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화·자연감소로 인력 구조 재편
직업보다 '직무'가 바뀌는 시대
직업보다 '직무'가 바뀌는 시대
AI 일자리 대체 (PG) |
(서울=연합뉴스) 심재훈 기자 = "AI가 내 일자리를 뺏을까?"라는 질문은 이미 식상해졌다.
이제 질문은 "기업은 언제, 어떻게 나를 AI로 대체할 것인가?"로 바뀌어야 한다.
생성형 인공지능(AI) 도입이 본격화되면서 기업들의 채용 공식이 송두리째 바뀌고 있다.
과거의 기술 혁신이 공장의 기계를 돌리는 육체노동자를 대체했다면 이번 AI 혁명은 쾌적한 사무실에 앉아 데이터를 만지는 화이트칼라를 정조준하고 있다.
글로벌 기업들의 실제 경영 사례와 국내 산업계의 움직임을 통해 AI가 바꾼 고용 시장의 현주소를 살펴봤다.
◇ "사람 안 뽑겠다"…글로벌 기업들의 선전포고
가장 적나라한 신호는 미국 빅테크와 스타트업 업계에서 터져 나왔다.
기업들은 '효율화'라는 명분 아래 AI 도입과 인력 구조조정, 신규 채용 축소를 동시에 진행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미국 IBM이다.
아빈드 크리슈나 IBM 최고경영자(CEO)는 언론 인터뷰를 통해 "향후 5년 내에 고객 응대나 인사(HR) 등 지원·백오피스 부서 업무의 약 30%를 AI와 자동화로 대체할 수 있다"며 해당 직무의 신규 채용을 일시 중단하겠다고 밝혔다.
이는 약 2만6천 명 규모의 비고객접점 인력 가운데 30%에 해당하는 7천800여 개 일자리 수준으로, AI가 사람의 업무를 보조하는 단계를 넘어 채용 자체를 제약하는 '보이지 않는 장벽'으로 기능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내 일자리는 어디에' |
핀테크 기업 클라르나(Klarna)의 사례는 더 구체적이다.
클라르나는 자사의 AI 챗봇이 한 달 동안 230만 건의 고객 상담을 처리했으며, 이는 정규직 상담원 700명이 수행하는 업무량과 맞먹는 수준이라고 밝혔다.
회사 측에 따르면 고객 만족도는 사람 상담원과 비슷한 수준을 유지하면서 문제 해결 시간은 평균 11분에서 2분 미만으로 단축됐고 반복 문의도 크게 줄었다.
이는 "700명을 직접 해고했다"는 의미라기보다는 같은 업무를 훨씬 적은 인원으로 처리할 수 있을 정도로 콜센터 및 고객 서비스(CS) 직군의 업무 자동화가 현실화했다는 신호로 해석된다.
영국의 통신기업 BT그룹 역시 2030년까지 전체 인력의 40%에 달하는 최대 5만5천 명을 감축하겠다고 발표했다. 이 중 1만 명 이상이 AI와 디지털 자동화, 네트워크 효율화로 대체될 것이라고 명시하면서, 인건비 절감과 기술 전환을 동시에 추진하겠다는 계획을 드러냈다.
이처럼 글로벌 선도 기업들은 즉각적인 대량 해고뿐 아니라 채용 축소·전환 배치·자연 감소를 통해 인력 규모를 줄이고 AI로 메우는 전략을 병행하고 있다.
◇ 한국 금융·게임업계의 '조용한 변화'
국내 상황도 다르지 않다.
특히 데이터 의존도가 높은 금융권과 IT·게임 업계에서 변화의 바람이 거세다.
시중은행들은 점포 통폐합과 함께 'AI 은행원' 도입에 속도를 내고 있다.
KB국민은행, 신한은행 등 주요 은행들은 키오스크·STM(스마트텔러머신) 형태의 'AI 텔러'를 배치해 통장 개설, 비밀번호 변경, 제신고 업무 등 단순 창구 업무를 맡기고 있다.
시중 은행 관계자는 "모바일·비대면 거래 비중이 급격히 늘어난 데다 AI 텔러와 자동화 시스템이 고도화되면서 과거 신입 행원들이 도맡았던 창구 업무 자체가 줄어 공채 규모를 줄일 수밖에 없는 구조가 됐다"고 말했다.
남은 인력은 고액 자산가 상담이나 기업 금융, 자산관리 등 고숙련 대면 영업과 복합 금융 자문으로 재배치되고 있다는 설명도 나온다.
