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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대의 아버지’ 진실규명한 검찰 파견직 “시선의 변동 경험했다” [안녕 진화위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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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대의 아버지’ 진실규명한 검찰 파견직 “시선의 변동 경험했다” [안녕 진화위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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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일 오후 이영호 서울중앙지검 범죄수익환수팀장이 서울 서초구의 한 카페에서 한겨레와 만나 인터뷰하고 있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2일 오후 이영호 서울중앙지검 범죄수익환수팀장이 서울 서초구의 한 카페에서 한겨레와 만나 인터뷰하고 있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안녕’은 작별이자 환영의 인사다.



과거 권위주의 정권의 국가폭력 사건을 조사해온 독립기구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 또는 진화위)가 분기점을 맞는다. 5년간 활동해온 제2기는 지난해 11월26일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국회는 제3기 탄생을 위한 법안 통과를 준비 중이다. 3기 설립은 이재명 대통령의 공약이었다. 한겨레는 2기를 돌아보고 3기를 바라보며 ‘안녕 진화위’를 시작한다.



‘진화위’는 그동안 부정적 뉴스로 자주 등장했다. 내란 옹호 논란이나 설립취지에 반하는 발언으로 시끄러웠던 몇몇 위원장과 국회에 나와서도 마스크를 벗지 않는 기행을 벌인 국정원 출신 간부 탓이었다. 부정기 연재될 ‘안녕 진화위’는 그동안 조명되지 못한 얼굴과 목소리를 찾아 나선다. 과거사 조사와 규명에 진심을 가진 이들의 이야기와 함께 3기로 가는 여정의 의지와 기대를 담아본다.



굿바이 진화위! 헬로 진화위!!





“조사관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끈기와 인내입니다.”



그는 이 말을 강조하고 또 강조했다. 사건기록에서 찾는 게 안 나오면 처음부터 다시 보고, 두 번 세 번 네 번 보고, 조사과정 다시 확인하고, 자료 채증 절차를 되짚어보는 게 필요하다”고 했다. 본인도 그렇게 한 끝에 증거를 못 찾아 막막했던 사건의 미로에서 빛을 보았다고 했다. 2024년 6월 진실규명(피해 확인) 결정된 고 이상규 소령의 해안경비법 위반 사건(신청인 이동주·이동춘) 이야기다.



해병대 창설을 최초 제안한 인물로 알려진 고 이상규(1920~1950) 소령은 한국전쟁 기간 해상인민군 사건에 연루돼 해군본부 고등군법회의에서 해안경비법위반죄로 징역 4년을 선고받고 마산형무소에 수감중 마산육군헌병대로 옮겨져 총살당한 인물이다. 고 이상규 소령은 항해술 등 현장 실무능력이 뛰어났고 부하들의 존경을 받았지만, 관료화된 해군 지휘부와 불편한 관계였다고 한다. 특히 백범 김구의 정치 노선을 지지하며 신현준(초대 해병대 사령관 역임) 등 만주국 출신 장교들과는 갈등을 빚었는데, 결국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비극적 운명을 맞이했다.



1946년 9월15일 조선해안경비대 진해기지를 방문한 김구 선생과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당시 중위였던 고 이상규 소령은 맨 뒷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다. 이상규 소령은 생전에 김구의 노선을 지지했다고 한다. 이동주 제공

1946년 9월15일 조선해안경비대 진해기지를 방문한 김구 선생과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당시 중위였던 고 이상규 소령은 맨 뒷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다. 이상규 소령은 생전에 김구의 노선을 지지했다고 한다. 이동주 제공


이상규 소령이 여순사건 직후 조작된 범죄사실로 영장 없는 불법 체포와 장기 불법감금을 당한 사실을 진실규명한 이는 검찰에서 파견 나온 조사관이었다. 이 사건은 구속 기간을 특정할 수 있는 문서가 존재하지 않아 장기 미제사건으로 남아있었다. 그럼에도 조사관의 끈기로 실마리를 풀었다. 주어진 판결문에 안주하지 않고 ‘사건 송치서’를 새로이 찾아낸 덕분이었다.



