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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적 동시성’, 또 하나의 진영 신화 [세상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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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적 동시성’, 또 하나의 진영 신화 [세상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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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일 촬영된 미국의 국가안보전략(NSS) 보고서. AP 연합뉴스

지난 10일 촬영된 미국의 국가안보전략(NSS) 보고서. AP 연합뉴스




김정섭 |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



올 한해 미국과 유럽 학계에서 자주 거론된 개념 가운데 하나가 ‘전략적 동시성’(strategic simultaneity)이다. 이는 유럽, 인도·태평양, 한반도 등 서로 다른 지역에서 위기가 동시에, 그리고 상호 연계돼 전개될 수 있다는 우려를 뜻한다. 이른바 ‘현상타파 세력의 축’(axis of revisionists)이라 불리는 중국·러시아·북한이 전략적 공조를 강화하면서, 미국과 서방 동맹국들이 복수의 전략적 도전에 동시다발적으로 직면할 수 있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특히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유럽 안보와 인도·태평양 지역의 안정은 분리될 수 없다는 시각이 널리 공유되고 있다. 대만해협과 한반도 위기가 동시에 발생할 가능성 역시 주요한 우려로 제기된다. 대만해협에서 위기가 촉발될 경우 북한이 기회주의적 행동에 나설 수 있다는 관측 때문이다. 한편, 제이비어 브런슨 주한미군사령관은 ‘뒤집어 놓은’ 동아시아 지도를 통해 인·태 지역 우방국 간의 전략적 연결을 강조한 바도 있다.



유럽, 대만, 한반도를 상호의존적 안보 공간으로 바라보는 이러한 접근은 서방 동맹국 간 전략적 연대와 협력을 한층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공급망과 방산 생산능력 협조를 넘어 지휘통제, 감시·정찰, 국방기획 전반의 동조화 필요성도 강조되고 있다. 이는 엄밀한 의미의 상호방위 의무를 전제하는 것은 아니지만, 공통의 상황인식과 통합적 전략 공조, 상호보완적 군사태세가 유지돼야 한다는 주장이다. 나아가 권위주의 진영의 동시적 핵 강압 가능성에 대비해 서방 국가 간 핵 억제 태세의 조율 필요성도 거론된다.



전쟁과 지정학 귀환의 시대에 안보의 상호의존성은 부인하기 어려운 흐름이다. 영국·프랑스·독일 등 유럽 국가들은 수년 전부터 남중국해에서 ‘항행의 자유 작전’을 수행하며 인·태 지역에서 안보적 존재감을 확대해왔다. 특히 우크라이나 전쟁은 북-러 군사 협력의 부활과 북한군 참전이라는 새로운 국면을 낳으며, 한국과 유럽 모두를 긴장시키고 있다. 이런 현실 때문에 전략적 동시성이라는 서방의 논의가 국내에서도 큰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유의해야 할 부분이 있다. 정보 공유나 방산·공급망 협력을 넘어 작전과 억제 차원의 통합까지 지향한다면, 이는 지나친 단순화이자 과도한 진영 논리다. 이래서는 현실적인 처방을 기대할 수 없고, 한국의 전략적 자율성만 훼손될 수 있다. 무엇보다 유럽, 대만해협, 한반도를 연결된 하나의 전구로 간주하는 것부터가 의문의 대상이다. 엄밀히 보면, 각각의 지역은 고유의 안보적 도전과 우선순위를 갖고 있는 별개의 전구다. 한 지역의 위기가 다른 지역의 안보에 파급 효과를 불러올 수는 있으나, 각 지역은 자신의 안보 위협에 주력할 수밖에 없다. 북·중·러 위협을 흔히 한 덩어리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으나, 러시아와의 전쟁은 유럽이, 중국과의 전략경쟁은 미국이, 북한 위협은 한국이 주도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불가피하다.



더욱이 최근 발간된 미국의 국가안보전략서(NSS)가 보여주듯, 자유주의 대 권위주의라는 이분법적 구도는 이미 설명력을 잃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의 친러 행보를 넘어 트럼프 행정부가 유럽을 향해 이념적 공격까지 가하면서 서방 내부의 분열 양상도 노출되고 있다. 미-중 경쟁에서도 군사·지정학적 차원보다는 경제적 관계를 중시하는 한편, 대중 견제의 부담과 책임은 동맹에 전가하려는 모습이 뚜렷하다. 이런 상황에서 북·중·러의 현상타파 행위와 서방의 전략적 공조라는 구도에만 집착하는 담론은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 자유무역 질서의 훼손과 서반구 장악 시도에서 드러나듯, 미국 스스로가 규칙 기반 국제질서를 허물고 있는 게 작금의 현실이다.



한국의 대외전략이 이제 한반도에 갇힌 협소한 관점을 극복해야 한다는 지적은 타당하다. 그러나 과거 자유주의 질서에 대한 관성적 인식으로 변화된 세계에 접근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또한 대리경쟁과 대리전쟁의 희생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부지불식간에 다른 나라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는 인식의 함정도 주의할 필요가 있다. 대한민국의 글로벌 대외전략은 오직 우리의 관점과 국익에 기초해야 한다. 인도·태평양뿐 아니라 유라시아 대륙과 글로벌 사우스까지 함께 조망하는, 이른바 ‘한국판 지구본 부감 외교’가 요구되는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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