AI 일자리 대체 (PG) |
게임 업계와 웹툰 시장에서는 '창작의 효율화'가 인력 구조를 흔들고 있다.
엔씨소프트[036570] 등 주요 게임사들은 자체 AI 모델을 활용해 캐릭터 삽화, 배경 아트, 모션, 스크립트 초안 작성 등을 수행하면서, 과거 외주(아웃소싱)를 주거나 보조 작가들이 하던 밑그림 및 채색 작업을 일부 대체하고 있다.
웹툰 업계에서도 배경 생성이나 채색을 AI에 맡기는 작가들이 늘고 있고, 플랫폼·툴 업체들이 'AI 어시스턴트' 기능을 앞다퉈 도입하면서 어시스턴트 직군의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다만 신입 아티스트·보조 인력 일자리가 실제로 얼마나 줄었는지에 대한 정량 통계는 아직 제한적인 만큼, 업계 안팎에서는 "단기적 일자리 축소"와 "AI와의 공존·업무 재편" 사이를 둘러싼 논쟁도 이어지고 있다.
◇ 한국은행의 경고…"고소득 전문직도 위험"
이러한 현상은 데이터로도 입증되고 있다.
한국은행이 발표한 'AI와 노동시장 변화' 보고서에 따르면 AI 대체 위험이 높은 직업군은 역설적으로 고학력·고소득 전문직에 집중돼 있다.
한국은행이 특허·직무 데이터를 결합해 산출한 'AI 노출 지수' 분석 결과, 일반 의사와 전문의, 회계사, 자산운용가, 변호사 등이 상위권에 올랐다.
이들은 방대한 전문지식을 학습하고 이를 토대로 문서·보고서 작성, 논리적 추론, 규정·판례 검색 등을 수행하는데, 이는 거대언어모델(LLM)이 가장 빠르게 능력을 끌어올리고 있는 영역이다.
일자리 위협하는 '로봇 종업원' |
중앙은행은 이런 직군에서 '직업 자체의 소멸'보다, AI 도입 이후 고용·임금 증가율이 둔화하거나 일부 업무가 자동화되면서 소득 격차가 벌어질 가능성을 특히 우려하고 있다.
반면 기자, 대학교수, 성직자, 가수 및 성악가 등은 AI 노출 지수가 상대적으로 낮거나 AI가 대체하기 힘든 '대면·창의·정서' 요소가 혼재된 직업으로 분류됐다.
그렇다고 안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들 직종에서도 단순 정보 전달, 기초 자료 조사, 초안 작성 등 반복적·정형적 업무는 AI로 빠르게 대체되고 있어, 남는 사람일수록 기획·심층 해설·현장 취재·관계 형성 등 '기계가 하기 어려운 역할'로 이동하라는 압력을 받고 있다.
한국은행과 해외 연구들은 공통적으로 "AI는 직업 자체를 한 번에 없애기보다는 직무 구성을 바꾸고, 고노출 직업군의 임금·고용 경로를 서서히 바꾸는 방식으로 영향을 미친다"고 지적한다.
◇ '살아남는 자' 조건은 AI를 부리는 능력
그렇다면 AI 시대, 생존할 수 있는 직업은 무엇일까.
전문가들과 각종 연구 지표는 '비정형 신체 활동'과 '고도의 사회적 상호작용'을 공통 키워드로 꼽는다.
배관공, 전기기사, 용접공 등 현장 기술직은 예측이 어려운 작업 환경, 미세한 손기술, 돌발 상황 대처 능력 등이 필수적이어서 당분간 AI와 로봇 기술이 완전히 따라잡기 어렵다는 평가를 받는다.
요양보호사, 심리상담가, 유치원 교사 등 사람 간의 정서적 교감과 신뢰 형성이 핵심인 직무 역시 AI가 보조 도구로는 활용되더라도 '대체'보다는 '보완'의 성격이 강할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결국 미래 노동 시장은 'AI가 할 수 없는 일'을 하거나 'AI를 도구로 부려 생산성을 극대화하는 일'로 양분될 가능성이 크다는 데에 업계 전문가들의 의견이 모이고 있다.
인공지능 AI 로봇 (CG) |
특히 AI 노출도가 높은 직업 안에서도 AI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더 높은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간의 생산성과 소득 격차가 벌어질 수 있다는 경고가 거듭 나온다.
대기업의 한 임원은 "AI와 경쟁하려 하기보다 AI를 부려서 새로운 서비스를 만들고 더 깊이 있는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살아남는 구조가 고착화될 것"이라고 말했다.
president21@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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