이 사건을 조사했던 이영호(55) 서울중앙지검 범죄수익환수부 소속 환수추적팀장을 지난 2일 오후 서울 서초구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이 팀장은 2기 진실화해위 활동 기간(2021~2025년) 연평균 53.6명(5년간 총 직원은 219명)이었던 국가직 파견 조사관 중 한 명이었다. 진실화해위에 파견된 때는 검찰 사무관(5급) 시험에 합격한 직후인 2024년 1월부터 2025년 2월까지였다. 그는 조사2국 조사6과 팀장으로 배치돼 고 이상규 소령 사건과 함께 1980년 비상계엄하 경찰에 의한 인권침해 사건(피해신청인 홍O주, 김O철)을 조사했고, 모두 진실규명 결정을 받았다. 공권력 개입에 의한 변호사 제명처분 인권침해 사건(고 태윤기)도 맡았으나 파견 기간 만료로 다음 검찰 파견자에게 인계했다. 이 사건은 결국 조사기간 부족으로 ‘조사중지’ 결정됐다.



검찰에 적을 둔 지는 27년째다. 9급 공무원 시험을 통해 2000년 검찰에 임용됐다. 2003년 8급으로 승진한 이후 사건과·총무과·공판과·집행과에 이어 검사실 참여계장으로 근무하며 다양한 형사사건 수사업무에 종사했다. 2016년 인천지검 특수부 근무 당시 공공부문 부정부패 분야의 공인전문수사관(블루벨트, 2급)으로 지정된 이후에는 여러 지검 특수부를 거치며 뇌물사건 수사와 부정부패 공무원 검거 등 공적 비리 사건 해결에 기여해왔다.



이 팀장은 검찰 수사 경험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고 진실화해위 파견 시절의 이야기만 한다는 조건으로 인터뷰에 응했다. 그는 1년이라는 짧은 파견 기간 현대사 공부와 함께 ‘시선의 변동’을 경험했다고 고백했다. “검찰에서 근무할 때는 피해자(일반적인 범죄 피해자)의 시선보다는 가해자(일반적인 범죄 피의자)의 시선을 더 신경 썼던 것 같은데, 진화위에 와서 피해자에게 공감하고 감정이입을 하며 조금 더 사건에 대한 따뜻한 눈을 갖게 됐다”는 것이다. “진실화해위가 정말 잘 됐으면 좋겠다”는 말도 남겼다. 오래 남아 국가폭력 피해자 구제라는 소명을 남김없이 완수하고 그들의 아픔을 보듬어주길 바란다고 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이영호 검찰 사무관이 2일 오후 서울 서초구의 한 카페에서 한겨레와 만나 인터뷰하고 있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이영호 검찰 사무관이 2일 오후 서울 서초구의 한 카페에서 한겨레와 만나 인터뷰하고 있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 이전부터 진실화해위원회의 존재를 알았나요?



“그런 이름의 국가기구가 있다는 것만 인지하고 있었어요. 들어와서 보니, 사람은 적은데 사건은 엄청나게 많더라고요. 어떻게 해내나 싶었는데, 굉장히 진취적으로 해나가는 것을 보고 놀랐어요. 사무실 안 공기는 조용하죠. 하지만 늘 긴장감이 느껴졌고, 직원들의 소명심이 대단했어요. 저희 과 과장님도 정말 충심을 다하시더군요.”



― 1년간의 파견 경험을 통해 얻은 게 뭘까요.



“20년 넘게 검찰에만 있다가 진화위에 파견 나간 1년은 ‘시선의 변동’을 경험한 귀한 시간이었어요. 그동안 저의 경우는 대체로 가해자(피의자)의 시선이 주가 되어 사건을 파악했는데, 진화위에서는 피해자(최초 피의자로 분류되어 불법구금 등을 당했던 국가폭력 피해자)의 시선이 주가 되더라고요. 가해자(피의자)가 억울한 취급을 받지 않는 것도 중요하지만, 피해자(일반적인 범죄 피해자)가 얼마나 처절한 고통과 아픔을 겪었는지 그 입장에서 살펴보고 공감하려는 노력을 하게 되었습니다.”



― 2기 종합보고서를 보면, 2025년 기준 진실화해위의 별정직 조사관은 96명(전문임기제 포함), 파견직 조사관은 73명(국가직 48명, 지방직 25명)이었습니다. 타 기관에서 나온 파견직과 진실화해위에서 따로 뽑은 별정직과의 위화감 같은 건 없었나요?



“저는 그런 게 특별히 없었어요. 다만 일부 별정직 조사관의 경우 가끔 사건 보고서 결재과정에서 간부들의 수정 의견에 대해 물러서지 않고 맞서며 강경한 태도를 보이는 모습을 목격했어요. 조사관들 스스로 가진 직분과 소명 의식이 상당하고, 나아가 실무자로서 책임감이 크기 때문에 그런 것 같아요. 그래도 결재 과정을 통해 다양한 의견들을 수렴하여 팩트에 더 가깝게 다가서고 보고서 완결성도 높일 수 있지 않을까요?”



