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숙영 UCLA 연극영화대학 교수 인터뷰
‘킹덤’부터 ‘케데헌’·‘폭군’까지…전통 중심
“美 MZ 세대의 열광, 한류 장기화에 긍정적”
다문화 측면에서 제작·스토리텔링 확장 필요
‘킹덤’부터 ‘케데헌’·‘폭군’까지…전통 중심
“美 MZ 세대의 열광, 한류 장기화에 긍정적”
다문화 측면에서 제작·스토리텔링 확장 필요
김숙영 캘리포니아대학교 로스앤젤레스(UCLA) 연극영화대학 교수 |
[헤럴드경제=손미정 기자] 2025년은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해였다. ‘케데헌’의 역대급 흥행에 힘입어 ‘K-컬처’는 가장 세련되고 감각적인 문화로 글로벌 시장에 자리 잡았다. 그 열풍은 K-컬처 뿐만 아니라 관광, 뷰티 등 타 산업까지 전방위적으로 확산됐다. 전문가들은 이를 ‘한류 4.0’의 본격적인 시작이라 진단한다.
불을 붙이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은 이미 지핀 불을 단단히 지키는 일이다. 뜨거웠던 2025년의 바통을 곧바로 이어받은 2026년의 어깨는 그래서 더 무겁다. 일각에서는 벌써부터 ‘케데헌 매직’을 더이상 기대하기 어렵지 않겠냐는 우려 섞인 목소리도 나온다.
지난 30여년간 대중 문화 및 문화사 연구에 매진해 온 김숙영 미 캘리포니아대학 로스앤젤레스(UCLA) 연극영화대학 교수는 최근 헤럴드경제와의 인터뷰에서 “초기 한류는 한국 문화의 가장 최신의 것들로 유행을 만들었다면 ‘한류 4.0’의 핵심은 전통”이라고 짚으며 “한류가 앞으로 장기적으로 지속되려면 가장 한국적인 것으로 승부를 해야한다”고 제언했다.
김 교수는 오랜 시간 강력한 소프트 파워로 문화 산업을 선도해 온 유럽의 사례를 들었다. 그는 “전세계인의 환상을 자극하는 것은 유럽의 현대적 삶이 아니라 과거 그들의 선조가 세우고 누렸던 역사와 전통의 것”이라면서 “한류도 같은 방향으로 패러다임이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근데 그 물꼬를 ‘케데헌’이 터줬다”고 설명했다.
90년대 미국으로 건너간 그에게, 오늘날 글로벌 대중문화의 중심부에 선 ‘K-컬처’를 지켜보는 감회는 남다르다. 특히나 김 교수는 10대들이 새 한류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고 했다. 김 교수는 “한참 소비 욕구가 큰 10대가 무엇을 원하고 하고 싶어 하는지가 중요하다”면서 “이들이 미국 사회의 중장년층으로 크면서 한국에 대한 좋은 이미지도 장기간 이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다음은 김 교수와의 일문일답이다.
-‘케데헌’ 열풍은 한류의 역사에 무엇을 남겼나.
▶나는 문화 인류학적으로 한류의 확산을 보는 사람이다. 그런 의미에서 케데헌 이전과 이후는 확실히 온도가 다르다. 케데헌의 성공은 다방면으로 의미가 있다. 무엇보다 그것이 가져온 인식의 전환이 컸다.
미국의 아이들은 한국이 굉장히 힙(hip, 개성있고 멋있는)하고 역동적인 문화를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그들의 상식이다. 나 같이 90년대에 유학을 간 사람들에게 이런 모습은 너무 낯설고 놀랍다. 30년 전까지만 해도 일어나지 않았던 인식의 변화가 오늘날 빠르게 일어나고 있는 것이 중요하다. 처음에 스트레이 키즈가 빌보드에 진입했을 때만 해도 난리가 났다. 그런데 이젠 그들이 빌보드 1위를 하는 것이 상식이 돼버린 시대다.
여기에 더해 한국을 주제로 하고, 한국인들의 재능이 십분 활용된 애니메이션이 전 세계에서 인기를 얻고 있는 것은 고무적이다. 애니메이션은 세대를 불문하고 사랑받는 장르인 데다, 특히 젊은층이 좋아하는 장르이기 때문이다. 덕분에 한국에 대한 긍정적 인식을 가진 어린아이, 초등학생들이 나중에 사회의 주류로 자랐을 때까지도 K-컬처 열풍이 장기화할 수 있는 계기를 케데헌이 만들어줬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왜 K-컬처에 열광할까.
▶일차적인 원인을 나라 안에서 찾고 싶다. 우리나라는 집약적 성장을 했지만, 동시에 고유의 전통도 잘 고수하고 있다. 압축 성장을 했기 때문에 전통적인 면을 잃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민주주의를 채택했고, 경제 규모 면에서도 선진국이다. 미국인들이 한국 문화에 대해 가지는 ‘익숙하지만 이국적’인 느낌은 여기서 오는 것이라고 본다. 그 느낌이 K-컬처가 가진 강점이다.
