챗GPT |
올 한 해만큼 국가 시스템과 운영을 책임지는 행정부에 대한 의문이 드는 해가 있었을까. 2020년 미국 대선 부정선거론을 주장했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1기에 이어 올해부터 2번째 임기를 시작했다. 한국에선 지난해 말 반헌법적 계엄을 선포한 윤석열 전 대통령의 탄핵 선고 이후 정치적 여진이 계속됐다. 상식적이고 합리적이며 조리 있는 엘리트들이 국가를 운영해야 한다는 엘리트주의는 시효를 다한 것처럼 보인다. 다사다난했던 한 해. 국가의 존재 이유와 변화상을 조명하고, 무너진 시스템 속 개인의 역할을 환기하는 책들을 모았다.
인류사에서 국가가 오래도록 평화를 누리는 시기는 예외적이다. 모든 국가와 사회는 반복적으로 정치적 불안에 시달린다. 책의 저자인 피터 터친 옥스퍼드대 인류학과 교수는 사회 붕괴의 원인을 찾기 위해 시곗바늘을 나폴레옹 전쟁으로 되돌려놓고, 현대까지 300여 건의 역사적 사례를 분석해 원인을 찾았다. '클리오다이내믹스'라는 계량역사학적 접근법을 활용해서다. 그가 찾아낸 사회 붕괴의 토양은 끊임없이 양산되는 엘리트 간 내분과 궁핍해진 대중의 분노였다. 대표적인 사례는 미국의 남북전쟁이다. 미국은 전쟁 직전인 1820~1860년대 상대적 임금(국내총생산에서 노동자 임금으로 지불된 액수의 비중)이 약 50% 감소했다. 가난해진 대중은 불만을 폭동으로 표시했다. 이 기간 발생한 도시 폭동 사례만 38건이었다. 일반 대중과 달리 엘리트는 경제 성장의 과실을 대부분 가져갔다. 부를 늘린 엘리트의 숫자도 많아졌다. 엘리트 간 신구 경쟁도 격화했다. 저자는 미국 외에도 로마제국, 명나라, 프랑스혁명 등 역사적 사례를 거론하며 현대사회에서도 유사한 패턴이 관찰되고 있다고 경고한다. 높은 대학 진학률에 양질의 일자리 경쟁이 격화되고 경제사회적으로 양극화가 심해지는 한국에도 동떨어진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피터 터친 지음, 유강은 옮김, 생각의힘 펴냄.
나라 간 국경은 있지만, 빈곤엔 아무런 경계가 없다. 지구상 모든 곳에 가난은 있다. 국가별 차이점은 빈곤의 밀도다. 전 세계 빈곤 문제에 대한 도덕적 책임과 실질적 행동의 필요성을 환기하는 책 '빈곤 해방'의 저자이자 실천윤리학의 거장 피터 싱어 프린스턴대 교수는 학생들에게 하나의 윤리적 딜레마를 던진다. '양복을 차려입은 당신이 출근 도중 연못에 빠진 아이를 구하기 위해 뛰어들 수 있느냐'는 질문이다. 학생들의 답변은 '구한다'다. 싱어 교수는 재답변을 통해 빈곤 문제를 환기한다. "물에 빠진 아이는 지금도 존재하지만 우리의 시야에서 멀어서 없다고 느껴질 뿐이다."
저자는 물에 빠진 아이를 구하는 것이 당연하다면, 전 세계에서 절대빈곤으로 신음하는 이들을 도울 도덕적인 의무가 있다고 주장한다. 도덕적 의무는 가장 큰 고통을 줄여주고, 될 수 있는 한 많은 생명을 구하는 효율적인 자선 행위로 실행돼야 한다고 그는 역설한다. 말라리아가 자주 창궐하는 지역에 모기장을 설치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비용 대비 효율이 압도적이어서다. 싱어 교수는 "지난 10년간 극심한 빈곤 감소에 큰 진전이 있었지만 여전히 수백만 명이 하루 1.9달러 미만으로 살아가고 있다"며 "우리에게는 아직 해야 할 일이 많다"고 강조한다. 피터 싱어 지음, 함규진 옮김, 21세기북스 펴냄.