이영호 팀장은 대학에서 통기타 동아리 활동을 시작해 지금도 본인이 매주 나가는 교회 주일예배 시간에 기타 세션을 맡고 있다. 2017년 11월 CBS ​기독교방송에서 주죄한 제28회 크리스천 뮤직페스티벌에 참여해 ‘주의 품’이라는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본인 제공

이영호 팀장은 대학에서 통기타 동아리 활동을 시작해 지금도 본인이 매주 나가는 교회 주일예배 시간에 기타 세션을 맡고 있다. 2017년 11월 CBS ​기독교방송에서 주죄한 제28회 크리스천 뮤직페스티벌에 참여해 ‘주의 품’이라는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본인 제공


― 어떤 분들은 별정직과 파견직에 큰 차이가 없다고 하고, 또 어떤 분들은 국가폭력 사건 조사의 전문성과 지속성을 위해 조사관직은 별정직으로만 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3기가 출범해도 경찰이나 검찰, 행정안전부·교육부·통일부 등 타 기관 공무원들의 파견은 지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별정직과 계약직 조사관들도 훌륭하지만 다른 국가기관에서 파견 나온 분들은 기관별 전문분야에 대한 깊은 이해와 지식, 대처능력이 있거든요. 예를 들어 구두 조사를 하게 될 때 조사자와 피조사자 사이에 돌발 상황이 생길 때가 있잖아요. 검찰과 경찰은 그런 때에 좀 더 유연하게 대처하는 훈련을 익혔다고 봐요. 피조사자가 잘 진술을 하다가 갑자기 공격적으로 돌변해도 서로 대치하기보다는 돌변한 원인을 파악해서 다시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고 우호적인 관계에서 진술을 청취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유도할 수 있는 스킬이 좀 더 있다고 할까요.”



― 고 이상규 소령 사건은 어떻게 맡았나요?



“저보다 먼저 검찰에서 파견 나와 있던 조사관 두 분이 담당했던 사건을 인계받은 거였습니다. 당시엔 진실규명 결정을 받기에 다소 증거와 논리가 부족한 상태였죠. 판결문만 있을 뿐 수사 기관에서의 구속 기간을 특정할 수 있는 ‘사건송치서’가 없었거든요. 사건 송치서는 최초 체포된 일시, 군 검찰 송치일 등 구속한 기간을 특정할 수 있는 서류입니다. 또한 해안경비법에 규정된 조항들의 위헌성과 관련한 판례가 전무한 상태여서 군 수사관들의 불법행위에 대한 고의를 인정할 만한 논리나 근거가 부족했습니다.



(군형법 및 군법회의법 제정 전에 시행되었던 해안경비법은 영장에 의한 구속 조항도 없고 수사기관에서의 각종 강제처분권을 고유권한으로 인정함으로써 수사기관의 권한 남용과 인권유린의 빌미를 제공했다는 평가를 받은 끝에 1962년 폐지됐다. 진실화해위는 고 이상규 소령 사건에서 형사소송법의 인신구속에 관한 규정을 적용하여 불법구금 여부를 판단했다- 기자 주)



기존에 확보한 자료들을 수차례 분석하고 확인하다가, 누락된 서류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정에 따라 자료 확보를 위한 첫 단계부터 다시 진행했어요. 국가기록원 나라기록관과 군 수사기관인 방첩사령부 등에 연락하고 재차 자료를 받는 와중에 해군 검찰단 소속 수사관과 접촉을 했는데, 이때 군에서 보관 중인 이상규 소령에 대한 판결문이 총 11쪽임을 알 수 있었죠. 기록 검토 당시 판결문이 10쪽이었음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거든요. 11쪽 전체를 보내달라고 의뢰해서 받았더니 맨 뒷장에 그토록 찾던 군 수사기관의 ‘사건송치서’가 붙어 있었습니다. 맨 처음 군에서 기록 보관 조치를 할 때 판결문과 사건송치서를 동일한 카테고리에 함께 보관했던 거였는데 진화위에 왜 마지막 장이 누락된 채 왔는지는 파악할 수 없었어요.”



