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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기이하다. 권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을 분노가 폭발할 만큼 자극하는 것이 내게 이렇게 큰 즐거움을 선사하니 말이다.” <벤야멘타 하인학교> 로베르트 발저
기대했던 지난 승진에서 누락된 32살 서진씨는 팀 동갑내기 선배가 이번에 과장으로 발령받았다는 소식을 들은 후부터 마음이 편치 않았다. 선배의 승진 얘기를 듣는 순간, 숨이 턱하고 막혔다.
대기업 취업 준비를 하느라 맘고생을 했던 서진씨와 달리 선배는 조기 졸업과 동시에 회사에 입사해 2년이나 경력 차이가 났다. 선배는 말수가 적고 굳이 나서지 않는 듯 보였지만, 정작 중요한 순간에는 핵심적인 역할을 빠짐없이 맡았다. 요란하게 성과를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자기의 공을 절대 빼앗기지 않는 사람이었다. 눈에 띄지 않으면서도 조용하고 확실하게 자신의 입지를 확장해온 선배와 달리 서진씨는 목소리와 제스처가 큰 쾌활한 성격이었다. 회의 분위기가 무거워질 때면 농담을 던졌고, 누군가 주저하면 먼저 다가가 격려했다. 하나 자신의 성과를 이야기해야 할 순간이 오면 늘 한발 물러섰다. 칭찬을 들으면 손사래를 쳤고, 새로운 기회가 생겨도 “저는 아직 그럴 능력이 없어요”라며 스스로를 낮췄다. 스스로 성과를 이야기하는 일은 불편했고, 다른 사람의 노력을 먼저 언급하는 게 편했다. 다음 기회를 기다리다 보면 언젠가 사람들이 알아줄 것이라고, 서진씨는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래서였을까. 선배의 승진 소식은 서진씨의 마음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부럽기도 하고, 화도 났다. 선배가 자기 몫을 정확하게 챙기는 계산적인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못나게 느껴지면서 복잡한 감정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선배가 승진한 후 선배와 대화를 할수록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지 않았다. 미묘한 기분 나쁜 감정들, 말 그대로 ‘긁히는’ 느낌이었다. 그러다 문득 서진씨는 선배 앞에서 회사 사람들과 자신이 얼마나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지 유독 자주 말하게 된다는 걸 깨달았다. 서진씨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아니, 내가 왜 선배 앞에서 기 싸움이라도 하듯 말이 많아질까? 선배만 승진해서 자꾸 ‘긁히는’ 건가?’ 이처럼 특정 인물과 관계 안에서 불편한 마음을 유독 느낀다면, ‘상호주관성(intersubjectivity)’ 개념으로 상황을 이해해볼 수 있다. 정신분석에서 다루는 상호주관성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각자의 주관성이 만나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으며 경험과 의미를 만들어가는 심리적 현상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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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생각한다, 고로 공존한다
상호주관성은 현상학이나 정신분석, 사회철학에서 자주 사용되는 개념이다. 다케우치 오사미는 데카르트를 인용하여 상호주관성을 쉽고 재미있게 표현했는데 “나의 ‘나는 생각한다’와, 타인의 ‘나는 생각한다’ 사이에서 성립하는 공존 관계, 즉 ‘우리는 생각한다’의 존재방식”이라고 말했다. 즉, 나의 주관성과 타인의 주관성, 두 개의 서로 다른 주관성 사이에서(inter) 일어나는 공통 경험을 살펴보면서, 서로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이는 마음을 고립된 내부 장치로 바라보는 시각보다 타인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형성되는 관계적 맥락을 다루는 개념이다.
상호주관성은 상호주체성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페미니스트 정신분석가 제시카 벤자민은 정신분석을 ‘주체(subject)’와 ‘주체(subject)’의 학문이라 말하며, 상호주관성의 차원에서 타인을 나와 마찬가지로 행위하는 주체로 인정하면 평등한 인간관계가 가능해진다고 말했다. 또한 주디스 버틀러는 <살 만한 삶과 살 만하지 않은 삶>에서 현대사회에서 상호주체성(상호주관성)이 중요한 이유는, 모든 살아 있는 존재가 타인과 관계를 맺으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며 타인의 수많은 삶이 살만하지 않다면 나의 삶 역시 살 만하지 않다고 강조했다.