집약적 성장과 민주주의를 동시에 이뤄낸 정치·경제적 배경은 문화산업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경제적으로는 엔터테인먼트 산업에 투자할 여력이 생겼고,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 속에서 뜨거운 시민사회가 성장했다. 그 특징은 그대로 팬덤 문화로 전이됐다. 우리나라 국민들은 콘텐츠가 별로면 무섭게 비판한다. 그러니 제작자들이 끊임없이 수준을 높일 수밖에 없다. 흔한 로맨스물마저도 해가 갈수록 시청자와 팬들의 니즈를 충족시키면서 작품 수준을 무한대로 수직 향상시키는 것이 바로 K-콘텐츠다.
더불어 MZ(밀레니얼+Z)로 대표되는 젊은 세대는 윤리적인 소비를 하고 싶어 하는 세대다. 물건을 살 때 윤리적으로 만들어졌는지, 노동착취는 없었는지 등에 관심이 높다. 한국은 그런 측면에서 깨끗한 나라다. 타국을 침략해 식민지화한 적도 없고, 미국 같은 강대국과 등을 져서 배척되는 나라도 아니다. 어떤 나라도 한국에 대해 역사적으로 반감을 가질 이유가 없다. 정치적으로 강대국은 아니지만, 경제적으로는 강대국인 이른바 ‘미드 파워’(중견국)의 이점을 잘 활용한 사례라고 생각한다.
-대중문화 소비가 K-뷰티나 K-푸드 등 라이프스타일의 영역으로까지 확장 중이다.
▶우리나라는 스크린으로 문화를 소비하는 시간이 많다. 넷플릭스뿐만이 아니라 유튜브 시장도 활발하다. 덕분에 영화나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를 통해 소개된 1차 콘텐츠를 재해석하고 확산하는 2차 콘텐츠 시장도 촘촘하게 활성화돼 있다. K-컬쳐 소비가 라이프스타일까지 확장한 것도 이러한 2차 콘텐츠 창작자들의 영향이 컸다.
미국 소비자들의 성향도 작용했다. 이들은 무언가를 하고 싶어 하는 욕구가 강하다. 이들은 직접 해보고, 따라 해보는 것을 원래 좋아하는 소비자다. 내가 따라 했을 때 내 것이 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소비 패턴을 꿰뚫어 보고 가장 잘한 곳이 K-팝 업계다. K-팝 시장이 팬데믹 동안에도 체급을 잘 유지할 수 있었던 힘은 굿즈에서 나왔다. 사업적 측면에서는 현명했다고 본다.
김숙영 캘리포니아대학교 로스앤젤레스(UCLA) 연극영화대학 교수 |
-글로벌 시청자들은 어떤 콘텐츠에 끌리고, 열광할까.
▶전 세계인 누구나 봐도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주인공의 서사가 있어야 한다. 신화학자 조셉 캠벨이 쓴 전 세계 영웅을 분석한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에서 ‘진정한 영웅은 자기의 고향 커뮤니티에서 멀리 떨어져서 자라나고, 역경을 거치면서 자신의 진정한 정체성을 찾는 공통된 서사가 갖고 있다’고 분석했다. 캠벨은 ‘스타워즈’ 원작자 조지 루카스가 평소 ‘나의 요다(My Yoda)’라 부를 정도로 깊이 존경했던 인물이다. 루카스는 이 책의 내용을 자기 작품에 녹여 스타워즈란 히트작으로 만들었다.
‘케데헌’의 루미도 마찬가지다. 젊은 여성 안에 반은 악령이고 반은 헌터인 여러 정체성을 섞었다. 이러한 직관적인 영웅 서사를 심지어 남성이 아닌 여성에게 담아낸 것이 탁월했다. 전 세계가 공감할 수 있는 스토리 라인 구성이 핵심이었다고 생각한다.
-한류 4.0을 이어가기 위해 무엇이 필요하다고 보나.
▶한국의 전통을 보여주는 콘텐츠가 세계적으로 유통되고 폭발적인 영향력을 보여줬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케데헌 이전에 ‘킹덤’이 있었고, 이후에 ‘폭군의 셰프’도 큰 인기를 얻었다. 이제 한국이 ‘한국적인 것’으로 승부를 해도 되는 시기다. 초창기 한류는 한국 문화가 가진 가장 최신의, 현대적인 것을 앞세웠지만, 지금은 사극에서나 볼 법했던 굉장히 전통적인 것들이 전 세계를 움직인다. 한국의 전통적인 것이 예쁘고, 세련된 것으로 받아들이는 시대가 온 것이다.
소프트 파워가 강한 유럽만 봐도 전통과 역사가 가진 힘을 엿볼 수 있다. 세계인들은 현대가 아니라 과거 유럽이 걸어온 역사와 전통에 환상을 갖고 그 나라를 찾는다. 프랑스나 이탈리아를 가고 싶은 이유는 베르사유의 역사, 마리앙투아네트의 과거와 같은 것에 끌려서다.
