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션 김재영 |
“원청은 교섭에 응하라! 하청과의 약속을 지켜라!” 첫 출근의 기억은 눈이 아니라 귀로부터 비롯했다. 메가폰을 타고 쩍쩍 갈라지는 하청 노조원의 목소리가 문 너머로 들려왔다. 아직 어둑어둑한 한겨울 아침 여섯시 오십분의 한화오션 서문 앞. 신호등이 색을 바꿀 때마다 수백명이 조선소 안으로 몰아닥쳤다. 횡단보도를 지나면 아래로 하천이 있었고 문을 향해 가교 하나가 뻗어 있었는데, 얼마나 많은 인파가 올라섰는지 걸을 때마다 흔들대서 멀미가 날 지경이었다. “출입증 패용하세요, 출입증!” 문 앞 경비직들의 신경질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본래라면 출입증을 카드 리더기에 찍고 입장함이 원칙이었지만 불가능한 일이었다. 분 단위로 수백명씩 쇄도하는 노동자를 일일이 다 검사할 순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아침 식사는 무료였지만 거르기로 했다. 서문에서 사무실까지 거리가 한참 먼 탓이다. 무엇보다 나는 내 길 찾기 능력을 전혀 신뢰하지 않았다. 최소 한번은 길을 잃을 테고 만회하기 위해선 여유 시간이 필요하다는 판단이었다. 내 생각은 정확했다. 길을 잃었다. 내 판단은 오류였다. 조선소 길은 상상보다 훨씬 넓고 복잡했다. 길을 단숨에 물어서 찾아갈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큰 단위부터 차례차례 물어봐야 했다. 2도크가 어디인가요. 1안벽은 어디인가요. ××기업 사무실이 어디인가요. 결국 40분을 헤매고서야 간신히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입사 전 찍었던 증명사진으로 하선증과 작업증을 만들고, 미리 주문했던 안전화로 갈아 신고 사무실로 돌아가 대표님과 면담했다. 얼마 전 칠순을 맞이한 대표님은 대우조선공업 시절 조선소가 완공됐을 때부터 일했던 살아 있는 화석이었다. 당시 원체 말을 장황하게 하셔서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기억이 잘 나진 않는다. 다만 지금도 또렷하게 떠오르는 구절은 있다. 아직 젊으니 몇년 일 잘하면 원청으로 갈 길이 트일 수도 있다. 그땐 적극 추천할 테니 괜히 눈치 볼 필요 전혀 없다. 본인도 애써 키운 인재를 왜 원청에 갖다 바치고 싶겠는가. 기술자를 충분히 대우할 수 없는 하청 회사 사장님의 고충이 느껴졌다. 면담이 끝나곤 바로 반을 배정받았다. 곧 반장이 와서 데려갈 테니 대기하라고 했다. 텅 빈 탈의실 안, 기술교육원 마지막 날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탑재는 반장 바이 반장이다. 호랑이 반장한테 물리면 신입 때 눈물 쏙 뺀다. 이윽고 문이 열렸다. 나를 인솔한 반장님은 세상에, 범의 현신 그 자체. 넓은 어깨에 남성미 가득한 얼굴. 굵직한 부산 사투리. 테스토스테론이 아우라처럼 뿜어져 나오는 반장님은 나중에 알고 보니 체대 졸업생이셨다. “내는 딴 거 필요 없다. 시키는 거 잘하면 된다.” 시키는 걸 못했을 때 쏟아질 불호령이 메아리처럼 재생됐다. 예, 잘하겠습니다! 지킬 자신 없는 약속과 함께 첫 임무가 시작됐다. 공구를 수령하는 일이었다.
