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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걸칼럼] 환율에 함부로 칼을 대지 말라

매일경제 김선걸 기자(sungirl@m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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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걸칼럼] 환율에 함부로 칼을 대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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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저스 쿠팡 대표 "산재 승인 취소 소송·감사청구, 법적인 권리 존재"
"어떤 중앙은행도 시장보다 클 순 없다(No central bank is bigger than the market)."

지난 24일 성탄 전야. 캐럴과 함께 이 격언이 떠올랐다.

오전 9시, 당국은 외환시장에서 전격적인 구두 개입에 나섰다. "당국의 강력한 의지와 실행 능력을 곧 확인하게 될 것."(기획재정부·한국은행 공동 자료)

환율은 수직으로 떨어졌다.

이후 이날 환율 그래프는 '톱니바퀴' 형태다. 환율이 오르면 내리누르고, 또 오르면 누른 수십 차례의 흔적이다. 결국 1달러 대비 원화값은 1449.8원. 환율은 전날보다 33.8원 급락(원화가치 상승)했다. 한국 외환당국의 건재함은 증명한 셈이다. 그간의 고환율 걱정도 한숨 덜었다. 그러나 외국인들의 휴가로 거래 규모가 평소 절반인 외환시장. 투박한 개입에 대한 염려의 시선도 꽤 있다.

환율 상승은 물가 상승 등 경제에 미치는 악영향이 크다. 그러나 수급에만 집착해 국민연금이나 외환보유고를 섣부르게 동원하다간 화를 자초한다.


역사는 환율 집착의 결말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1992년 '블랙 웬즈데이'.

영국 중앙은행(BoE)이 '소로스 패거리'에게 굴복한 기록이다.

1992년 9월 16일, 영국 파운드화는 조지 소로스의 퀀텀펀드로부터 공격받았다. 당시 ERM(유럽환율메커니즘) 가입으로 파운드를 독일 마르크에 고정한 것이 실책이었다.


BoE는 기준금리를 10%에서 12%로 끌어올려 방어에 나섰다. 그러자 퀀텀펀드가 100억달러 공매도에 나섰고, 승냥이처럼 지켜보던 헤지펀드들이 동참했다. BoE는 하루 27억파운드(약 50억달러)를 쏟아붓고 금리를 15%까지 올렸으나, 파운드는 무너졌다.

결국 BoE는 ERM 탈퇴와 파운드 15% 평가절하(환율 인상)를 발표했다. BoE의 완패였다.

소로스는 단 하루 만에 10억달러(약 1조5000억원)를 벌어들였다. 당시 삼성전자 연간 이익이 원화로 조 단위가 안 될 때였다.


파운드화는 브레턴우즈 체제(1944~1971년)까지 국제결제의 60%를 차지한 기축통화다. 이를 무한정 찍어낼 수 있는 영란은행이다. 그런데도 펀더멘털을 고려하지 않고 기술적 환율에 집착하다 헤지펀드의 먹이가 됐다.

지난 24일 한국 당국은 달러를 얼마나 썼을까. 수조 원이라는 추측이 나온다.

물론 원화 연말 종가를 절상시켜 GDP와 기업 재무를 좋게 마무리하려는 의도는 이해된다.

그러나 정치권 눈치를 보느라, 혹은 단기 숫자에 급급해 국민연금이나 외환 보유의 문턱을 낮췄다면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한국은 지금 반도체, 자동차 등의 수출이 견조하다. 경상흑자로 외환위기 운운할 상황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기술적인 환율 방어는 투기자본을 끌어들이는 밑밥만 될 수 있다.

환율은 양국 간 △금리 △물가상승률 △경상(무역)수지 △경제성장률의 차이에 영향받는다. 특히 직관적으로 경제의 '펀더멘털'에 민감하다. 투자수익을 좌우하는 노동, 세제 등 제도가 중요하다. 환율을 걱정하는 경제부총리라면, 한은 총재라면 국회를 찾아 설득하고 몸을 던져서라도 노란봉투법, 법인세 인상 등을 막아야 한다. 한국의 투자 매력이 떨어지면 수급 조절은 무용지물이다.

'한국, 노란봉투법 폐지'란 기사가 외신에 나오면 환율 걱정은 안 해도 될 것이다. 투자자들은 '원고(高)'에 베팅할 테니.

환율은 한 국가의 역량 지수다. 역량을 떨어뜨리는 제도를 양산하면서 소중한 달러를 풀어 환율을 잡겠다고 한다. 독의 밑바닥을 깨놓고 물을 부어 채우겠다는 말과 똑같다.

[김선걸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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