관계 내에서 상호주관성을 살펴본다는 것은 마음과 마음이 만나 어떤 일이 일어나고 무엇을 주고받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이다. 사람의 감정과 반응은 혼자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관계 안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만들어진다고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 마음을 위주로 살펴보는 ‘한 사람’ 심리학이 아니라, 우리는 서로에게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가 관계를 살펴보는 ‘두 사람’ 심리학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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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투가 아니라 상호작용이에요
서진씨가 ‘긁힌다’고 느끼는 미묘한 불편함을 성격이나 질투심으로만 설명하면, 관계 내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주고받는 자극과 반응이 비중 있게 다루어지지 않는다. 상호주관적 관점은 두 사람이 서로에게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가를 본다. 따라서 서진씨의 성격이나 방어기제, 억압된 과거 경험들로만 상황을 분석하지 않는다. 선배의 어떤 태도와 반응이 서진씨를 그토록 ‘긁히게’ ‘만들었는지’, 서진씨 앞에서 선배는 어떻게 ‘긁히는지’, 혹은 서진씨와 선배가 서로를 ‘긁고’ ‘긁히는’ 것은 아닌지 면밀히 살펴본다. 선배 앞에서 사람들과의 관계를 내세우려 한 서진씨의 마음이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이 만들어낸 상호 작용의 맥락 속에서 형성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서진씨가 다른 사람 앞에서 하지 않던 말을 선배에게 유독 많이 하게 될 때는 선배가 관리직 스트레스를 말할 때였다. “과장이 되니까 결정할 게 많아서 스트레스받아요. 서진 대리님은 실무에 집중할 수 있어서 좋겠어요”라든가, “새로운 기획 보고 때문에 어제도 밤을 새웠어요. 대리 때가 더 편했던 것 같아요”처럼 선배가 진급 후 늘어난 업무나 달라진 일상을 말할 때마다, 서진씨는 선배가 굳이 과장과 대리의 차이를 자꾸 언급한다고 생각해 ‘긁혔던’ 것이다. 들여다보면 서진씨 혼자만 ‘유독’ 달라진 행동을 하게 된 것은 아니었다. 선배가 업무의 중압감을 말할수록, 서진씨는 동료들과의 관계를 유지하고 감정을 나누는 일도 결코 쉽지 않다 말하고 싶었다. “그러게요. 어제는 팀 막내가 고민 상담하고 싶다고 해서 밤늦게까지 맥주를 마셨더니 오늘 많이 피곤해요”처럼 자신도 선배 못지않게 바쁘고 피곤하다는 이야기를 서진씨가 하게 되면서 둘의 대화는 누가 더 힘든지, 누가 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지 은근히 경쟁하듯 서로를 ‘긁는’ 대화가 되었다. 두 사람의 미묘한 감정과 긴장감은 서진씨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두 사람 사이에서 만들어진 관계 역동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그 말이 왜 그렇게까지 기분 나쁠까?’ 혹은 ‘별말이 아닌데 자꾸 마음에 걸리네’ 라고 생각한 적 있는가?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상호주관성은 관계라는 상호작용 속에서 공유되고 형성되는 경험이나 생각을 다룬다. 감정은 혼자 만들어지지 않기 때문에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관계의 맥락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내가 왜 이 사람 앞에서 이렇게 행동할까?’라는 질문은 따라서 ‘우리 사이에서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나?”의 질문으로 바뀐다. 다음은 유독 특정 인물과 상황 앞에서 다르게 반응하고 있음을 알아차리게 해주는 신호들이다.
“나는 왜 이 사람 앞에서만 달라질까?”
