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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오래된 미래'에서 찾는 한국 건강보험이 나아갈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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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오래된 미래'에서 찾는 한국 건강보험이 나아갈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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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기 편집국장]

[라포르시안] '오래된 미래'는 이렇다고 명확하게 정의하긴 쉽지 않은 개념이다. 오래된 '과거'와 아직 오지않은 '미래'를 결합한 형용모순이다. 인류가 잃어버린 과거의 가치와 지혜가 오히려 지속가능한 미래를 여는 열쇠가 된다는 역설을 통해서 새로운 통찰을 제시한다. 급속한 고령화, 의료기술의 비약적 발전, 높은 만성질환유병률 속에서 한국의 건강보험제도 역시 이제 '더 많이 쓰는 제도'가 아니라 '오래 버티며 지속가능한 제도'로 전환을 요구받고 있다. 이 전환의 단서는 아이러니하게도 오래된 미래인 건강보험제도의 출발점에 있다.

한국의 건강보험은 1989년 전 국민 확대 시행으로 비교적 짧은 시간 안에 보편적 의료보장의 틀을 완성했다. 건강보험은 사회적 연대를 전제로 한 제도다. 건강한 사람이 아픈 사람을, 고소득자가 저소득자를, 젊은 세대가 고령 세대를 지탱하는 사회보험이다. 위험을 사회적으로 분산하고, 필요에 따라 의료를 이용하되 비용은 함께 부담한다는 연대의 원칙은 제도의 정당성을 떠받쳐왔다. 그러나 보장성 확대가 제도의 유일한 목표처럼 인식되면서 지속가능성이라는 또 다른 축은 상대적으로 후순위로 밀려났다.

지금의 위기는 건강보험 보장성 확대와 지속가능성 간 정책적 불균형에서 비롯된다. 고령 인구의 급증과 함께 진료량 중심의 지불체계, 행위별 수가에 기반한 보상 구조는 의료 이용을 자연스럽게 확대시키고 있다. 보편적 보장이라는 오래된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이제는 그 약속을 가능하게 했던 제도적 절제와 효율성을 다시 호출해야 한다.

'오래된 미래'의 두 번째 키워드는 가치(value)다. 건강보험은 본래 질병 치료뿐 아니라 건강 수준의 향상을 목표로 하는 사회보험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투입된 비용과 제공된 의료행위의 양이 성과를 대체해 왔다. 이로 인해 필수의료와 고위험·중증 진료는 상대적으로 저평가되고, 검사·영상 등 반복 가능한 의료행위는 과도하게 확대되는 구조가 고착됐다.

지속가능한 제도는 의료비를 줄이는 제도가 아니라, 같은 비용으로 더 나은 결과를 만드는 제도다. 진찰과 상담, 예방과 관리, 환자 안전과 진료의 질 같은 요소가 합당하게 평가받는 구조로의 전환은 이미 오래전부터 논의돼 온 과제다. 최근 상대가치점수 상시 조정, 대안적 지불제도 논의는 이러한 '가치 중심' 전환을 제도적으로 복원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건강보험의 지속가능성을 논할 때 빠지지 않는 또 하나의 오래된 미래는 '일차의료 활성화'다. 많은 국가가 고령화 국면에서 의료비 증가를 완화한 배경에는 강력한 지역 기반 일차 의료체계가 있었다. 한국 역시 의원급 의료기관이 의료서비스 이용의 첫 관문이란 점에서 제도적 기반은 갖추고 있다. 문제는 역할과 보상이 분리돼 있다는 점이다. 만성질환 관리, 예방, 조기 개입이라는 일차 의료의 본래 기능은 충분히 보상받지 못한 채 환자 유입을 위한 경쟁적 진료 구조로만 내몰려 왔다. 오래된 미래는 여기서도 분명하다. 환자를 오래 보는 의료, 지역에서 건강을 관리하는 의료가 지속가능성을 만든다는 사실은 이미 여러 차례 확인돼 왔다.


건강보험 재정은 단순한 숫자의 문제가 아니다. 국민이 보험료를 기꺼이 부담할 수 있는가, 의료계가 제도의 규칙을 신뢰하는가의 문제다. 건강보험 재정의 지속가능성이 불안해질수록 단기 처방식 수가 억제나 급여 축소가 반복되고, 이는 다시 제도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진다. 지속가능한 개혁은 '덜 쓰자'는 메시지가 아니라, 어디에 어떻게 쓸 것인가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전제로 한다. 필수의료, 취약계층, 미래세대를 위한 투자라는 명확한 우선순위가 제시될 때, 재정 관리 역시 설득력을 얻을 수 있다. 건강보험 재정 투입 확대와 지출 효율화, 진료비 지불제도 개혁, 의료전달체계 정상화 등을 통해 지속가능한 필수의료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

한국 건강보험이 마주한 선택지는 다양하고 복잡해 보이지만 나아가야 할 방향은 의외로 단순하다. 보편적 건강보장, 사회적 연대라는 건강보험제도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으로 돌아갈 것인가, 아니면 단기적 재정 논리에 휘둘릴 것인가의 문제다. 오래된 미래는 새로운 제도를 발명하란 요구가 아니다. 이미 알고 있었던 해답을 실행할 정치적·사회적 용기를 묻고 있다. 지속가능한 건강보험은 미래 세대에 부담을 전가하지 않는 제도이자, 현재의 의료현장이 신뢰할 수 있는 제도다. 그 길은 멀리 있지 않다. 오히려 우리가 처음 출발했던 자리, 그 오래된 약속 안에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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