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로 건너뛰기
검색
매일경제 언론사 이미지

스스로를 넘어 타인의 삶까지 끌어안을 수 있게

매일경제 구정근 기자(koo.junggeun@mk.co.kr)
원문보기

스스로를 넘어 타인의 삶까지 끌어안을 수 있게

속보
이 대통령, 유철환 국민권익위원장 면직안 재가
그 어느 때보다 타인의 삶과 생각에 무차별적으로 노출되는 시대다. 소셜미디어 콘텐츠와 리얼리티 프로그램은 어떤 삶이 바람직한지,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피해야 하는지를 끊임없이 말한다. 그만큼 자신만의 기준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일은 올해 유난히도 버겁게 느껴졌다. 새해를 앞두고 스스로는 물론 타인의 삶까지 포용하는 문장을 통해 조용히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 비교와 판단이 일상이 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문장들이 담긴 책을 모았다.

빛과 실

"필멸하는 존재로서 따뜻한 피가 흐르는 몸을 가진 내가 느끼는 그 생생한 감각들을 전류처럼 문장들에 불어넣으려 하고, 그 전류가 읽는 사람들에게 전달되는 것을 느낄 때면 놀라고 감동한다. 언어가 우리를 잇는 실이라는 것을, 생명의 빛과 전류가 흐르는 그 실에 나의 질문들이 접속하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는 순간에."

한강 작가는 2024년 '역사적 트라우마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인간 삶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강렬하고 시적인 산문'이라는 평가와 함께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작가는 노벨문학상 수상 기념 강연에서 '빛과 실'을 통해 문학과 언어가 인류를 잇는 하나의 실이며, 그 실을 따라 생명의 빛이 흐르고 있다고 설명한 바 있다.

신작 에세이집 빛과 실은 당시 수상 강연문 전문을 비롯해 미발표 시와 산문, 그리고 작가가 처음으로 온전한 보금자리를 마련한 뒤 기록한 '북향 방'과 '정원'이라는 일기까지 총 12편의 글을 작가의 사진과 함께 묶은 책이다. 시와 산문, 일기라는 서로 다른 형식의 글들은 자연스럽게 이어지며 장르의 경계를 넘나들어온 작가의 글쓰기를 자연스럽게 담았다. 이 책은 문학과지성사의 산문 시리즈 '문지 에크리' 아홉 번째 권으로 출간됐다.

'빛과 실'은 "세계는 왜 이토록 폭력적이고 고통스러운가? 동시에 세계는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가?"라는 두 질문 사이의 긴장과 내적 투쟁 속에서 이어진 한강의 글쓰기가 결국 "언제나 사랑을 향하고" 있었음을, 그것이 "내 삶의 가장 오래고 근원적인 배음"이었음을 차분히 증명한다. 시차를 두고 쓰인 시와 산문, 일기와 사진은 서로 교차하며 작가의 글에 깃든 빛과 그림자, 낮과 밤을 자연스럽게 상상하게 한다. 한강 지음, 문학과지성사 펴냄.


단 한 번의 삶

"때로 어떤 예감을 받을 때가 있다. 아, 이건 이 작가가 평생 단 한 번만 쓸 수 있는 글이로구나. 내게 이 책이 그런 것 같다." 김영하가 60만부 이상 판매된 '여행의 이유' 이후 6년 만에 선보인 신작 산문집 '단 한 번의 삶'은 유료 이메일 구독 서비스 '영하의 날씨'에 2024년 연재했던 글을 다듬어 묶은 책이다.

그동안 김영하는 산문을 통해 자신의 독서 경험이나 작가로서의 생활, 여행에서 마주한 풍경들을 이야기하며 '지금의 삶'을 주로 다뤄왔다. 그러나 이번 산문집에서는 처음으로 자신의 삶 전체를 전면에 놓는다.


책의 시작은 어머니의 빈소다. 알츠하이머병을 앓다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죽음 이후, 빈소를 찾은 친척들의 입을 통해 생전 알지 못했던 어머니의 삶이 하나둘 드러난다. 가장 가까운 가족이라고 믿어온 존재에게도 미처 알지 못한 시간이 있었음을 깨닫는 순간, 작가는 삶의 불가해함과 타인의 깊이를 새삼 실감한다.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로 문을 연 책은 이어 아버지에게 품었던 첫 기대와 실망의 순간으로 이어진다. 유년 시절과 학창 시절의 기억, 성인이 된 이후의 방황과 선택들이 차례로 호출되며, 순간적인 충동으로 삶을 포기할 뻔했던 경험까지도 숨김없이 회고한다. 삶의 결정적인 장면들은 미화되지도, 과장되지도 않은 채 작가 특유의 담담한 문장으로 놓인다.

작가는 또한 지금의 자신에 이르기까지 스스로 배반해온 사회적 통념들에 대해서도 돌아본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 앞에서, 김영하는 단정적인 답을 제시하는 대신 자신이 어떤 기준을 의심하고 어떤 선택을 거부해왔는지를 솔직하게 드러낸다. 김영하 지음, 복복서가 펴냄.


죽음은 직선이 아니다

'죽음은 직선이 아니다'는 누구보다 많은 죽음을 목격해온 암 전문의이자 과학자인 김범석 서울대 종양내과 교수가 삶과 죽음의 경계를 탐구한 산문집이다. 베스트셀러 '어떤 죽음이 삶에게 말했다' 이후 4년 만에 선보인 이번 책에서 저자는 암을 단순한 질병이 아닌, 생명의 원리를 비추는 존재로 바라본다.

