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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의 운디드니 학살로 원주민 200여 명 참변 [김정한의 역사&오늘]

뉴스1 김정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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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의 운디드니 학살로 원주민 200여 명 참변 [김정한의 역사&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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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0년 12월 29일



운디드니 학살 희생자들의 집단 묘지 (출처: Northwestern Photo Co., 1891,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운디드니 학살 희생자들의 집단 묘지 (출처: Northwestern Photo Co., 1891,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서울=뉴스1) 김정한 기자 = 1890년 12월 29일, 미국 사우스다코타주 운디드니 인근에서 미 제7기병대가 무장 해제 중이던 수족(Sioux) 원주민들을 향해 무차별 사격을 가해 최소 200명 이상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사건의 발단은 원주민들 사이에서 확산되던 '유령 춤'(Ghost Dance) 신앙에 대한 미 당국의 과잉 대응이었다. 미군은 원주민들의 종교적 의례를 백인에 대한 반란의 전조로 오판하고, 추장 '빅 푸트'가 이끄는 부족을 추격해 운디드니강 유역에 포위했다. 미군은 투항한 원주민들을 대상으로 무기 압수 절차를 시작했다.

이때 의사소통이 불가능했던 한 청각 장애인 원주민이 자신의 총을 놓지 않으려다 군인과 실랑이가 벌어졌다. 그 과정에서 의도치 않은 총성이 한 발 울려 퍼졌다. 이를 신호로 주변 언덕에 배치되어 있던 미 제7기병대는 즉각 사격 명령을 내렸다. 미군은 기관포 4문을 동원해 계곡 아래 원주민들을 향해 집중 포화를 퍼부었다.

학살은 순식간에 아비규환으로 변했다. 첫 발포 직후 대부분의 전사가 쓰러졌음에도 미군은 인근으로 도망치는 부녀자와 아이들을 끝까지 추격해 살해했다. 한 생존자는 "백기를 흔들며 자비를 구했으나 미군은 사냥하듯 사람들을 쏘아 죽였다"며 참혹했던 상황을 증언했다.

사건 직후 거센 눈보라가 몰아쳐 수많은 시신이 들판에 얼어붙은 채 방치됐다. 며칠 뒤 돌아온 군인들은 얼어붙은 시신들을 거대한 구덩이에 던져 넣어 집단 매장했다. 미 육군 수뇌부는 이 참극을 '전투'로 명명하고 가해 병사 20명에게 명예 훈장을 수여하는 등 사건의 본질을 왜곡했다. 그러나 훗날 대다수 역사가와 인도주의자들은 이를 명백한 '인종 학살'로 규정했다.

운디드니 학살은 북미 대륙에서 지속된 백인 정착민과 원주민 간의 무력 충돌 역사의 마지막 페이지였다. 오늘날 운디드니 계곡의 비극은 미합중국 역사에 기록될 지울 수 없는 치욕의 현장으로 남았다.

acenes@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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