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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아의 선물]김치 한 통, 쌀 한 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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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아의 선물]김치 한 통, 쌀 한 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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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자신의 여러 친구를 유산으로 남겼다. 차라리 돈이나 집을 남길 일이지, 라고 비죽거렸다, 처음에는. 아버지의 친구들이 아버지 가고 난 뒤 엄마와 나를 자꾸만 찾아왔고, 안 친한 사람들이 자꾸 찾아오니 불편한 마음으로 인사를 나눴다. 그런 세월이 십사 년, 이제는 아버지의 친구들이 내 친구가 되었다.

곡성에서 농사짓는 한 아저씨는 아버지보다 스물일곱 살이나 어리다. 그런데도 친구로 자주 어울렸다. 내가 서울에서 내 인생을 사는 동안 고향에 있는 부모님은 나날이 초라하고 쓸쓸하게 늙어가는 중이었다. 그걸 그때는 알지 못했다. 늘 그렇듯 강하게 잘살고 있으리라 믿었다. 그 무심한 딸 대신 곡성 아저씨는 걸핏하면 아버지를 찾아왔다. 아버지는 아파트 경비로 일하고 있거나 사촌의 밤밭을 빌려 밤농사를 짓고 있었다. 어느 쪽이든 벌이가 변변치 않기는 매한가지, 아저씨는 틈만 나면 구례로 달려와 아버지에게 소내장탕이나 국밥에 소주를 대접했다. 갚을 길도 없으면서 아버지는 무람없이 잘도 얻어먹었다. 부모님이 잠시 서울로 옮겼을 때 구례에서 서울까지 이삿짐을 옮긴 것도 아저씨였고, 늘그막에 다시 구례로 돌아왔을 때 역시 아저씨가 이사를 도맡았다. 변변치 않은 딸자식이 난생처음 취직해서 원주로 이사할 때 아버지는 호기롭게 외쳤다.

아빠가 트럭 가꼬 간다.

나중에 아저씨에게 들었다. 본 적도 없는 내 이사를 해주기 위해 아저씨는 신새벽 곡성 집을 나와 구례에서 아버지를 싣고 서울로 왔다. 거기서 짐을 실은 뒤 내 첫 직장이 있던 원주로 가 짐을 내린 뒤 다시 구례에 아버지를 떨구고 곡성으로 돌아갔으니 천 킬로 넘는 강행군을 한 것이다. 그것도 하루 만에. 아무나 그런 마음을 낼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그때는 몰랐다. 그때는 참 많은 것을 몰랐다.

아버지 간 뒤 두어 달에 한 번씩 찾아와놓고도 아저씨는 술만 마시면 전화를 했다. 미안하다고. 어머니 혼자 남으면 자식처럼 찾아뵙겠노라 아버지와 약속했는데 자기가 못난 사람이라 약속을 못 지키고 있다고. 친자식도 아니면서 왜 저러나, 솔직히 처음에는 귀찮기도 했다. 이상도 하지. 사랑은 이슬비처럼 사람의 마음을 적시는 모양이다. 야멸찬 내 마음에 아저씨가 슬그머니 들어온 걸 보면.

아저씨는 과장 좀 보태 사람 머리만 한 전복이며 사람만 한 토종닭이며, 쌀에 찹쌀에 참기름에, 올 때마다 바리바리 들고 오는데 나이 들어도 여전히 변변찮았던 나는 제대로 무엇을 해드린 적이 없다. 그러다 떴다! 드디어 무언가를 해드릴 수 있겠구나. 오래 고민했다. 마땅히 해드릴 게 없었다. 마침 아저씨 칠순이라는 걸 우연히 알게 되었다. 어른스러운 아저씨가 나보다 고작 아홉 살밖에 많지 않다는 사실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나는 대체 어떻게 살아온 것인가, 자괴감도 들었다.


칠순 잔치를 해주겠노라 아무리 꼬드겨도 아저씨는 넘어오지 않았다. 자기가 뭘 해줬다고 그런 대접을 받느냐는 것이었다. 몇 달이나 설득해도 넘어오지 않아 종내는 협박을 했다. 내 마음대로 곡성에서 제일 비싼 집에 백인분 식사 예약을 하겠노라고. 결국 비싸지 않은 적당한 집에서 아저씨 친구들 몇 분께 밥을 살 기회가 주어졌다. 딸도 돌아보지 않은 아버지의 늘그막에 아저씨 같은 젊은 친구가 있어 내 아버지의 말년이 외롭지 않았노라 짧은 축사를 하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고였다. 내 아버지가 있었다면 처음으로 뿌듯해하지 않았을까, 싶어서였을 것이다.

식사가 끝나고 아저씨와 아저씨 쏙 빼닮아 점잖은 아들과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누군가 불렀다. 식사 자리에서 인사를 나눈 아저씨 아내의 친구였다. 처음 보았고 앞으로도 볼 일 없을 그분이 내 차가 어딨냐고 물었다. 전화 한 통을 하는가 싶더니 이내 차 한 대가 내 차 옆에 섰다. 그분은 20킬로짜리 쌀 한 부대와 김치 한 통을 기어이 내 차에 실어주었다.

머리털 나고 이렇게 좋은 자리를 첨 보요. 내가 다 눈물이 납디다.


그 좋은 자리를 만든 것은 곡성 아저씨다. 내 아버지 성품도 한몫 거들었겠지. 좋은 마음은 나쁜 마음을 이겨 낸다. 아저씨 좋은 마음이 못난 내 마음을 이겨 내지 않았는가. 이름도 모르는 아주머니의 쌀과 김치로 겨울을 났다. 참으로 맛났다.

정지아 소설가

정지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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