프로는 징징대지 않는다”는 어록을 남겼다. ‘프로’의 제1 덕목은 ‘마감 엄수’ 아닌가. 그는 밤을 새워서라도 결심 공판을 마무리했어야 했다.

13일 결심 공판이 다시 열린다. 지 재판장은 지난 9일 “다음 기일엔 무조건 끝내는 거다. 그 외에 옵션은 없다”고 했다. 이 말대로 하라. 프로는 마감을 지킨다. 끌려다니지 않는다. 현실의 사법은 법정 드라마와 달라야 한다.


김민아 경향신문 칼럼니스트

김민아 경향신문 칼럼니스트

김민아 경향신문 칼럼니스트 ma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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