1946년 이상규 김영희 부부의 결혼사진. 이동주 제공

1946년 이상규 김영희 부부의 결혼사진. 이동주 제공


― 사건송치서가 실마리가 된 셈이군요.



“네. 사건송치서가 발견되면서 군 수사기관이 이상규 소령을 얼마나 구속하고 있었는지를 알게 됐죠. 구속영장이 발부되더라도 군 검찰 구속 기간을 포함해 최장 40일을 넘길 수 없는데 이상규 소령은 사전 내지 사후영장이 발부되지도 않았을뿐더러, 79일 상당을 감금당했어요. 이를 근거로 해안경비법에 규정된, 영장 없이 구금할 수 있는 해안경비법 제29조 ‘금족과 감금’ 조항의 위헌성을 직접 다루게 되기까지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됐습니다.”



― 간첩과의 접촉도 조작이라는 결론을 냈죠?



“구속 기간과는 별개로 이상규 소령이 북한 측 간첩과 접촉했다는 취지의 판결문 범죄사실(해상인민군 가입과 비밀서신 수령)도 문제투성이라는 걸 밝혀냈어요. 해상인민군 가입 범죄사실과 관련해서 여러 자료를 취합한 결과, 간첩죄의 주범은 불명예 제대하고 전 급료는 몰수당했으며 총살당했다고 되어 있었거든요. 물론 간첩죄의 주범이 실존한 인물이었던 것임은 분명해 보이나, 병적기록뿐만 아니라 수감기록이나 형사사건부 등이 아예 발견되지 않았어요. 결국 주범에 대한 판결문 외에 수사·공판 기록은 확인이 안 됐고 수용기록도 발견되지 않아 판결 이후 행적이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사형당한 기록도 없었고요. 주범이 만들었다는 해상인민군의 존재도 인정할 만한 객관적 증거가 없었습니다.



또한 비밀서신 수령 범죄사실과 관련해 판결문에 설시된 ‘범죄 일시’에 이상규 소령은 여순반란 사건 진압을 위해 여수·순천 부근 해상에서 해군 임시정대를 지휘하고 있었어요. 주범의 지령을 받고 이상규 소령과 접촉해서 서신을 비밀리에 전했다는 공동피고인은 그때 진해에 근무 중이라 접촉 자체가 불가능했고요. 그 외에도 판결문에 각 범죄행위를 특정한 중요 날짜들 일부에 명백한 오기가 있었습니다. 이상규 소령에 대한 범죄사실은 전부 조작됐다는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었어요.”



고 이상규 소령의 해상인민군 조작사건 진실규명에 결정적 증거가 된 사건송치서. 구금 및 기소된 날짜 등이 적혀 있다. 진실화해위 보고서 갈무리

고 이상규 소령의 해상인민군 조작사건 진실규명에 결정적 증거가 된 사건송치서. 구금 및 기소된 날짜 등이 적혀 있다. 진실화해위 보고서 갈무리


― 이 사건의 배경이 된 해방 직후의 역사를 다시 들여다볼 기회였을 텐데요.



“1년간 진화위에서 현대사 공부를 하게 된 점도 의미 깊었어요. 당시는 야수의 시대가 아니었나 합니다. 이상규 소령이 백범 김구 라인이었다는 이야기까지 보고서에 담지는 않았어요. 이상규 소령의 반대편에는 (이승만의 심복이었던) 김창룡 특무대장 같은 사람들이 있었죠. 민족의 해방이나 부국강병은 좌우 공통의 이념이었는데, 그 실천 대응방안에서 너무 큰 차이가 났던 것으로 보입니다. 자기 쪽 라인이 아니면 무자비하게 쳐냈잖아요. 지금도 그렇지만 상생의 정치가 어려운 거 같아요. 결국 이상규 소령은 이승만 정권의 피해자였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 3기에서 활동할 조사관들에게 해주고픈 말씀이 있다면요.



“네. 조사관들은 늘 ‘끈기와 인내’를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동안 진화위 조사관들 대부분 그러한 태도로 근무했지만, 이 부분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지 않습니다. 사건기록에서 원하는 게 안 나오면 처음부터 다시 보고, 두 번 세 번 네 번 보고, 조사과정 다시 확인하고, 자료 채증 절차를 되짚어보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진화위에서 진행되는 사건은 전부 오래됐잖아요. 중요한 자료가 없는 경우가 태반이고, 참고인 진술 또한 청취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지만 이를 넘어서는 것은 자료 확보를 위한 고민과 다양한 방법 시도입니다. 끈기와 인내 없이는 안 됩니다.