역사는 어떻게 진보하고 왜 퇴보하는가
혁명에는 '반동'이란 상수가 따라붙는다. 급진적 변화를 낳는 작용에는 항상 구체제를 유지하려는 반작용이 가해진다. 세계 외교정책 전문가이자 CNN 간판 정치 프로그램 '파리드 자카리아 GPS'의 진행자인 파리드 자카리아가 쓴 저서 '역사는 어떻게 진보하고 왜 퇴보하는가'는 지난 400년 역사를 '혁명과 반동'이라는 변증법을 동원해 꿰뚫어낸다. 세계화 혁명과 정보 혁명, 정체성 혁명, 지정학적 혁명이라는 4가지 프리즘으로. 개방된 시장과 국제 협력이란 '국제주의'를 표방한 세계화 혁명은 2차 세계대전 이후 국경을 허물어가며 인류의 새 질서를 구성했다. 그러나 전 세계적 불평등이 심화되는 가운데 번지는 불안과 분노는 다시 국경을 소환하고 있다. 더 이상 전 세계의 번영을 위해 미국이 희생하지 않겠다는 '미국 우선주의'를 표방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다시 권좌에 오른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인터넷의 대중화로 직접민주주의를 구현해낼 줄 알았던 정보 혁명은 온라인 세계를 살찌웠지만 역설적으로 시민들의 유대와 참여, 진정성은 약화시키고 말았다. 파리드 자카리아 지음, 김종수 옮김, 부키 펴냄.
독일 나치의 홀로코스트(유대인 학살)에 부역한 나치 친위대 간부 아돌프 아이히만은 철학자 해나 아렌트가 펴낸 책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악의 평범성'을 보여주는 이로 오랫동안 정의됐다. 사유 능력이 결여된 채 권력이 시키는 대로 임무를 수행하는 평범한 사람이 얼마든지 '악'이 될 수 있다는 결론과 함께. 독일 철학자 베티나 슈탕네트는 저서 '예루살렘 이전의 아이히만'을 통해 선배 철학자인 아렌트의 결론에 반기를 든다. 그는 아이히만이 '순전히 생각 없음'의 화신이 아니라 철저한 신념하에 홀로코스트를 계획하고 주도한 인물이라는 도발적 주장을 내놓는다. 그는 아렌트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아이히만이 망명지인 아르헨티나에서 남긴 녹취록과 자필 원고, 예루살렘 법정에서의 심문 기록 등 총 8000쪽에 달하는 자료를 분석했다. 저자는 아렌트가 아이히만에게서 '악의 평범성'이란 개념을 성급하게 도출해냈다고 평가한다. 아이히만이 전범재판에서 보인 모습만을 참고했을 뿐, 재판 이전의 기록들을 살펴보면 그가 단순히 권력의 명령을 집행하는 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명백하다는 주장이다. 저자의 치열한 연구가 담긴 책은 전범 아이히만의 본색을 적나라하게 노출하고, 아렌트가 남겼던 '악의 평범성'에 대한 사유를 다시 돌아보게 한다. 베티나 슈탕네트 지음, 이동기·이재규 옮김, 글항아리 펴냄.
2013년부터 10년간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출판·체육·저작권 정책을 담당하고 공직사회를 떠난 노한동 작가가 공직사회의 불합리와 부조리, 모습을 응축해 펴낸 '나라를 위해서 일한다는 거짓말'은 올 한 해 관료사회를 뒤흔들었다.
저자는 공직사회가 무기력한 채 무능함을 보이는 이유는 쓸데없는 일이 너무 많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게으른 관료가 아닌, 가짜 노동과 비효율적인 공직사회 내부 규칙 탓에 정작 국민을 위한다는 본질적인 업무를 도외시하거나 왜곡한다는 것이다. 또 수직적인 문화와 정치와 여론에 지나치게 휘둘리는 구조도 짚는다. 그 결과는 공무원들의 무기력과 좌절, 그리고 책임 회피다.
저자는 왜곡된 공직사회의 대표적인 사례로 박근혜 정부가 특정 예술인들을 지원 대상에서 배제했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을 꼽는다. 문체부 공무원들은 블랙리스트를 지시받고 실행할 때도 아무런 저항이 없었다. 사건 발생 이후 처벌과 조사가 끝난 뒤에도, 반성한다는 액션보다 어떤 반응도 하지 않는 것을 미덕처럼 여겼다고 꼬집는다. 저자는 순환보직 제도 개선을 통한 전문성 제고, 책임에 걸맞은 권한 강화, 가짜 노동을 만드는 관행 타파 등 관료 조직의 개혁 방안도 제시한다. 노한동 지음, 사이드웨이 펴냄.
[최현재 기자]
[ⓒ 매일경제 & mk.co.kr,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