조선소 탑재 노동은 건설업으로 많이 비유되곤 했다. 실제로 많이 비슷하다. 특히 작업도 작업이지만 일을 하기 위한 준비 과정이 고됐다. 탑재나 건설업 둘 다 먼 작업 장소까지 도구를 직접 들고 가야 했다. 만약 필요한 도구가 하나라도 빠졌다간 작업 진행 불가. 먼 길을 되돌아가는 대참사로 이어졌다. 그렇기에 작업자들은 모든 작업에 대응할 수 있도록 온갖 도구를 다 들고 다녀야 했다. 그 도구들이 일일이 세면 족히 마흔개는 넘을 정도여서 베테랑들도 못 챙기는 일이 자주 발생했다. 당연히 따로 공구만 담당하는 관리자가 있었다. 대체로 소모품은 원청에서 직접 관리했고, 장비류는 하청업체의 공구장이 관리하는 식이었다. 특히 용접 부위를 다듬는 그라인더 종류는 잃어버리면, 조선소 말로 ‘망실’하면 월급에서 까니 조심하라는 경고를 받았다. 일하다 분실한 도구를 대체 왜 노동자가 배상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알겠다고 했다. 필요한 공구의 반도 못 챙겼는데 벌써 점심시간이 됐다. 조선소 안에선 시간이 뭉텅뭉텅 지나간다고 들었는데 정말이더라.
밥 먹고 탈의실로 돌아와서야 마침내 4반 선배들과 만날 수 있었다. “이야, 우리도 한국인 막내 들어왔네.” 조선소 생활 내내 은인 같았던 ㅇ형님은 내 첫날 사수였다. 인사 좀 돌리고 나니 곧바로 다시 현장으로 가야 했다. 조선소는 실질 점심시간이 무척 짧았다. 함바에서 시작한 기나긴 줄을 지나 숟가락 들기 시작하면 12시15분이었고, 밥 다 먹고 탈의실로 돌아오면 커피 한잔할 틈 없이 12시40분부터 움직여야 했다. 출근이 그러했듯 쉬는 시간 또한 배 타는 시간을 1시로 잡은 기준이었다. 배 안으로 들어서기 전엔 반 인원 전체가 모여 중간 점검을 했다. 작업 지시는 얼추 공사판 용어들과 비슷해서 알아들을 수 있었다. 문제는 장소. 20A, 80B, 등등 작업 위치를 말할 때마다 전혀 알아먹을 수가 없었다. 높이 약 30m, 길이 약 300m의 거대 선박은 클 뿐만 아니라 몹시 복잡해서 배 안에서 길 잃으면 나가기도 힘들어 보였다.
ㅇ형님과 향한 곳은 배 하부 쪽. 그중에서도 가장 밑부분에서 바로 위. 거북선으로 치면 선원들이 열심히 노를 젓는 부위였다. 사다리 타고 조심조심 내려가서 다시 비좁은 금속 통로를 지나고 있자니 어쩐지 잠입 액션 게임을 하는 느낌이었다. 우리가 당도한 곳은 바닥부터 갑판까지 쭉 이어지는 통로. 현장에서 ‘코파담’이라 이르는 장소였다. 사방에서 날카로운 용접음이 들려왔다. 오후에 할 일을 받았다. 구경하다가 가끔 청소만 하면 된다고 했다. 빗자루와 깡통 하나만 든 채 이곳저곳 쏘다녔다. 곳곳의 비좁은 장소에 억지로 몸을 비집어 넣은 채 비드(용접 뒤 접합부 띠)를 쌓아나가는 용접사들이 보였다. 내가 이런 일을 해낼 수 있을까. 얼이 나간 상태로 비질만 하다 보니 순식간에 쉬는 시간이 됐다. 도크 맨 아래에서 쉬는 동안 ㅇ형님이 물었다. 좁은 곳 왔다리 갔다리 안 힘들더냐. 키가 작아서 별로 안 불편했다고 하니, ㅇ형님은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제? 키 작은 그거, 조선소에서 복이다. 꺽다리들 여 오면 안전모 안 남아난다.” 단신은 내 오랜 콤플렉스였다. 내 열등감의 근원을 다행이라 느낄 날이 올 줄이야. 그렇게 현장에서의 정신없는 첫날이 지나가고 있었다.
천현우 | 창원시에서 여러 회사 전전하며 10년간 제조업 노동자로 일했다. 서울 성수동 미디어플랫폼 얼룩소(alookso) 등에서 2년 반 일하다 다시 경남으로 돌아왔다. 최근까지 거제 조선소에서 일했다. 문재인 정부에서 청년정책조정위원회 민간위원을 했다. 산문집 ‘쇳밥일지’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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