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로 건너뛰기
검색
경향신문 언론사 이미지

나영이 수술 후 회복까지···한석주 전 교수 “기적을 만든 건 결국 아이 자신의 의지였다”

경향신문
원문보기

나영이 수술 후 회복까지···한석주 전 교수 “기적을 만든 건 결국 아이 자신의 의지였다”

속보
오태완 의령군수 '무고' 2심서 직 유지형
한석주 전 세브란스 어린이병원 소아외과 교수가 9일 서울고등법원 감정관리센터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권도현 기자

한석주 전 세브란스 어린이병원 소아외과 교수가 9일 서울고등법원 감정관리센터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권도현 기자


‘내 생애 최고의 수술’ 펴낸 세브란스병원 한석주 전 교수

2010년 국내 언론들은 조두순 사건 피해자 나영이의 수술 경과를 일제히 전했다. 수술을 집도한 당시 세브란스병원 소아외과 한석주 교수는 “나영이가 2차 수술 이후 배변주머니 없이 정상적인 배변이 가능하며, 성장한 뒤에는 자연임신도 가능할 것”이라고 밝혔다. 모두가 ‘아이를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안고 있던 당시, 마음의 짐을 조금이나마 내려놓게 한 순간이었다.

그로부터 약 16년이 흐른 지난 9일, 서초동 법원단지 인근에서 한석주 전 교수를 만났다. 그는 지난해 병원을 정년퇴임한 뒤, 40년간의 진료 현장을 담아낸 회고록 <내 생애 최고의 수술>을 출간했다. 현재는 서울고등법원 상임전문심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한 전 교수는 나영이를 “영리하고 똘똘하며 현실을 극복하려는 의지가 강한 아이”로 기억했다. 이어 “의사로서 할 수 있는 일은 최선을 다해 수술하는 것뿐이었고, 기적을 만들어낸 건 결국 아이 자신의 의지였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나영이 사건은 그의 삶에도 깊은 흔적을 남겼다. 몸과 마음을 회복해 나가는 여리지만 강한 생명력을 지켜보면서, 그는 생명을 위한 선택이라면 미루지 않고 최선을 다하겠다는 원칙을 세웠다. 이 신념은 수술대 위에서만 머물지 않았다.

2010년 ‘나영이 수술’ 두 차례 집도
성장 후 자연임신도 가능케 성공

집요하게 파고드는 ‘돈키호테’
VIP병동 ‘수상한 환자들’ 들춰내

작년 정년퇴임 후 개원하는 대신
서울고법 상임전문심리위원 맡아
바른 판단 돕는 일로 제2의 인생

10여년 전 ‘여대생 청부살인 사건’의 주범이던 윤길자씨가 형집행정지를 받고 병원 VIP룸에서 수년간 호의호식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국민적 공분을 산 일이 있었다. 이 사건이 알려진 계기에 한 전 교수가 있었다는 것은 잘 알려지지 않은 바다. 그는 당시 신촌 세브란스병원 장기재원환자관리위원회의 초대 위원장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어느 날 특이한 여자 환자 케이스가 회의 안건으로 올라왔어요. 2007년부터 유방암, 우울증, 당뇨병 등 12개 이상 진단명으로 우리 병원 20층 특실에서 4~5년간 입퇴원을 반복했던 윤씨의 기록이었죠. 특별한 치료 기록도 없는 ‘나이롱 환자’가 청부살인사건의 무기수였다는 것을 알고 난 후 소름이 쫙 끼쳤습니다.”


윤씨의 부당한 장기 입원 문제는 이후 장기재원환자관리위원회에 공식 안건으로 상정됐고, 윤씨는 쫓기듯 병원을 떠났다. 이제는 죄인이 교도소로 돌아가 마땅한 처벌을 받을 것이라 여겼지만, 그 당연해 보이던 원칙의 실현은 때로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윤씨가 퇴원한 지 몇주 뒤, 믿기 힘든 보고를 받았어요. 그가 교도소가 아닌 일산의 다른 병원으로 옮겨 입원했다는 겁니다. 어처구니가 없었고 분노가 치밀었어요. 그때부터 저는 윤씨의 수년간 입퇴원 기록과 외출 내역을 엑셀로 하나하나 정리하기 시작했죠. 그렇게 만든 자료를 피해자 유족인 하모씨의 아버지께 그대로 전달했습니다.”

이후 유족은 윤씨에게 허위 진단서를 발급한 주치의들을 경찰에 고소했고 이른바 ‘VIP 병동의 수상한 환자’ 문제는 사회적 논쟁으로 번져갔다. 한 전 교수는 정의감이나 공명심에서 비롯된 행동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딸을 잃은 아버지의 상황을 생각하니까 못 견디겠더라고요. 그저 내가 힘들어지는 것을 덜어낼 방법이 제보밖에 없었을 뿐이에요.”


한 전 교수는 2020년에도 ‘고유정 의붓아들 사망 사건’으로 법정에 섰다. 의붓아들의 죽음이 우발적 사고사인지, 아니면 고씨의 의도적인 압박 행위에 따른 결과인지에 대해 의학적 판단을 제시해 달라는 검찰의 요청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는 밤을 새워 32편의 관련 의학 논문을 찾았고, 이를 근거로 ‘의학적으로 사고사가 성립되기에는 어려운 상황’이라는 의견서를 작성했다.

세브란스병원 재직 시절, 한 전 교수는 동료와 후배들 사이에서 ‘돈키호테’라고 불렸다. 다소 무모해 보일 만큼 집요하게 파고드는 태도를 빗댄 말이었지만, 그의 행보를 돌아보면 고개가 끄덕여지는 별명이다. ‘호기심 많은 돈키호테’는 퇴임 이후에도 자신에게 딱 맞는 자리를 찾아냈다. 40년간 1만건이 넘는 수술을 집도한 명의로 병원을 개원하는 대신, 그가 선택한 곳은 법원이었다. 그가 맡은 서울고법 상임전문심리위원은 의료 소송 과정에서 의학적 쟁점을 검토하고 의견서를 제출하는 일을 한다.

새 재판 기록을 들여다볼 때마다 한 전 교수의 호기심은 왕성하게 샘솟는다. 그는 “판사가 아니기에 소송의 결론을 내릴 수는 없지만, 바른 판단에 이르도록 돕는 일에는 분명한 보람이 있다”고 말한다. 그는 가운을 벗었지만 ‘생명 앞에서 최선을 다하자’는 의사로서의 신념은 여전히 유효해 보인다.


이유진 기자 8823@kyunghyang.com

▶ 매일 라이브 경향티비, 재밌고 효과빠른 시사 소화제!
▶ 더보기|이 뉴스,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 점선면

©경향신문(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