유독 다른 관계 반응을 알아차리는 신호들
1. 말과 행동에서 드러나는 변화
□ 특정 사람이나 상황 앞에서 유독 말이 많아지거나 설명이 길어진다.
□ 평소 말하지 않는 깊은 속마음이나 과거 이야기를 자꾸 꺼내게 된다.
□ 다른 사람에게는 평소에 쓰지 않는 말투와 태도를 사용한다.
□ 만남 이후 ‘왜 내가 그렇게 행동했지?’ 평소와 다른 모습을 반추한다.
2.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변화
□ 그 사람을 만나기 전부터 유독 긴장하거나 준비를 많이 한다.
□ 대화 중에도 계속해서 ‘내가 지금 어떻게 보일까’ 의식한다.
□ 상대방의 말 한마디를 굉장히 오래 곱씹게 된다.
□ 그 사람 앞에서 나 자신이 유독 작아지거나 과해진다고 느낀다.
3. 반복되는 관계의 변화
□ 만날 때마다 특정 역할과 대화 패턴이 자연스럽게 반복된다.
□ 만나면 피곤한데도 관계를 끊지 않고 지속한다.
□ 다른 관계에서는 하지 않는 행동을 이 관계에서만 반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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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방적인 관계 역학에서 벗어나 ‘지금 우리 사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살펴보게 되면, 지금 내가 경험하는 현실이 한쪽의 역할이나 책임으로만 발생하지 않음을 알게 된다. 우리의 삶은 관계 속에서 서로에게 연결되어 있는 만큼 끊임없이 반응한다. 당신이 나를 반응하게 하고, 나는 당신에게 반응한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우리는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는다. 상호주관성은 어느 한쪽의 책임을 따지는 질문에서 나는 이 관계에 무엇을 기여하고 있는지, 너와 나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살펴보게 한다.
생각해볼 질문들
1. 어떤 사람이나 특정 상황에서 평소와 다른 모습으로 반응할 때가 있나요?
2. 유독 다르게 반응하는 관계 속에서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3. 반복되는 관계 패턴 속에서 나의 반응이 달라진다면 상대방의 반응도 달라질까요?
오늘의 용어: 상호주관성(intersubjectivity)
상호주관성은 사회심리학, 교육학, 정신분석 등 다양한 분야에서 연구되고 있지만, 본래는 철학의 주요 개념이었다. 에드문트 후설의 현상학, 후기 근대 철학의 구성주의,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았으며, 에마뉘엘 레비나스의 철학에서 타자에 대한 절대적 책임성과 감수성이라는 윤리적 의미로 확장된다. 의사소통, 사회적 상호작용, 문화적 이해의 기반이 되며, 사람들이 각자의 현실을 연결해 타인과 관계를 맺는 방식을 보여준다.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상호주관성의 개념은 1978년 조지 앳우드와 로버트 스톨로로우에 의해 처음 사용되었다. 1984년 발간한 공동 저서 <주관성의 구조(Structures Of Subjectivity)>에서는 ‘정신분석적 현상학’을 통해 두 주체의 만남이 서로에게 무의식적인 영향을 주고받으며 변화의 현상을 만들어내는 과정으로 설명된다. 상호주관성 이론은 심리적 현상을 개인의 고립된 정신 내적 산물이 아니라 상호작용하는 주관성의 경계에서 형성되는 것으로 이해한다.
노은정의 현대인을 위한 정신분석사전은?
개인이 느끼는 일상의 정서와 감정에는 무의식적인 모순과 억압된 기억, 문화적 압박과 사회적 이데올로기가 뒤섞여 있습니다. 때문에 잘 이해하기는 어려웠던 마음을 돌보는 일은 나를 힘들게 하는 감정을 다양한 각도에서 살펴보는 데서 시작됩니다. 모호하고 낯선 마음에 하나씩 이름을 붙여보는 노은정의 현대인을 위한 정신분석사전(https://www.hani.co.kr/arti/SERIES/3316?h=s)을 한겨레 오늘의 스페셜에서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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