이야기는 열일곱 살에 폐암으로 아버지를 잃은 개인적 경험에서 출발한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한 정신적·경제적 고통 속에서 저자의 마음에는 "왜 우리는 죽는가"라는 질문이 깊게 자리 잡는다. 이 질문은 결국 그를 의사의 길로 이끌었고, 응급실과 암병동에서 수많은 죽음의 순간과 마주하게 했다. 저자는 죽음을 예측가능한 직선이 아니라 어느 순간 급격히 무너지는 '임계점'의 문제로 설명한다.

책은 암을 향한 인류의 오랜 투쟁사도 짚는다. 암을 언급한 고대 이집트 의학 문서에는 치료법이 '없음'이라고 명시돼 있다. 그러나 이후 인류와 암의 싸움은 계속돼왔다. 수술과 방사선, 항암화학요법에서 분자표적항암제와 면역항암제에 이르기까지 암 치료의 발전 과정을 따라가며 과학이 이뤄낸 성과와 동시에 여전히 남아 있는 한계를 보여준다. 특히 면역항암제의 등장은 암을 외부의 적이 아닌 '변형된 내부의 자아'로 인식하게 만든 전환점으로 소개된다.

저자는 암을 이해하는 과정이 곧 '나 자신'을 이해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암은 없애야 할 적이면서도 생존을 위해 진화해온 생명 시스템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식의 전환은 죽음을 패배나 비극이 아닌 삶의 스펙트럼 일부로 바라보게 한다. 김범석 지음, 흐름출판 펴냄.

렛뎀 이론

"그들의 감정은 내 몫이 아닙니다. 내버려두세요. 그리고 당신이 할 일을 하세요." 타인의 기대와 평가, 감정에 휘둘리느라 정작 자신의 삶을 놓치고 있다면 '렛뎀 이론'을 통해 마음의 방향을 다시 잡아보는 것은 어떨까. 세계적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강연가인 멜 로빈스의 신작 '렛뎀 이론'은 문제의 원인이 능력이나 성격이 아니라 '통제의 방향'에 있다고 말한다.

'렛뎀(Let Them)'은 말 그대로 '내버려두기'다. 타인의 말과 감정, 행동처럼 통제할 수 없는 일에 에너지를 쓰는 대신,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반응과 행동에 집중하라는 의미다. 저자는 직장과 인간관계, 일상에서 반복되는 좌절의 원인을 "내 삶의 주도권을 남에게 넘겨준 상태"로 진단한다. 다른 사람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애쓰고, 기대에 맞추느라 자신을 소진하다 보면 어느새 자신의 삶은 뒷전으로 밀린다는 것이다. '렛뎀'이라는 거리 두기를 통해 자기 소진을 멈췄다면 다음 단계로 '렛미(Let Me)'가 뒤따른다. '그들은 내버려두고, 나는 한다'는 메시지다. 회의에서 아이디어가 주목받지 못했을 때나 친구들 사이에서 소외감을 느낄 때도, 상대의 반응은 내버려두고 내 삶에 필요한 선택을 하라는 것이다. 저자는 타인의 행동이나 평가가 자신의 가치까지 결정하도록 허락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렛뎀 이론'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먼저 확산됐다. 저자가 공개한 60초 분량의 영상은 수천만 회 조회되며 화제가 됐고, 'Let Them'이라는 문구를 문신으로 새기는 이들까지 등장했다. 다만 책은 이러한 화제성에 머무르지 않는다. 심리학과 신경과학, 인간관계 연구를 통해 왜 이 방식이 효과적인지를 설명한다. 멜 로빈스 지음, 윤효원 옮김, 비즈니스북스 펴냄.

뇌가 힘들 땐 미술관에 가는 게 좋다

미술관을 걷고 콘서트홀에 앉아 음악을 듣는 일이, 단지 지친 마음을 달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실제로 뇌를 회복시킬 수 있다면 어떨까. '뇌가 힘들 땐 미술관에 가는 게 좋다'는 극도의 효율과 속도를 요구하는 사회를 살아가며 지친 현대인의 뇌를 위해 예술이 지닌 치유의 효과를 과학적으로 풀어낸 책이다.

존스홉킨스대 의대 산하 국제예술마인드연구소 창립자인 수전 매그새먼과 구글 하드웨어 제품 개발부 디자인 부총괄 아이비 로스가 공동 집필한 이 책의 중심에는 '신경미학'이라는 개념이 있다. 신경미학은 아름다움을 마주할 때 인간의 뇌가 어떻게 반응하고 변화하는지를 연구하는 분야로, 예술을 취향이나 여가 영역이 아닌 생리학적 회복과 치유의 자원으로 바라본다. 책은 음악 플레이리스트가 알츠하이머병 환자의 기억 회복을 돕고, 가상현실 프로그램이 화상 환자의 통증을 완화하며, 미술 수업이 소방대원의 트라우마 치료에 기여한 사례들을 소개한다. 실제 연구에 따르면 복제품이 아닌 미술관에서 원본 작품을 감상할 때 감정적 반응이 최대 열 배까지 증가한다. 무엇을 보고 듣고 경험하느냐에 따라 뇌가 끊임없이 재구성된다는 '신경가소성' 이론이 이를 뒷받침한다. 예술의 효과는 개인의 뇌 건강 차원을 넘어 조직과 사회의 운영 방식으로까지 확장된다. 2008년 불황에 빠졌던 스타벅스는 예술과 문화적 감각을 접목한 리더십 워크숍을 통해 브랜드 정체성을 재정비했고, 이는 기업의 재도약으로 이어졌다. 저자들은 이러한 사례를 통해 예술이 창의성뿐만 아니라 회복탄력성을 높이고 공동체의 방향성을 회복시키는 힘을 지녔다고 말한다. 수전 매그새먼·아이비 로스 지음, 허형은 옮김, 윌북 펴냄.

[구정근 기자]

[ⓒ 매일경제 & mk.co.kr,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