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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를 찾아 떠난 흑인 노예 부부의 탈출기

동아일보 김소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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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를 찾아 떠난 흑인 노예 부부의 탈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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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 노예 남편 아내 / 우일연 지음·강동혁 옮김 / 688쪽·2만2000원 / 드롬

모두가 잠든 새벽 4시. 한 흑인 여성이 조용히 일어나 가슴을 납작하게 묶는다. 머리를 싹둑 자른 뒤 남성용 고급 구두에 발을 끼운다. 모자와 색안경, 습포제까지 붙이니 이목구비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오른팔은 부목을 대고 팔걸이에 넣었다. 어느 모로 보나, 그는 돈 많고 몸이 불편한 백인 신사다. 그는 남편과 함께, 주인 부부가 잠든 틈을 타 집을 빠져나온다.

1848년 12월, 엘렌과 윌리엄 크래프트라는 흑인 노예 부부는 미국 남부 조지아주 메이컨에서 자유가 있는 북부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까지 탈출을 감행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소설은 크래프트 부부가 탈출을 결심한 날, 집을 떠나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놀랍게도 이들은 여느 흑인 노예들처럼 숲을 헤매거나 강을 건너고, 별자리를 따라 길을 찾는 방식으로 탈출하지 않았다. 오히려 온 세상이 지켜보는 한복판에서, 당시의 최신 기술을 활용해 움직였다. 증기선과 역마차, 철도를 타고서다. 아내는 백인 남성 주인, 남편은 그를 수행하는 흑인 노예로 위장했다. 오른손을 팔걸이에 넣은 데에도 이유가 있다. 글을 읽고 쓰지 못했기에 ‘글 쓰는 팔을 다쳤다’는 설정. 서명을 대신 부탁할 명분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이 탈출은 미 노예제 역사상 가장 치밀하고 대담한 실화로 꼽힌다.

이를 소설로 풀어낸 작가의 이력 역시 주목할 만하다. 한국계 미국인인 그는 이 책으로 2024년 한국계 최초로 퓰리처상을 받았다. 노예제와 남북전쟁은 오랫동안 백인 역사학자나 아프리카계 미국인 작가들의 영역으로 여겨져 왔는데, 가장 미국적인 주제를 한국계 작가의 시선으로 풀어냈다.

그 결과는 특정 집단의 역사를 넘어, 인간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로의 확장이었다. 작가는 한국 독자들에게 쓴 서문에서 말한다.

“이 이야기는 미국 이상의 무언가를 다룬다. 한국인들에게도 공감을 이끌어낼 만한 보편적 주제다. 억압을 벗어나 자유를 추구하는 인간의 이야기며, 불의에 대항한 투쟁에 관한 이야기다.”


처음에는 부부의 대담한 무용담에 시선이 끌리지만, 읽다 보면 당시 노예제의 풍경에 숨이 턱턱 막힌다. 탈출을 결심한 뒤 여러 자녀 중 누구를 남기고 누구를 데려갈지 택해야 했던 한 어머니의 사연, 인간이 인간을 사고파는 노예 경매장의 풍경이 그렇다. 박진감 있는 서사 속에서도 작가는 속도를 절제한다. 제도와 관습, 일상의 세부를 촘촘히 쌓아 올려 그 시대를 생생하게 되살린다. 손에 땀을 쥐게 하면서도, 동시에 역사를 가볍게 소비하지 않는 균형감이 이 책의 큰 미덕이다.

작가는 책에서 ‘노예(slave)’와 ‘주인(slaver)’ 대신 ‘예속 피해자(enslaved)’와 ‘예속 가해자(enslaver)’란 표현을 쓴다. 노예와 주인이란 두 범주의 인간이 마치 ‘원래부터 존재했다’는 듯한 기존 용어의 세계관을 벗기기 위해서다. 납치와 인신매매란 ‘가해 행위’가 이 관계의 본질임을 분명히 드러내려는 선택이다.

200년 전 자유와 인간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걸었던 두 사람. 안전과 자유, 그리고 자신들만의 가족이라는 작은 광장을 허락받기 위해 탈출을 감행한 이들의 여정은, 혐오와 차별이 다시 고개를 드는 21세기에 인간이 인간에게 어디까지 잔혹해질 수 있는지, 동시에 인간이 인간을 어디까지 구원할 수 있는지 되묻는다.

김소민 기자 som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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