그런 의미에서 한류가 장기적으로 지속되고 좀 더 대중화가 되려면 패러다임이 바뀌어야한다. K-팝과 민간 신앙을 적절히 배합한 ‘케데헌’을 통해 한국 전통문화가 세계 시장에서 대중화될 수 있는 문을 열었다면, ‘용의 눈물’ 같은 시대를 불문한 대작이 그 바통을 이을 수 있다. ‘케데헌’이 한류4.0의 마지막이 아닌, 과도기적 작품이 되길 바란다.
-캐나다인인 매기 강 감독의 등장으로 국내 콘텐츠 업계에서도 외부인에 대한 인식 변화가 감지된다.
▶외부자와 내부자가 모두 가능한 이중적 포지션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한국의 매력이 있다. 가령 매기 강 감독이 ‘케데헌’의 한약방 신이나 목욕탕 장면에서 보여준 유머는 한국에서 계속 생활해 온 이들은 쉽게 발견하지 못하는 부분이다. 외부자로서 한국의 일상 공간을 시각 측면에서 이국적으로 만드는 것은 외부자이면서 내부자인 이들이 가장 잘할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K-팝은 이미 해외에서 오신 분들이 업계에 깊게 자리 잡고 있다. 테디의 경우에는 미국 출신이기 때문에 음악 시장에서 1위를 할 수 있는 문법을 잘 안다.
더불어 한국은 빠르게 다문화 사회로 넘어가고 있다. 한국의 다문화적인 면을 역동성 있으면서 정서에 맞게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은 이미 다문화 사회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동시에 콘텐츠 제작 과정에서 다문화에 대한 배려도 필요한 때라고 본다. 미국에 사는 한인의 입장에서 보면, 한국 예능이나 일부 콘텐츠가 다문화 배경을 가진 이들에 대한 예의나 배려가 조금 없다는 생각이 든다. K-콘텐츠가 수출될 때 문화적 감수성이 반영되지 않으면 역효과를 낼 위험이 있다. 주의해야 할 점이라고 생각한다.
-벌써부터 ‘제2의 케데헌’이 나올 수 있을지에 대한 우려가 나온다.
▶한류의 미래에 대해 걱정하는 이야기를 30년이나 들었다. BTS가 나오기 전에 K-팝은 망했다고 말하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한국 문화의 저력은 대단하다. K-콘텐츠도 정말 매력적이다.
K-콘텐츠가 가장 잘하는 것은 끈끈한 인간관계를 포착하는 것이다. 미국은 개인주의 성향이 강하고, 외롭고 삶이 팍팍한 이들이 많다. 소속감이나 안정적인 우정, 동료에 대한 갈망도 크다. 그런 욕구를 채워준 것이 K-콘텐츠다.
K-팝도 그렇다. 팬층이 다양하다고 하지만, K-팝의 타깃은 젊은 층이다. 그런데 이렇게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다량의 고품질 음악을 지속적으로 생산하는 시장이 없다. 규모와 속도전 면에서 우리나라와 필적할 만한 경쟁자가 없다. ‘어렵다’, ‘힘들다’고 토로하는 건 이해하지만, 전 세계적으로 봤을 때 대중 문화의 무게 중심은 이미 한국으로 온 것 같다.
-2026년은 K-컬처 확산에 있어 어떠한 한 해가 되길 바라나.
▶물건을 살 때는 마음이 가야 한다. 가성비도 중요하지만 마음이 가지 않으면 사기 싫다. 그것을 국가에 적용했을 때, 특정 국가에 마음이 가게 만드는 것은 그 나라가 만드는 스토리다. 난 그것이 콘텐츠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2026년은 지난해 케데헌이 터준 물꼬를 타고 한국의 전통적인 매력이 더욱 발산하는 한 해가 됐으면 한다. 이젠 뷰티를 넘어서 K-패션이나 K-푸드 등 더 넓은 분야에서 ‘한국이 대세’라는 인식이 자리 잡고,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한국을 소비하는 것이 더 많은 국가로 확산하길 바란다.
■ 김숙영 교수는 한국의 대중문화와 공연 예술, 미디어 정치를 연구하는 문화학자다. 현재 UCLA 연극영화대학 교수를 맡고 있다. 노스웨스턴대에서 연극학 박사, 일리노이대에서 슬라브 언어 및 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다트머스대와 캘리포니아대 산타바바라 등에서 강의했다.
북한의 프로파간다 공연부터 K-팝과 K-드라마, 스트리밍 시대의 엔터테인먼트 산업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연구 업적을 남겼다. 지난해에는 세계적 권위의 ‘구겐하임 펠로우’에 선정됐다. 주요 저서로는 ‘K-팝 라이브(K-Pop Live)’와 ‘오징어 게임에서 살아남기(Surviving Squid Game)’ 등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