대면조사나 전화 진술조사 때에도, 미리 결론짓고 그에 맞춰서 질문하고 답변을 듣기보다는 ‘사건이 발생하던 즈음 피조사자가 알고 있는 모든 정보를 듣는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팩트는 살아있는 생명체잖아요. 답변을 구체화 시킬 수 있는 객관적 자료나 사건 당시 배경 상황에 대한 질문들을 통해 피조사자 답변의 신빙성을 높일 수 있어야 합니다.”



이영호 팀장이 진실규명했던 ‘1980년 비상계엄하 경찰에 의한 인권침해 사건’(피해신청인 홍O주, 김O철)과 관련한 신문기사. 광주민주화운동이 신군부에 의해 무자비하게 진압되던 시기, 경찰은 조폭을 잡는다면서 일반 시민들을 불법 연행해 가혹행위를 가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피해자들은 1980년 비상계엄하에 폭력행위등처벌에관한법률위반 혐의로 경산경찰서 경찰들에 의해 불법적으로 연행되어 경북도경에 인계된 뒤에 물고문 등 가혹행위를 당했고, 군 검찰에 송치돼 재판을 받다가 공소기각 결정으로 석방됐다. 진실화해위는 2024년 10월 이들의 피해 사실을 밝혀내고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다. 진실화해위 보고서 갈무리

이영호 팀장이 진실규명했던 ‘1980년 비상계엄하 경찰에 의한 인권침해 사건’(피해신청인 홍O주, 김O철)과 관련한 신문기사. 광주민주화운동이 신군부에 의해 무자비하게 진압되던 시기, 경찰은 조폭을 잡는다면서 일반 시민들을 불법 연행해 가혹행위를 가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피해자들은 1980년 비상계엄하에 폭력행위등처벌에관한법률위반 혐의로 경산경찰서 경찰들에 의해 불법적으로 연행되어 경북도경에 인계된 뒤에 물고문 등 가혹행위를 당했고, 군 검찰에 송치돼 재판을 받다가 공소기각 결정으로 석방됐다. 진실화해위는 2024년 10월 이들의 피해 사실을 밝혀내고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다. 진실화해위 보고서 갈무리


― 예를 들어주시면요.



“참고로 저의 경우 ‘1980년 비상계엄하 경찰관에 의한 인권침해 사건’ 조사 때 피해자 2명이 고문과 구타당한 일시가 특정되지 않아 어려움을 겪었어요. 피해자 진술밖에 없었는데, 그조차도 두 사람이 서로 달랐거든요. 그러던 중 함께 고문과 구타를 당한 참고인을 찾아내고 수차례 설득 끝에 지역에 내려가 대면 조사를 했어요. 그 참고인은 ‘자신이 연행된 날에 시에서 주최하는 오일장이 열렸다’, ‘연행되고 이틀여 지난 시점에 사무실 2층에서 구타를 당했는데 티브이에서 김재규 사형 집행 뉴스가 나왔고, 이를 듣던 형사들이 박수를 쳤다’는 취지의 진술을 했어요. 그곳은 경북 경산시였죠. 이를 통해 김재규 사형집행 방송일을 예전 신문을 통해 특정하고 경산시 오일장에 대한 예전 기록들을 경산시청 홈페이지와 경산시에서 발간하는 ‘시지’ 에서 확인했어요. 결국 피해자들이 체포된 날과 물고문과 구타가 있었던 날까지 명확히 특정해서 진실규명에 다가갈 수 있었습니다.”



― 마지막으로 꼭 하고 싶은 말씀.



“진화위가 잘 되길 바랍니다. 진화위 1기와 2기에 신청되지 않은 사건이 여전히 많이 남아 있고, 2기에서도 시간 부족 등의 사유로 조사중지 결정된 사건들이 많잖아요. 3기에서 일할 조사관 여러분들이 국가폭력 피해자 구제를 위해 소명의식을 갖고 뛰어주시리라 믿습니다. 저도 앞으로 진화위 경험을 살려 검찰에서 수사할 때 범죄 피해자의 시선도 지금보다 더더욱 신경 쓰면서 근무하도록 하겠습니다. 진화위에서 조사활동을 하면서 피해자에 공감하고 감정이입도 하게 됐어요. 조금 더 따뜻한 눈을 갖게 됐다고 할까요? 앞으로도 퇴임할 때까지 그런 시선을 유지하려고 합니다.”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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